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고대 사회의 모습들 - 국가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전설을 찾아서

시북(허지수) 2013. 4. 2. 15:08

 죄송합니다. 제목이 좀 오버한 것 같습니다. 고대 사회의 모습들 - 국가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전설을 찾아서. 그런데 정말로 통일신라 말기에 가면, 국가에 반기를 들면서,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붉은 바지를 입고, 경주까지 쳐들어 가는 대단한 위세의 농민군들. 소수가 호화로운 삶을 탐하며, 다수가 피폐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분노를 폭발시키는 모습은 오늘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입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현실감각을 잃고, 국가개혁을 외면하는 순간, 기득권은 끝장나는 것 아니겠어요 :) 여하튼, 흥미롭게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봅시다.

 

 기본적으로 고대에는 신분제 사회 였습니다. 왕 아래, 귀족, 평민(농민), 천민(노비) 3개의 신분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거의 고착화 되어서 계속 흘러가는데, 아주 세월이 흘러 조선시대 후기쯤 가서야 신분제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꿔 말해, 고대에는 신분이 고착화 되어 있어서, 신분 이동이 불가능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능력이 뛰어나도 신분 때문에, 진급을 할 수 없던 신라 6두품 같은 경우, 사회에 강한 불만을 가지면서 나중에 점차 개혁 세력이 되어 갑니다.

 

 (예를 들면, 사회에서는 공정한 룰, 공정한 경쟁 같은 인식이 중요합니다. 스포츠로 비유하면, 위험한 반칙만 계속 나오는 경기는, 이른바 더러운 경기가 되고 맙니다. 미리 승부를 조작으로 정해놓고, 경기를 진행한다면, 그런 모습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오늘날 사람들이 그나마 실력 위주의 공정한 경쟁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들 공무원 시험 등을 준비하는 것을 본다면, 일자리가 없는 것과 함께 비공정한 사회가 문제라고 강하게 생각합니다. 집안이 힘있는 사람이라, 저절로 일자리가 낙하산 타고 생겨나는 일은 지금까지도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괜찮은 일자리를 알선해 준 대가로 돈을 요구하고. 이런 소소한 잘못부터 바로 잡는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 고구려의 사회 모습을 봅시다. 삼국 시대는 엄격한 율령 제도를 갖추고 있어서, 형법이 대단히 셉니다. 잦은 전쟁을 해야 했던 고구려는 더욱 그렇겠지요. 어쩌면, 군법이 보수적이고 엄격한 것과 비슷합니다. 반역자는 사형에 처하고, 적에게 항복이라도 했다간 역시 잡히면 사형입니다. 1책 12법이 있어서, 도둑질 했다가는 12배 물어줘야 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엄격한 법을 어기면, 그 책임을 물어서 노비로 삼았습니다. 사회 통제 측면에서는 상당히 강한 힘을 발휘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안일하고 느슨한 사회였다면, 고구려가 중국과 싸워서 이길 수 없었겠지요. 여하튼, 그래서 고구려 사회를 무예와 용맹을 중시하는 상무적 기풍이라고도 말합니다.

 

 다음 백제, 사회면에서는 전반적으로 고구려와 마치 형제처럼 닮은 느낌이 있습니다. 엄격한 제도와 호전적 기질 뭐 비슷합니다. (물론 4-5세기에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만 -_-; 정치적으로는 그렇고, 사회적으로는 유사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백제는 중국과 활발히 교류한 편이었는데, 새로운 문물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다 보니, 백제는 삼국 중에서, 한층 더 세련된 문화를 자랑 합니다. 상당히 안정된 제도들이 있어서, 귀족들은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투호, 혹은 바둑 같은 놀이도 즐겼다고 합니다. (제 노년의 꿈도 바둑을 즐기면서, 느긋하게 사는게 소망인데... 쓸데없는 소리 죄송합니다. 하하.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괜히 아저씨 같군요 -_-...)

 

 얼른 넘어갑시다! 자자, 신라! 신라는 씨족사회의 전통이 있다는 게 시험의 단골손님입니다. 다함께 어울리면서 논의한다는 것이지요. 어, 이런 느낌의 제도 혹시 느낌이 옵니까? 다 모여서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결속력을 강화하고, 각 집단을 견제하는 이 제도, 바로 화백회의 입니다. 벌써 시험에 나왔다고요? 네 언젠가 또 한 번 나올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함께 어울리는 문화로는 화랑도 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수련한다고 모여서 강인한 힘과 정신력을 기르는 제도 화랑도! 화랑도는 귀족인 화랑과 더 낮은 계급인 낭도(귀족+평민)들이 함께 이루어져 있었는데요. 이들이 어울리면서 함께 군사적 인재가 되어갈 수 있었기에, 화랑도는 일종의 계급갈등을 완화시키는 측면, 다르게 말해 사회불만을 해소시키는 기능 이 있습니다.

 

 (사실, 이건 조금 놀라운 대목입니다. 화랑도에서 땀흘려서 커가다보면, 이를테면 "신라의 자랑스러운 모범인"이 되는 것이며, 이러다 보면, 신라가 골품제를 갖고 있는 폐쇄적 신분사회라는 생각을 망각하게 됩니다. 자부심에 너무 차 있으면, 구조의 모순을 의식조차 안 하게 되지요. 현대사회로 친다면, 성공에 대해서 너무 자뻑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너무 자랑하다 보면, 지금 사회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게 될 수 있습니다. 고대 역사가 전하는 한가지 훌륭한 통찰이랄까요.)

 

 끝으로 남북국 시대의 재밌는(?) 문화로는 빈공과 시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빈공과는 한자를 풀어쓰면, 공물을 바치는 외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중국(당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 이었는데요. 발해의 많은 지배층 들이 빈공과에 응시해서 좋은 성적을 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유학가서 성공해서 돌아오는 셈이랄까요) 덧붙여, 통일신라에서도 최치원 같은 총명한 인물들이 당나라 시험에 합격한 유학파 입니다.

 

 신라는 통일 후에는 민족융합책을 사용하면서,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습니다. 지난 번에 살펴본 중앙군 9서당에서는 신라인 외에도 백제,고구려,말갈인까지도 모두 국가를 지키는 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에게도 관등을 지급했습니다. 꽤 놀랍지요. 비유로 설명하자면, 지난날 백제인이라도 노력하면 통일신라의 공무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사회 모습들만 살펴보고 마무리 하면 되겠습니다. 신라는 말기에 왕위다툼이 아주 치열했고, 진골귀족끼리 살벌했습니다. 중앙에서 서로 정신 없이 다투다 보니, 지방에서는 호족세력이 크게 힘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골품제도 살짝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1~3두품에 해당하는 낮은 귀족들은 사실상 힘이 없고, 세력도 작다보니, 점차 평민화 되어갔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모순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입니다. 거품도 꺼지기 마련이고요. 귀족은 어떤 생산 활동에도 종사하지 않으면서 사치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고, 평민과 천민은 희생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서, 흥덕왕이 사치를 금지하자고 까지 지시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말로 권고하는게 쉽게 통할리가 없습니다. 그로부터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9세기 말부터 농민군 봉기가 본격시작 됩니다. "더 이상 못 살겠다!!!!!!! 이 XXX들아!!!!!!!!"

 

 통일신라 말기 대표적인 것이 원종과 애노의 난 이 있습니다. 기록으로 볼 때, 가장 최초의 난(반란)으로 기록되고 있는 상당히 규모 있는 투쟁이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던 일이야 당연히 있었겠지만, 이 원종 애노의 난은 조직적으로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 중요한 지점입니다. 문득 슬프네요. 과연 농민들이 행복하게 살았던 순간이 한국사에서 얼마나 될까요. 피지배층이 행복하게 살았던 순간이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거나, 아예 없거나, 혹은 지금도 약자들이 살기 괴롭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거나, 이런 측면도 한 번쯤 고민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다음 문서는 고대의 문화와 사상들을 살펴봅니다.

 

 오늘의 영감은 어디로 잡으면 좋을까요. 저야 뭐, 당연히 제 가치관상으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생각해 봅니다. 신라 하대에 농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로는 귀족의 사치스러움과 함께 왕권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사람들이 이제 못 살겠다며 도망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 매우 강렬한 대목입니다. 이건 질문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국가가 엉망진창으로 하면서, 자기들 끼리 잘 먹고 잘 사는데 혈안이 되어있을 때, 우리는 NO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농민들은 마침내 알게 된 게 아닐까요. 현실에서 도망쳐봐야 굶어죽기 십상이고, 남의 집 품팔이 하다가 노비가 되기 십상이고...

 

 대출 받고 알바 하다가, 시간이 흘러 생계가 막막해져 급기야 자살까지 생각하는 오늘날과 대비하면, 약 1100년 전의 모습은 어떻게 느껴지는지 궁금합니다.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신라말 사회모습인 "효녀 지은" 이야기에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웠던 모녀가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점차 생활이 궁핍해져서 대성통곡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는 그 때 NO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대성통곡 대신에 말없이 자살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면, 우리는 대안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병원비도 없는데 제발 아프지 말자고 다독이면서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에 물들지 않은 가슴 뛰는 희망들이 모여,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아볼 수 있는, 그런 대담한 용기가 있기를 감히 바라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