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근세문화사 1.5 - 교육기관, 그리고 성리학의 잔향

시북(허지수) 2013. 5. 29. 23:55

 제목에 1.5를 붙인 것은, 이번 문서는 사실 별로 내용이 많지 않은 터라, 금방 정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세기와는 상당히 다른 16세기 문화가 있는데, 대표적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림이 집권했기 때문에, 사대적인 분위기가 흘러나온다는게 가장 인상적입니다. 16세기 역사서에는 사대적 성격이 있는 동국사략이 있으며, 유명한 이율곡이 썼던 기자실기가 있습니다.

 

 기자가 누구냐 하면, 중국사람이거든요.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니, 사림의 성리학자들은 우리나라 정통성의 출발을 (중국)기자로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상당히 당황스러울 수 있는데, 일단 집권한 사림파가 "중국을 중시하는 성리학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이해해 놓고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중국인 "기자"로 인해 고조선이 중국과 일종의 중요한 징검다리를 놓게 되었고, 이것은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했던 겁니다. 이를테면, 16세기 조선 역시도 또 하나의 중국, 소중화의식을 갖고 있었다 고 볼 수 있습니다. 정통인 중국의 맥을 잇고 있는 뿌듯한 조선이라고 파악했던 거지요. 사림파들은 나중에 어찌나 금나라, 청나라를 싫어하고, "친명! 친명!" 하면서 현실감각까지 상실하는 몰락한 사대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 뿌리에는 16세기 사림들이 갖고 있던 중국을 높이고, 동일시 하려는 마음을 이해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16세기 지도로는 조선방역지도가 있습니다.

 

 16세기의 윤리, 의례서로는 이륜행실도가 있는데요. 여기에서는 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아용 교재인 동몽선습도 있었고요. 사람 사는게 그러고보면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예절 가르치고, 애들 책 만들고 등등... 잠깐 여담인데 - 생각해보면, 사람의 의식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언어가 상당히 중요한데요, 한국이나 일본 같은 극소수의 나라에만 높임말이 있다고 합니다. 외국사람들이 한국말 쓰면서, 일상적 높임말 표현에 애를 먹는 것도, 그 동네에서는 그런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표현이 자유로운 서양과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은 언어적인 배경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거지요. 실제로 문화적 배경은 재밌는 결과도 종종 낳는데, 가령, 소, 닭, 풀의 그림 중 비슷한 것 두 개를 묶으라면, 동양은 소가 풀을 먹는다고 묶으며, 서양은 소와 닭이 같은 종이라고 묶습니다. 사고체계가 다르게 작동하는게 흥미롭지요.)

 

 이번 문서의 핵심인 교육기관을 살펴봅시다. 중앙(한양)에는 어떤 교육기관이 있었을까요? 조선의 교육기관 하면, 딱 떠오르는 세글자! "성균관"이 유명하겠지요. 네, 국가가 세운 고등교육기관 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대학교 같은 느낌이지요. 아무나 못 들어갔고, 거의 수능 같은 시험을 거쳐서 제대로 합격한 사람들인 진사, 생원들이 성균관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학문을 더욱 닦아서, 조선 출세의 관문, 과거시험에 도전하는 거지요. 덧붙여 성균관은 문묘를 두어서 옛 성인에게 제사를 지내는 기능도 있었음 을 참고해 두면 좋겠습니다. 중등교육기관(=중,고등학교)으로는 4부학당이 있었습니다. 4부학당 역시 국립인 관학이었는데, 성균관과 비슷한 시스템이었지만, 문묘는 없이 교육만 담당했습니다.

 

 지방에도 교육기관이 있어야 겠지요. 국가에서 만든 지방학교가 있는데, 향교(중등기관)가 있습니다. 전국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치되어서 공부할 수 있었어요. 여기까지가 관이 주도하는 교육기관이라면, 사학은 어땠을까요? 옛날 고려에도 사학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잖아요.

 

 조선도 역시 사학이 발달하면서 굉장히 흥했습니다. 강아지를 향한 우스갯 농담을 들어봤을텐데요.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솔직히 괜히 나온 농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서당은 "사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초등교육기관(기초) 인데요. 옛날 방식의 교육이라 함은, 하나를 알기 위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읽고, 외우며, 끝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때로는 같은 곳을 거의 무한 반복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본질을 깨닫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이러니 같이 지내던 강아지도 비록 의미는 못 깨닫더라도, 비슷한 박자로 멍멍 짖는 개인기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

 

 자, 어쨌든. 현대 교육이 양적으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방의 책 무게가 정말 만만치 않았고, 전과는 어찌나 두꺼웠는지... (공부도 못하는 사람이 꼭 집에서도 공부할 꺼라면서 책을 들고 다니는 오기를 보여주는데, 저도 그런 창피하고 재능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하.) 그에 비해서, 당시 조선에서는 양보다는 "본질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책도 그다지 두껍거나 많지도 않았고요. 본질이 그러면 도대체 뭐냐라고 물으신다면? 조금 당황스러운(?) 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와 우주의 원리"를 깨닫는게 일종의 목표였지요. 끝없는 반복 속에 문득 깨닫는 것을 참으로 중요시 했습니다. (※물론 원리를 깨닫는다는 어감에는 긍정적 의미가 충분히 들어가 있습니다만,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기 어려웠으므로, 조선 후기가 되면,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 즉, 교조적인 모습을 띄는 성리학을 거침없이 비판하며 실학이 등장하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고등교육기관인 서원이 있습니다. 요즘말로 지방 고등학교 및 대학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었던 서원이었는데요. 서원의 구조를 살펴보면, 사당도 있고, 강당도 있고, 서재와 동재라는 기숙사도 있고요. 서원은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염두해 두면 좋겠습니다. 학파의 뛰어난 인물을 기리고, 학풍을 계승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던 서원입니다. 한국 최초의 서원은 주세봉에 의해서 백운동 서원이 세워지는데요. 나중에 왕이 직접 현판을 내려주면서, "소수서원"으로 불리게 됩니다. 면세, 면역의 특권까지 부여했을 정도니, 이정도 서원이라면 엄청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한편, 서원들은 날이 좋은 봄과 가을에 술을 마시고 잔치를 열기도 하는 등, 어진 이를 존중하고, 노인을 봉양하는 "향음주례"를 담당하기도 합니다. (아, 문득 생각납니다. 대학 축제 때, 밤새도록 주막에서 술과 음식을 팔면서, 동이 틀 때까지 뒷풀이 담소를 즐기던 아름다운 시절이... 아, 불필요한 이야기 그만!) 그럼 다음 문서에서는 계속해서 성리학 발달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줄입니다. - 아래부터는 장문의 여담이니 과감히 패스하셔도 좋습니다!

 

 개인적 영감을 생각해 보고 조금 길게 덧붙이면 - 우리나라 지폐와 동전을 살펴보신 적이 있습니까? 천원, 오천원권은 뛰어난 성리학자들이고, 만원은 조선의 이름 높은 세종대왕!, 오만원 역시도 성리학이 이상적으로 꿈꾸던 어머니인 신사임당 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멋진데... 백원이라니! 아, 굳이 분노하는건 아니고요. 다시 말해, 우리는 여전히 조선의 잔향, 성리학적 영향이 남아 있는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단순히 흘러간 수백년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숨을 쉬면서, 무엇인가 번뜩이는 말을 건네는 역사가 된다면 좋겠다 싶고요.

 

 우리나라만큼 학문을 "폼으로" 강조하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의 학력을 본적이 있나요, 일단 학교에 등록만 해놓더라도, 동문으로 자랑스러워 합니다. 좀 냉정하게 말해서, 운동선수가 운동을 잘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멋지고, 근사한 것입니다. 또한 전성기를 마치고 추후에 얼마든지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도 있고요. 실제 사례를 보면 일본 골퍼는 고교 졸업, 대학 중퇴, 무명 대학 재학, 말그대로 다양한 경우가 대다수인데, 우리 나라는 반대라서 골프를 치더라도 반드시 대학의 간판을 등에 업고 있어야 합니다. (이걸 서원스타일이라고 일반화 시킬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만...) "무엇을 하더라도 대학의 간판이 필요"하다면 우울하지 않을까요.

 

 이걸 정확하게 뒤집어서 바라보면, 대학을 나오지 않는다는게 "무시"라는 기제가 작동한다는 뜻이며, 마찬가지 이유로 임금 격차가 발생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더 벌어지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혹은 살아남고 싶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또한 중산층까지도 어릴 때부터 마칠 때까지 빚내어서 공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적 인식부터 바뀔 수 있게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좋은 삶이 가능하다고 상상한다면 조금 무리한 몹쓸 상상력일까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에게도, 정중하게 대하고, 의견을 구하려는 태도가 좋은 게 아닐까요? 저는 머리 좋고 뛰어난 사람의 고견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견 역시도 참으로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느낌을 좀 더 밀고 가면, 결국 우리 사회는 지금 들으려는 사람은 없고, 말하고 보여주려는 사람만 많은게 아닌지... 문득 마음이 아파지는 대목입니다. 예전에는 단순히 어디 출신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테면 "명함"이나, "커리어", 혹은 인맥수첩(?)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기도 했는데, 이걸 좀 더 "실력이 중시되는 사회"로 바꿔나간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난함에도 어릴 때부터, 차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예쁜 차들을 구경하기도 하는데, 요즘들어 선팅한 차들이 참 자주 보이더군요. 신기한 건 비싼 차 일수록 안을 볼 수 없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인의 아는 수녀님이 뼈있는 농담을 하는데, 비싼 외제차 (벤X) 타는 사람 중에서 예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공이 분명 좋은 일이고, 칭찬 받을 일인데도,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자신의 정체를 가리기 바쁜 문화라면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성공"이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회, "가난"이 충분히 배려받는 문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우리 모두 힘을 내봅시다. 치열한 노력 끝에 삶이 성공하더라도 (반칙 대신에) 당당히 올바른 불편함을 선택할 수 있기를 응원하며, 설령 실패가 찾아오더라도 절대로 주눅들지 말고 얼마든지 힘내서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훗날 성리학의 세계가 답을 찾지 못하자, 새로운 학문이 등장했습니다. 오늘날은 자본의 지배가 점점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이제 하나씩, 공공의료기관도 없애고, 국문과도 없애고, 기초학문도 없애고... 글쎄, 당장은 더 많은 이익을 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듯 합니다. 일제 시대에는 한국말을 외면하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고등교육을 외면하고, 역사를 외면하고 조작합니다. 대신에 "돈이 되고, 도움이 되는", 복종하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기술 교육이 장려되었고요. 불과 100년만에 1910년대의 모습이 반복되는겁니까, 지금이 일제 시대도 아닌데, 자본이 왕노릇 하는 시대, 친일파가 여전히 잘사는 시대로 이름만 바꿔서 말이에요.

 

 좋은 제도가 있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부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모습은 조선에만 있는게 아닐겁니다. 부디 숫자와 이익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도 자주 다독입니다. 생각과 고민을 하지 않으면, 기득권의 욕심을 못보게 되고 그럴싸한 논리에 속기도 합니다. 오늘은 괜히 날선 이야기들이 많았네요. 저는 지도자는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탓" 필살기만 쓰면서, 책임을 덮어씌우기에 급급하다면, 영리하고 이기적인 지도자의 잘못인지, 그런 사람을 따르는 이들의 잘못인지... 성장률 떨어지고, 비정규 사회에 가속도가 붙고, 먹고 사는게 더 힘들어진다면, 자살공화국의 오명은 당분간 계속될 것만 같아서 깜깜한 새벽에 문득 속상함이 차올라 눈물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절대로 쉽게 포기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