리뷰[Review]/영화

영화 화차 (火車, 2012) 리뷰

시북(허지수) 2013. 2. 15. 22:12

 보고 나면, 먹먹함으로 인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 경우 무슨 말을 해야할 지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화 화차가 그렇습니다. 이럴 때는,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야 겠습니다. 알려져 있듯이 원작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저처럼 게임마니아 입니다. 심지어 그녀가 좋아하는 게임 중에 "택틱스오우거" 라고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밤을 새워가면서 좋아했던 작품이지요. (웃음)

 

 그 게임을 상징하는 문구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희망과 같이 절망이 있고..." 그리고, 그 작품의 세계관은 이렇습니다. "악인은 없다, 정의와 정의가 싸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이 놀라운 세계관은 제게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영화 화차에 대해서도 비슷한 지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인간을 과연 악인, 혹은 쓰레기로만 몰아붙일 수 있는가?" 희망을 가지고, 동시에 절망에 빠지는 한 인간에게 구원은 어디 있으며, 신은 어디 있는가? 그 깊은 심연 속으로 끝까지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하얀 거탑 이후 저는 김명민과 이선균의 팬이 되었습니다. 김명민의 온화함과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연기투혼은 너무 매력적이고, 이선균의 따뜻함과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는 남자가 들어도 참으로 근사합니다. 그 이선균(장문호 역)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영화는 시작합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약혼녀 선영씨. 문호는 선영씨를 찾아서 이것저것 알아보는 도중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녀의 정체가 위조되었다는 것! 참으로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결혼을 약속했던 그녀가 사실은 가짜 라는 것에 문호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다급하게 강력계 형사였던 사촌형을 찾아가서 도움을 구합니다. 나의 그녀를 좀 찾아줘!!!! 절규하는 문호를 보고, 사촌형 종근은 쿨하게 말합니다. 내가 뭐 흥신소냐!!!

 

 화차가 사회적인 소설이고, 무서운 이유가 이제부터 조금씩 밝혀집니다. 그녀에 대해서 파면 팔수록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화차를 보며,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사회의 현실을 다시금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는 그가 사라지더라도, 아무리 울부짖더라도, 공허 속의 메아리가 된다는 것. 우리는 가진 자를 숭배하며, 가지지 못한 자를 멸시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끝까지 진행되어 나간다면, 가장 먼저 약한 자들이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무서우리만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가짜 선영의 본명은 차경선. 그녀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선택할 수 없었던 부모 밑에서, 가혹하게 시달렸던 사람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모가 직접적으로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무책임했고, 그녀는 아버지를 잘못둔 죄(?)로 인해서 지독한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성당을 다니던,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던 그녀는, 자신이 꿈꾸었던 행복을 조금 맛보자마자, 곧바로 한없이 추락하며, 생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채로 인해서, 경선은 계속해서 시달리게 되었고, 결혼생활은 깨지고...

 

 그는 이렇게 지옥을 향해서 질주하는 차에 타고 있는데, 브레이크를 계속해서 밟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브레이크는 고장났지요. 아무도 그녀를 구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운전대를 잡았다는 신은, 그녀를 그렇게 지옥으로 인도했습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 쓰자면, 신이 아니겠지요. 바로 사회 시스템이 순진했던 그녀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돈의 힘이 지배하는 사회가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화차는 그 어떤 영화보다 잘 보여줍니다.

 

 마침내 지옥에서 탈출한 경선은,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바에야,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타인의 삶을 박살내 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합니다. 여기서 제일 소름돋는 것은 결국 가장 약한 사람을 타겟으로 골라서 잡아먹는다는 부분입니다. 어차피 강한 사람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테니, 경선은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지요. 이 현실이야말로 정말 무섭습니다. 현대는 연결되어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인터넷이 아무리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지만, 찰스 테일러가 언급한 "직접 접근형 사회"를 맞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책임지고, 자신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점점 사회적 연대는 툭툭 끊어져 나갑니다.

 

 저는 최신 스마트폰으로 예를 들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가고, 사진을 찍고, 각자가 인화해서 가져갈 사진의 종류를 정하고, 비용을 걷고, 사진을 나눠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하나를 처리하려고 한다면 일단 서로 만나야 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의견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요? 각자가 고성능 카메라인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간직할 사진과 지울 사진은 내가 혼자서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간다는 발상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사할지 모르나, 그만큼 피곤한 일일 수 있음을 이제 우리는 저마다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사회가,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직접 접근형 사회는 이토록 무서울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무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윗집에서 떠들면 내가 올라가서 해결해 버리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고, 공공적인 기능들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하면, 최후에는 "인간 불신의 사회"로 돌입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공공 도서관에서 책이 수없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경찰을 믿지 못하고 사설 보안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그렇게 사회가 점점 폐색공간이 되어갈 때, 언제나 고통을 먼저 겪는 것은 이번에도 약한 사람이 됩니다.

 

 경선은 이제 확연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사회는 나를 구원해줄 수 없음을.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구원하기로 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선영씨의 행세를 합니다. 그렇게해서 과연 그녀는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스스로 손을 더럽히기 시작하면, 선한 사람이라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경선은 행복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약혼자의 품에 안겨 있어도 그는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그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지요.

 

 아무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고, 그녀는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선택합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죄에 책임을 지고,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내고, 만약에 먼 훗날 석방되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함을 누리지 못할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행복은, 현세에 있지 않았겠지요. 따라서, 문호가 그렇게까지 절규하고, 울부짖었던 모습을 저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그녀를 구원해보고 싶었던 간절함. 그 소중한 마음이 이 영화의 유일한 아름다움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함께 놀던, 소꿉 친구 K군(익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누나가 자행한 인감도용과 사기사건으로 인해서 거액의 빚을 부담하게 되었고, 이것을 해결한다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덕분에 저는 같이 법원도, 구치소도 가보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았을 때의 그 기분을 제 친구는 단 한 문장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야,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 저는 친구의 소주잔을 채워주면서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다독였습니다.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밖에 못하는 제 모습이 한심해서 더욱 괴로웠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친구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던 부분에 한해서 빚을 변제해 나갔고, 이제는 최종정리를 하였습니다)

 

 일본의 변호사는 이런 말을 한 바 있습니다. "다중 채무자는 원자력 발전소 청소 등의 작업을 하는 노동자가 된다. 과거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위험한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이야기가 단지 여자만의 이야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일본의 원전이 폭발한 것은 우리가 잘 알지요)

 

 그러므로, 남자 역시도 함부로 빚을 떠안기 시작해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기 시작하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가장 열악한 일들을 가혹하게 견뎌내가면서 간신히 살아가든지, 혹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든지. (물론 파산과 면책 등의 법적인 구제장치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쉽사리 악용될 만큼 간단하게 만들어져 있는 제도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주의해야 할 것은 돈과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사치에 쉽게 눈 멀지 않도록. 그리고 돈을 벌고 조금이라도 모아나가는 것에 대해서 참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가 이토록 보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경제권이야말로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의존해서 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절망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몇 번이고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최근 스스로에게도 자주 이야기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그렇게 편안하고 정겨운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면에는, 돈으로 끝없이 유혹하는 손길이 가득하다는 것도 반드시 직시해야 합니다.

 

 화차를 보면서 먹먹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최근 저는 영화채널을 자주 보는 편인데, 광고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돈을 (그것도 좋은 조건으로) 빌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 황금시간대의 광고는 비싸고, 또 타겟을 두고 광고를 하니까요. 당연히, 역으로 추적해 들어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돈이 필요한 사회가 되었고, 그만큼 돈을 빌려쓰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미 몇 번 했던 이야기지만, 또 토요일이 되면 또 로또번호가 검색어 1위로 올라올 것입니다. 화차는 이것이 문제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좋은 사회라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또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돈을 모아서 누릴 것을 누려나갑니다. 그런데 병든 사회라면, 이말을 살짝만 바꾸면 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누군가에게만 있고, 아무리 노동을 열심히 해봐도 돈은 모아지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것은 그림의 떡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유혹의 손길 앞에서 내가 직접 돈을 빌려서라도 해결하려는 욕구 앞에 이기기가 힘들어지고, 우리의 인생은 대출광고에 스쳐지나가는 경고 문구처럼, 그 빚을 대가로 불행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지요.

 

 영화 한 편을 두고, 지금까지 무거운 이야기를 길게 써놓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처럼, 자신의 한 번 뿐인 인생을 우리가 소중하게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사고 파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어떤 순간에서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쉽고 편한 지름길에 유혹당하기 보다는, 조금은 고생스럽더라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선택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저마다의 삶이 부디 스스로 서 있는 그 날을 저는 간절히 꿈꿉니다. / 2013. 0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