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백제의 전성기와 추락, 근초고왕과 성왕 이야기

시북(허지수) 2013. 3. 24. 23:42

 역사를 생각해 볼 때는, 언제나 연결고리를 염두해 두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무슨 영향을 받았는가? 당시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라는 배경을 좀 더 생각해 본다면, 사람들의 행동을 보다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백제를 살펴보기에 앞서, 살짝 부여에 대해서 언급하면 좋겠네요. 고구려는 부여에서 온 고주몽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옥저 역시 부여족의 갈래라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백제는? 백제는 고구려 계통의 세력이 밑으로 내려와서 세운 나라입니다. 즉 간이화살표를 만든다면 부여 → 고구려 → 백제 이렇게 연결고리가 있는 셈이지요. 백제는 훗날 남부여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부여의 피와 자부심이 흐른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부여는 5세기까지 존재했는데, 고구려가 잘 나가던 5세기에 마침내 역사에서 막을 내립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백제! 백제를 생각하면, 약간의 선입견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가령 전라도 지역이 백제다, 혹은 백제는 어쩐지 약하고 존재감이 없는 것 같다 등 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영향을 받아서 백제사는 다소 축소된 느낌이 있는데, 하나하나 살펴본다면, 백제는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근초고왕쯤 가면 그야말로 한반도의 절대강자 시절도 있었습니다.

 

 우선 백제의 초기 출발지역은 지금의 서울지역 입니다. 이 지역을 고향처럼 좋아하고, 사랑하는 백제사람들이지요. 또한 문화적으로도 고급문화가 있는 백제만의 멋이 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논어와 천자문을 전달해 주는 사람도 백제인들이었습니다. (아직기, 왕인 등) 고구려는 중국에 위협받는 지리적 특성으로 성장과 빠른발전(개혁)이 어려웠는데, 거기에 비한다면, 백제는 한 번 발동 걸리면 급속도로 발전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3세기에 고이왕 이 등장해, 6좌평과 16관등제 를 만들면서, 본격적 중앙집권국가로 강하게 자리 잡아나갑니다. 관복의 색깔도 있었는데,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급수별로 공무원을 나누고, 옷색깔을 정한 셈입니다. 당연히 훨씬 안정적이며, 왕권이 강화됩니다. 각자의 내부적 역할이 뚜렷하게 정해지고 나자, 백제는 밖으로도 눈을 돌립니다. 한강 유역 대부분을 점령해 영토를 조금씩 확장해 나갔고, 위쪽에 있는 낙랑지역을 공격해 보기도 하고, 위세 좋은 백제의 3세기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한편 당시 3세기 고구려는 중국 위나라의 공격으로 제법 고생중이었지요)

 

 이제 4세기 중반, 정복군주로 이름 높은 근초고왕이 등장합니다. 활발한 정복활동과 강력한 왕권 은 유명합니다. 남진을 과감하게 추진하며 마한의 나머지 영역까지 모두 정복합니다. 발동 붙으니 말릴 수 없습니다. 북쪽으로 돌격하며 고구려에게도 맹공을 퍼붓습니다. 백제의 맹공으로 371년, 고구려의 왕이 전사했다고 지난 번 살펴보았지요. 근초고왕은 뿐만 아니라, 중국 요서와 산둥 지방에도 진출했으며, 일본 규슈에 진출해서, 상업 세력을 형성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4세기 한성(서울)을 중심으로 백제는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고, 부자상속을 할 만큼 왕권이 강했습니다. 이후 침류왕 때, 불교를 공인하면서 강한 중앙 집권 국가를 갖추었지요.

 

 상상력을 잠시 발휘해본다면, 왜 근초고왕은 당시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을까요? 끝까지 올라가서 만주벌판을 달리는 백제를 만들기에 부담스러웠을까요? 혹은 시대의 한계나 판단 미스였을까요? 중국와 일본 역사서에까지 백제왕 중에 처음으로 그 이름이 등장할 만큼, 강인한 군주였던 근초고왕은 어쩌면 후대에 그렇게 백제가 몰락할지 예측하지 못했겠지요.

 

 한편, 이쯤에서 왜국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민족적 시각에서는 당시 섬나라 왜국은 열등하다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균형을 좀 잡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국은 문화적으로 백제에서 책들이 전파되었고, 또한 백제와 가야에서 철기를 수입해 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군사적으로는 왜국도 상당한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 겠지요. 초창기 신라를 거의 무력으로 삼킬뻔 한 것도 왜국이었고요.

 

 역사의 뇌관같은 "칠지도"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해석이 심각하게 다른데, 가령 우리는 일본에게 하사한 검이다. 라고 위엄있게 주장하며, 일본측은 왜국에게 백제왕이 바친 검이다. 라고 주장하는데. 감정적 주장을 조금 걷어내고, 사실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검이 오고 갈만큼 두 나라는 가까운 사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동맹이나 혈맹의 관계로 본다면 어떨까? 라는 시선도 있습니다. 예전에 일본천황이 우리는 백제의 피가 흐른다고 실언한 것을 본다면, 확실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백제가 훗날 몰락하고 망해갈 때, 왜국에서 4만명의 대군이 백제를 지원하고자 넘어왔다는 것도, 두 나라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협력관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험대비용으로 공부하자면, 백제는 일본과 많은 교류가 있었다 정도로만 이해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한편, 잘 나가던 백제는, 5세기 고구려의 걸출한 쌍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들어서면서, 심각한 위기로 접어듭니다. 특히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며, 백제의 영토를 그야말로 잡아먹으면서 내려오는데, 충주까지 내려와 중원고구려비를 딱하고 세워놓았지요. 백제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기가 죽는 일이었습니다. 오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고, 거의 도망에 가깝게,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웅진은 가는 길도 좁고, 거의 방어적 지형에 수도를 정한 셈인데, 산성 같은 곳에서 몸을 움츠리며,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4세기에 그토록 빛나던 백제는 이대로 더 이상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하면서, 반격에 나서야 했습니다. 저력의 백제 반격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우선 동성왕은 나.제 동맹을 강화하면서, 압도적인 고구려에 대항하도록 외교를 추진합니다. 이어서 6세기 무령왕이 되면 특수 행정 구역인 22담로 를 설치합니다. 이 곳 구역마다 왕족을 파견해서, 귀족을 견제하는 셈입니다. 왕권을 튼튼히 강화시키고, 내부의 결속을 추진. 외부적으로도 신라와 손잡았으니, 이제 복수의 날이 밝아옵니다. 아, 이 흥미진진한 백제사!

 

 마침내 6세기 성왕이 등장합니다! 백제하면, 꼭 기억해야 하는 그 이름 성왕. 일단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깁니다. 방어적 웅진에서, 이제 공격적인 사비로 옮기면서, 그는 다시금 백제 중흥을 준비합니다. 불교를 일으키고, 일본에도 불교를 전달합니다. 위키 표현을 빌려오면, "신라와 수교하고 중국의 남조와 연대하고, 왜와의 제휴를 꾀하여 고구려에 대항한다고 하는 백제의 전통적인 외교 노선"을 밀고 가는 셈이지요. 정말 철저하지 않나요. 역설적으로 5세기 고구려가 얼마나 거대한 세력이었는지 알 수 있으며, 6세기가 되어 백제가 얼마나 치열한 준비 끝에 재시도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국호까지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치며, 온힘을 모은 성왕은, 이제 꿈에도 그리던 한성을 되찾기 위해서, 신라의 진흥왕과 손잡고, 북쪽으로 밀고 올라갑니다. 백제의 대반격은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성공이었습니다! 성왕은 드디어 한강 유역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너무 짧았지요. 신라의 재기 넘치는 어린 진흥왕은 배신을 감행 합니다. 한강 유역은 이제부터 신라의 땅이 되었지요. 이른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백제의 몰락은 어쩐지 슬퍼보이기도 합니다. 외교란 이토록 무서운 세계지요. 생존의 문제이고, 기회의 문제이기 때문에, 또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외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는 일이라는 험한 표현도 있습니다. 성왕은 지금 머리 뚜껑이 열렸습니다. "시...신라 너희가!!! 배신을!!!" 왕자까지 데리고 성왕은, 냅다 신라의 진흥왕을 맹렬히 공격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끝내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성왕 이었지요. 백제는 이후 나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훗날 의자왕이 신라를 맹공하며, 버텨보긴 하지만 결국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백제의 최후는 통일신라로 가면, 나중에 살펴볼 날이 오겠지요)

 

 백제에 대해서 최태성 선생님은 이런 재치있는 비유를 듭니다. "젊었을 때 잘 나가다가, 중년에는 동업자와 사업하다가 망한 셈" 이라는 아주 씁쓸한 인생 교훈이라 볼 수 있지요. 보증을 서지 마라, 사업을 같이 하지 마라는 교훈은 백제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저 역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성왕의 처지가 어쩐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이제 다음 이야기는 신라편으로~

 

 오늘은 어떤 영감을 생각해 볼까요. 세련되고 섬세한 문화의 백제, 역사서를 가장 먼저 편찬했고, 절과 탑이 많았던 나라. 역사는 강자나 승자 위주로 기록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백제는 어쩐지 고구려나 신라보다 없어보인다는 느낌을 간혹 줍니다. 그런데 4C 근초고왕 시절과 6C 성왕 시절의 패기를 생각해 본다면, 백제 역시 아주 치열하고, 강인한 국가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룰보다 힘이라는 씁쓸한 교훈만이 떠다니네요. 가장 가까운 나라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 백제에서 배울 수 있는 어쩌면 가장 가슴 아프고도, 혹독한 교훈이 아닐까 싶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