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다빈치 코드 (The Da Vinci Code, 2006) 리뷰

시북(허지수) 2013. 8. 22. 23:09

 국내뿐만 아니라 거의 세계적으로, "종교계에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영화"로 잘 알려진 다빈치 코드를 최근에야 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장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재밌는 스릴러 영화였다니, 좋잖아!!! 어째서 이게 반종교 영화인거지?" 오히려 영화 중반에 나오는 한 대목, 예수라는 존재가 등장해서 "유일신과 사랑"을 설파하고 다닌지 불과 3세기 만에, 크리스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라는 대목은 아찔한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야기들은 초창기에 정말로 인기가 없어서, 예수가 이야기를 설파하기 시작하자 대부분 사람들이 다 떠나가버릴 정도 였다고, 성서에 나와있으니까요. 그렇게나 외면받던 예수라지만, 오늘날까지도 그를 좇는 사람이 참 많고요. (혹여 오해가 있으시면 안 되니까 미리 밝힙니다만) 물론, 저도 그 중에 한 명이자, 기독교인이기도 합니다. 뭐, 그렇다고 다빈치 코드 비난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다만 생각할 꺼리를 찾아보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즐거운 리뷰지요.

 

 예를 들어본다면, 21세기인 지금 들어봐도 예수의 주장들은 충분히 파격적입니다. 악인을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은밀히 구제하라, 비판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처세서와 완전 반대되는 길이잖아요. 인간은 본디 성공을 좀 자랑하고 싶고, 남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위안받고 싶고, 내 편만 사랑하면서 울타리를 치고 싶어하는데, 예수의 설파는 정말이지 반은 황당하고, 반은 이상하다는 느낌입니다. 예수의 주장을 처음 접했던 사람들은 "어휴, 저 인간 뭐야?" 라고 생각했을 거 같고요.

 

 

 자, 어쨌든 서론은 이쯤으로 하고, 이 영화는 "예수가 결혼을 했고, 지금도 그의 후손이 존재한다" 라는 매력적인 설정을 놓고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을 긴장감 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밝혀진다면, 당연히 기존의 교계는 치명타를 입게 될터이니, 영화에서 이들은 끝없이 누려왔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흑막처럼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한편 주인공 랭던교수와 소피양은 "숨겨진 비밀"을 찾기 위해서, 끝까지 모험을 계속해 나가고요. 비밀을 추적하는 친절한 모험영화랄까요. 그럼 재밌었던 대목들 위주로 생각을 나눠볼까 합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앞서 언급했듯이, 본디 예수교의 메인테마는 "사랑"입니다. 단 한 문장으로도 축약되는데,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이 말에서 무엇인가를 빼버릴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이웃을 빼버리는 거지요. 그러면 그 좋았던 말이, 순간에 변질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을 사랑하기에 무엇이든 하겠다." 어쩐지 섬뜩하지 않나요.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종교계 고위 간부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온갖 부도덕한 일들을 자행합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 꼭 하수인을 시켜서 일처리를 해나가는 모습은 자신들이 마치 "끝판왕"쯤 되는 모양인데, 저는 흡사 이 장면 장면들이, 보스와 행동대장이 등장하는 조직영화인가? 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실상 영화가 꼬집고 있는 의미 있는 대사는 "예수가 신이냐, 신이 아니냐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죠?" 라고 묻는, 역사적 사례들입니다. 종교가 가장 입김이 강했던 시대를 두고, 역사는 중세의 "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행동이 멈춰버렸고, 종교가 "갑"질을 신나게 하게 되자, 막판에는 면죄부까지 팔았으니까요. 나중에 종교개혁의 목소리가 일어날 무렵, 루터가 성경을 번역해서 누구나 읽게끔 노력했다는 점은 지금까지도 좋은 통찰을 줍니다. 바꿔말한다면, 소수만이 권력과 정보에 접근하던 시대를 "암흑시대"와 가깝다고 부를 수 있겠지요.

 

 현대사회가 어쩌면 기득권에게 위기일 수 있는 까닭은, 정보의 접근성이 늘어나고 있고, 과거라면 숨길 수 있었던 것 조차도, 이제는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랭던 교수처럼,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두 번째로 참 감미로운 대사는 "인간자체가 성스러운 존재다" 라는 건데요. 흔히 성직자 분들이 쓰는 표현을 빌려오면, "인간은 신의 아이콘" 이기 때문에, 놀라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협박 앞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가진게 적음에도, 그것 조차 타인에게 나누어 주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성스러움에 때로는 감탄이 드는 것입니다. 한상에 둘러앉아서 오손도손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인간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동물을 다룬 다큐를 생각해보면, 맹수들은 각자 앉아 자신 앞의 고기를 먹을 뿐, 함께 모여서 고기파티를 열지 않더라고요. 저는 여전히 절친과 국밥 한 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한편, 고민해 보고 싶은 것은 "죄악의 합리화는 있을 수 없다" 라는 점입니다. 자칭 신의 메신저라는 "사일러스"는 자신이 끔찍한 행위를 저질러 놓고서도 단지 참회하면 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대목이야말로 사실 제일 혐오스러운 생각이 아닐까요. 예컨대 우리가 타인의 마음에 대못을 계속해서 쾅쾅 때려놓고, "미안하다, 반성한다" 라고 참회하면 그만일까요,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타인은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을테고, 상처자국이 흔적으로 계속 남을테니까요. 구약성서에도 표현되었듯이,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 욕망만을 충족하려 할 때, 신이 분노했다고 표현되고 있는거 아닐까 싶습니다. 혹여 나의 표현이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한 인간다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화는 소피가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또 랭던 교수가 긴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장면과 함께 유쾌하게 마무리 됩니다. 물 위를 걷는게 잘 안 된다며 농담을 던지는 소피의 여유로움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고요. 이제 이쯤에서 리뷰를 정리해야 겠네요. 그렇다면, 결국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랭던 교수가 어린 시절 우물에 빠져서 기도했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 이 단순함이야말로 저는 믿음이 보여주는 커다란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힘든 상황에서 헤쳐나가는 것, 이것이 믿음이라는 거지요. 우물에 빠져도 "괜찮아"라는 용기를 얻게 되는 원천, 힘든 현실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원천, 그래서 믿음은 정말로 대단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을 "이용가치"로 바라볼 것인지, "사랑하는 이웃"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따라 세계관이 달라지는게 아닐까요.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 속에 천국과 기쁨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타인에 대해서 존중하고, 이야기에 귀를 열어두고, 아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이웃과 함께 정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랭던 교수가 소피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침내 안심하듯이, 그런 따뜻한 사람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되어줍니다. 그렇게 볼 때, 차갑고 냉소적인 종교인의 끝이 사일러스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종교인의 끝이 랭던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반성적 질문을 던져보며 리뷰를 마칩니다. 참 좋아하는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웃에게 다정함과 친절함을 잃지 않기를... 자기확신에 사로 잡혀서 타인을 괴롭히지 않기를... 권력에 기대어 사람을 가볍게 대하지 말기를... 스스로 조심스레 다독여봅니다. / 2013. 08.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