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미이라 (The Mummy, 1999) 리뷰

시북(허지수) 2013. 4. 3. 15:48

 영화 미이라는 보고 있으면 즐겁고 유쾌합니다. 적당한 긴장감과 유머도 섞여 있고, 신나는 모험 영화로는 상당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업적으로 크게 히트를 치며, 4억 달러가 넘는 흥행수입을 기록합니다. 돈을 벌어다주는 미라 군요. 하하. 늘어지지 않고, 전개감이 빠르다는 게 장점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명쾌합니다. 대부분 황금유물을 찾아서 한탕을 꿈꾸며 "하무납트라" 라고 불리는 죽음의 도시를 향해 열심히 움직입니다. 3천년 정도의 시간과 황금이 합쳐져 있다면, 그 금전적 가치는 엄청날테니까요. 뭐 예측할 수 있듯이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모험의 어려움"을 재밌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는 모험영화에서 "부비트랩" 그러니까 함정을 유심히 보는 편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장치가 숨겨져 있을까. 뭐가 튀어나올까. 이걸 어떻게 극복해 나갈까. 같은 것이 묘미였지요. 제일 욕망이 강한 사람이 함정에 걸려서 일찍 죽어버리는 공식이 어릴 때부터 굉장히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한때, 마시멜로 이야기 같은 논리가 유행했었는데요. 일단 눈앞의 쾌락을 참고 견디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비법이다 같은 논리였지요. 이걸 모험영화에 대입하면, 일단 보물 앞에서 멈춰서서, 부비트랩부터 살펴보자! 이것이 살아남는 비법이다! 라고 패러디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휴, 이걸로 서론은 채웠고 -_-;;; 어서 본편으로 떠나봅시다.

 

 

 영화는 상당히 비극적인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3천년전 고대 이집트, 감히 왕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던 대신관 이모텝의 용기가 놀랍지요. 사랑에 마음을 빼앗기면, 죽음을 각오하고, 만남을 이어가는게 언뜻 굉장합니다. 이모텝은 결국 처참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여인 아낙수나문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면서 자결하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합니다. 더욱 멋진 것은, 죽음도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3천년이 흘러도, 이모텝은 여전히 아낙수나문을 원하고,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합니다. 요즘이야 연인과 백일 넘기기도 힘든 판인데, 어디보자 3천x365... 무려 백만일 넘게 변치 않는 마음이 조금은 애틋합니다. 하하.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끈질기게 탐험을 추구하는 장교 오코넬과 도서관 사서 에블린, 그리고 그녀의 오빠 조나단까지 이들은 나름대로 힘을 합쳐서 고대의 비밀을 풀어내 보려고 노력합니다. 문제는 이런 좋은 기회를 여러 사람이 함께 끼어들면서 발생합니다. 너희들만 황금을 찾지 말고, 우리도 같이 숟가락을 놓겠다며 우르르 사람들이 지금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저주 같은 미신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용감하게 봉인을 풀어버립니다. 아~ 그리고 마침내 휘리릭 하고 등장하는 미라의 멋진 모습! 이제 사람들 큰일 났습니다. 영화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미라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영화의 큰 특징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미라 이모텝은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낙수나문을 만나야 하니까요. 게다가 약점도 없어보이고 굉장히 강력합니다. 총도 안 통하고, 사라졌다가 등장하고, 거의 무적에 가깝습니다. 우연히 고양이에게 약하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 영화의 압도적 주연은 어쩌면 "미라" 입니다. 인간은 벌레 한마리에 쓰러질 만큼 힘이 없지만, 미라는 떠있는 비행기도 추락시킬 수 있는 무서운 녀석입니다.

 

 자, 그럼 여기서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왜 고대의 권력자들은 (예컨대 대신관 이모텝도 고위직 입니다) 불사신이 되기를 그토록 원했을까요. 글쎄요, 영원한 삶이 엄청난 즐거움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집트의 미라나, 중국의 불로초 같은 이야기들은 모두 영원한 삶, 다시 태어나는 삶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후세계에서도 잘 살 수 있도록 비싼 옷과 가구들을 함께 매장하기도 했습니다.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은 꽤나 용감한 선택의 밑바탕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후세계가 있을 수 있고, 다시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아낙수나문이 용기 있게 자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그녀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얽매여서 노예처럼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내가 원하는 삶을 누리겠어 라는 의지가 아주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아낙수나문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강인하면서도 세련된 느낌까지 줍니다. 고대 이집트의 인물로서, 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이른바 "절세의 미인" 클레오파트라 7세가 떠오릅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는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지적인 매력이 있었다 라고 평해지며, 카이사르 마저도 그녀의 지성과 목소리에 찬사했다고 전해집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인간의 매력은 (예쁘면 물론 더 좋다지만) 경쾌한 목소리와 의견을 말하는 능력에 있는 듯 합니다. 설령 내향적인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천천히 분명하게 말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쓴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즐거운 오락영화에 대해서 쓸 말이 별로 없어서이며, 하하, 그리고 둘째, 이모텝 입장에서 봤을 때, 아낙수나문을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로 에블린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에블린은 단지 고마운 여자일 뿐인 셈이지요.

 

 그렇게 봤을 때,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한 가지 신비한 매력은, "사랑하는 사람은 대체 불가능 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사랑했었던 사람과 어쩐지 분위기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겠지만, 이 역시도 환상이었을 뿐, 현실 앞에서는 도저히 그 사람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분명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대체 할 수 없으며, 억만금의 돈으로도 만들어 낼수 없기 때문이지요. 영화에서 이모텝이 잘 보여주잖아요. 그에게 황금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며, 단지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 누구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걸 이렇게 바꿔쓸 수 있습니다. "내가 불행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당신들은 모두 죽어도 된다."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희생된다면 더욱이 또 다른 불행만을 낳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모텝은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시스템적인 사고를 작동시켜보면 몇 가지 선택사항은 이렇습니다.

 

 첫째, 사랑을 포기한다. 이건 남자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니까, 3천년 전에 누구보다 용기 있게 행동했던 그 당시의 모습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글쎄요, 보물 들고 도망가고, 장기가 담긴 항아리를 들고 도망가는 인간들을 향해, 자신의 물건(도구)을 빼앗고 되찾기 위해서는, 매우 강력한 방법이 아니고서야 힘들 것 같긴 합니다. 말도 안 통하는 인간에게 "장황하게 사연을 설명해서" 항아리를 돌려받을 수 있지는 않았을 테고요. 그렇다고, 이모텝에게 현대어를 배우고, 설득의 기술을 익히라고 하기에는, 좀 말이 안 됩니다. 셋째, 나는 이루지 못했으니, 너희들은 사랑하면서 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간다. 이 역시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내가 실패한 것을, 너희들이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현자 수준의 성인일 텐데, 그런 사람은 드뭅니다.

 

 결국 이모텝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아리를 되찾아서, 아낙수나문을 부활시키고, 함께 이야기를 다시 나누면서, 못다한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3천년이 지나서도 그가 생각했던 "단 하나의 꿈" 입니다. 여기까지 놓고 본다면, 이모텝의 초인적인 의지에 대해서는 감탄하게 됩니다. "아무도 우리의 사랑을 막지 못해" 라고 써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과거의 미라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이 불행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초점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맞춰지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작은 통찰이 하나 지나갑니다. 이모텝이 그토록 열망하고 꿈꾸던 삶을,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룰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즐겁게 사는 그 소박한 행복이야 말로, 이모텝이 온몸이 부숴저가는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루고 싶어했던 "꿈"입니다. 질문으로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삶을 행복하게 누리고 있습니까?" 라고 쓸 수 있습니다.

 

 조금 당황스럽게도 장문 리뷰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저는 영화 미이라를 생각해 보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라고 자문해 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값비싼 황금이 없다고 하더라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는 삶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라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엔딩 직전에 그들이 약간의 황금을 챙겨오는 재치를 보여준다지만, 만약 보물을 하나도 못 챙겼다 하더라도, 그들은 티격태격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보물과 기쁨은 "사람"이라는 것을, 저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 2013. 04.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