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고대의 경제 생활 - 귀족과 농민의 대비되는 삶

시북(허지수) 2013. 4. 1. 01:30

 마치 귀족을 안티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살짝 듭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ㅠㅠ 삼국시대부터 살펴보면, 고대의 귀족들은 녹읍(또는 식읍)이 있어서 수조권(세금 걷는 권리)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비들이 있어서 각종 생활 서비스도 다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자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재테크(?) 하면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농민들을 노비로 만들거나, 땅을 빼앗기도 합니다. 아후, 어찌 귀족을 좋아할 수 있겠어요.

 

 (이걸 조금 가혹하게 패러디로 비유하자면, 프랜차이즈 업체를 운영하면서, 남이 일하는 것의 일정금액을 매달 가져가고, 돈이 많으니 나 대신 가사도우미를 불러서 귀찮은 일에서 해방되고, 남는 돈으로는 공격적 헤지펀드나, 혹은 사채업을 하면서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소수겠지만, 분명히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삼국시대 에는 조세(곡물), 공납(특산물), 역(요역이나 군역)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역이라고 하면, 15세 이상 남자라면 모두 해당되었는데, 오늘날로 친다면 아직 애같은 중3이라도 국가가 부르면, 국경선 가서 전쟁에 동원되거나, 궁궐 쌓는 일을 몇 년 해야하고, 정말 장난 아닙니다. 게다가 삼국시대에는 아직 농업이 덜 발달되어 생산력이 낮았기 때문에, (조세가 필요했던 국가는) 인두세를 거두었는데, 그로 인해 사람 수에 따라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해마다 부담감에 시달리며 굶어죽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사실, 농민들이 이런식으로 하나 둘 죽어가면 국가 입장에서도 상당히 좋지 못한 상황입니다. 아무리 잔인해도, 먹고 살 수 있게는 해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농민 생활 안정을 위해서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진대법 같은 농민안정화 제도 가 있습니다. 보통 곡식은 가을에 걷잖아요. 그러다보니 겨울까지 겨우 먹고 나니, 봄이 오기 시작하면, 굶어죽을 만큼 힘들다는 거지요. 먹을게 없어! 그러다보니 국가(고구려)에서 3월에서 7월까지 관의 곡식을 빌려줍니다. 이거라도 먹고 힘내라는 셈입니다. 역사에 공짜가 있을리 없습니다. 당연히 10월이 되면 되갚아야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고, 굶어죽기 직전에는 국가가 먹거리 빌려준다는 느낌이랄까요. 이것이 진대법 입니다.

 

 농업을 보면 - 농민들은 시비법(비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땅에 농사를 한 번 지으면, 그 땅은 힘을 기를 때까지 다시 몇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농사짓기도 참 어려웠는데, 6세기쯤 되면,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고, 소농사(우경)이 확대 되면서 그나마 (과거에 비해) 생산력이 상당히 증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수공업은 처음에는 기술이 뛰어난 노비에게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들게 했는데, 점차 수공업을 관리하는 관청을 따로 두고, 수공업자를 배정해서 물품을 생산했다고 합니다. 줄여서 관영 수공업의 정착.

 

 상업은 꽤 중요한 대목입니다. 삼국시대에 경주에는 "동시"라는 시장이 있었고, "동시전"이라는 관청 까지 있어서 물건들을 사고 팔았습니다. 또한 무역에서는 신라가 진흥왕 때, 한강을 차지하는데 이후 "당항성"을 통해 당나라와 직접 무역 을 하게 되는 것이 시험에 종종 등장합니다.

 

 이제 삼국시대에 이어, 발해와 통일신라 이른바 남북국시대 로 넘어가 봅니다. 조세는 근본적으로 비슷합니다. 수조권이 여전히 있어서 곡물의 1/10을 내야 했고, 촌락 단위로 특산물을 내야 했으며 (공납), 아 역은 조금 조정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16~60세 남자까지만 정남 이라고 부르며, 노동력을 동원했습니다. 이런 조세, 공납, 역은 계속해서 나중에도 이어집니다. (이런 오랜 전통이 있어서 일까요? 요즘에도 지역 특산품이라는 말은 자주 쓰네요.)

 

 남북국시대에도 농민안정책은 중요합니다. 농업 중심의 고대사회에서, 농민들은 곧 국가재정 이었으니까요. 특이할 만한 것은 통일신라의 "정전의 지급"입니다. 좋게 본다면 국가가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준다는 느낌이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백성들의 사유지를 국가가 인정해주면서, 수조권을 얻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꿔 말해 이런 느낌이지요. "좋다, 여기는 네 땅이다, 그러니 이제 1/10 수조권 알지? 꼬박꼬박 잘 내도록" 고대 경제는 관념적으로 전부 왕의 땅이므로, 갑의 수조권을 농민들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었던 셈입니다.

 

 상업활동도 이제 상당히 번성해서, 시장 "동시"외에도 서시, 남시 등 각종 시장이 들어섰고, 당나라와의 무역을 긴밀하게 하면서 많은 물건들이 오갑니다. 무역이 활성화 되면서, 이슬람 상인까지 울산항에 올 정도라고 하니, 장난아니네요. 이 시대의 유명인 있잖아요. 해상왕 장보고!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무대를 주름잡았다고 합니다! 당나라에서도 직접 발해관을 만들어서 무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놀랍게도 당나라 동쪽 끝 산둥 반도 등지에는, 신라인들의 거주지역 이른바 "신라방" 이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미국의 코리아타운과 맞먹는 거 아니겠어요. 통일신라가 되면 이처럼 사적인 무역도 발달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자, 이제 시험 등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목이 있으니, 바로 통일신라의 경제정책인, 녹읍폐지 → 관료전 → 녹읍부활 의 삼단변화 입니다. 녹읍은 귀족들의 강력한 경제기반이었습니다. 수조권+공물+역(노동력,군사력)까지 모두 맘대로 쓸 수 있던 귀족의 녹읍 을, 통일신라의 신문왕이 마침내 폐지시켜 버립니다. 놀라운 사건이었지요. 녹읍이 전격폐지되면서, 이제 관료전으로 대체 되고 맙니다. 기본적으로는 비슷하지만, 관료전은 수조권+공물 까지만 가능합니다. 관료전으로 바뀌면서, 귀족들이 이 지역 사람들을 마음대로 군사력으로 부릴 수 없었던 겁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점은? 국가의 힘(왕권)이 막강하고, 귀족이 추락하던 통일 신라 초기였지요. 약 30년이 지나자 국가는 처음으로 백성에게 직접 정전을 지급하면서 수조권을 많이 얻어내고자 합니다.

 

 아, 그러나 역습의 귀족! 결국 이런 개혁은 기득권을 잘 누리던 귀족들의 반발을 지속적으로 부르며, 100년도 채 못가서,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하게 됩니다. 귀족들은 비록 소수일지 모르나,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단체로 왕과 힘겨루기를 해도 쉽게 밀리지 않는다는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녹읍이 부활하면서 권력관계에서 왕이 흔들리기 시작하고(왕권약화), 왕이 살해당하는 등 통일신라 후대에 왕권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은 인상적입니다.

 

(*여담 - 저는 경제선진국과 경제후진국의 차이가 이와 비슷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진국 일수록 귀족들이 자신의 의무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심지어 부자가 더 세금을 많이 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옵니다. 후진국 이라면, 감세에 열광하고, 부자에게 높은 세금을 물린다는 것을 지독할 정도로 혐오할 것입니다. 결정적인 가치관의 차이가 아닐까요? 통일신라의 역사적 모습은 귀족이 특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떤 멋진 설명보다 잘 보여줍니다. 글쎄요. 저는 이게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고도 보입니다. 경제적 특권 사랑하는 나라, ㅇㅇ권 좋아하는 나라, 그런 집단이 만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대략 마치며, 다음 문서에서는 고대의 사회모습을 살펴보지요. 이번 이야기에서 얻은 짧은 영감은 역시 "경제의 중요성", "자유의 중요성" 입니다. 살펴보면 느낄 수 있듯이, 평민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지만 법적으로만 자유인일 뿐, 실제로는 조세,공납,역의 부담콤보에 자꾸 시달리며 생활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전역한 남자들에게 물어보세요. 최악의 상상은? "군대 또 가는 것"일 겁니다. 어딘가에 얽매여서 자유를 잃어버린 삶이란 그토록 가혹한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은 경제적 자유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되어야, 세상이 좀 밝아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꽤나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20대, 30대가 아프고 우울하고 힘든 까닭이 다른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자유를 얻기가 많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일단 돈부터 벌자면서, 월화수목금금금 잔업과 야근, 혹은 주야교대 등의 생활을 버티기도 많이 어렵습니다. 일자리의 질이 힘들면, 삶의 질이 같이 떨어지고, 결국 행복함도 동반추락하기 쉽습니다. 해답을 저는 멀리에서 찾고 싶지는 않습니다. 결국 모두가 잘 사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행동하는게 필요합니다.

 

 재밌는 이야기로는 수년전 유럽에서는 해적당이라는 인터넷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당이 출범했는데, 놀랍게도 독일 자를란트 주에서는 녹색당을 제치며 의회 진출을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역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제도적으로 농민의 권리를 누군가 대변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평생 그토록 가혹하게 시달리면서 살았다는 것이 오늘 영감의 마무리 입니다. 물론, 간혹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는게 마음 아프지요.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잘해줄 것을 너무 기대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가지는게 어느 때보다 중요한 21세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