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2000) 리뷰

시북(허지수) 2013. 8. 30. 16:29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잘 만든 명작이다보니,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사회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지위를 유지하는가로 바라볼 수 있고, 소년이 힘든 환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에 감격할 수 있으며, 또한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절절한 마음에 눈물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독특한(?) 리뷰를 써보고 싶은 저는, 우선 주인공 빌리의 "춤사랑"이라는 테마로 접근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몰입의 즐거움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칙센트미하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즐거움은 지루함과 불안 사이의 경계에서, 즉 행동 능력과 눈앞의 장애물이 서로 균형이 맞을 때 찾아온다." 제가 정말 사랑하는 표현 중에 하나 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몰입상태에 빠져들게 되면, 그 때부터는 시간에 대한 관념이 달라집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완전히 일에 집중하게 되는 거지요. 태어나서 그런 순간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환경의 장벽 조차 흐물흐물 녹아버리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결코 행복에 관한 영화라든지, 해맑은 영화라든지, 즐거운 영화가 아닐테지요. 지독히 현실적이라서, 가난하고 초라해져가는 삶,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 조금 확대 해석한다면 우리의 인생살이, 고단한 삶을 통채로 담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제약은 늘 발목을 붙잡고 길을 가로 막습니다. "넌 부족해서 안 돼, 지금은 형편이 안 돼, 그건 네 할 일이 아니야" 등등... 도대체 내가 하고 싶었던 것,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콰이어트라는 책에선,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그 때 하고 싶었던 것들을 생각해보고, 거기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라고 묘사합니다. 왜 하필 어린 시절일까요? 왜 우리는 빌리처럼 그 시절로 돌아가봐야 할까요? 그 때가 가장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뭣도 모르던 그 시절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이나 과감히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예컨대 제 11살 때의 꿈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였습니다. 한창 컴공과가 인기 있기도 했고요.

 

 저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을까?" 그 때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신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게 아닐까 해석합니다. 해변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그런 나만의 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지요. 저는 프로그래머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내 안의 바람들을 정리해 가면서, 인터넷에서는 블로그나 커뮤니티 공간을 매개체로 여전히 재밌게 지내고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되어보고 싶었던 일들을 고찰해보고, 거기서 주는 느낌들을 "소중하게" 대하라는 것!

 

 영화로 들어가보지요. 꼬마 소년 빌리 엘리어트는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복싱이나 축구에는 열광하지 않습니다. 그는 발레를 배워나가면서, 자신이 행복해지는 순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춤을 추고 있으면, 처음에는 힘들지만, 자신을 잊을 만큼 몰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듯한 황홀감! 나로써 존재한다는 그 기쁨!

 

 어쩌면, 혹자는 빌리가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재능을 발견한다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사실상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가로막는 현실적인 벽들도 하나씩 등장합니다. 가족의 반대, 주변의 시선, 과연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재능에 대한 의문까지, 그래서 때로는 주저 앉아서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라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너무 좋아서, 감격스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아무리 재능 있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얼마든지 지칠 수 있고,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돈다는 좌절감이 들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면 모든 게 만사 OK 라는 식의 주장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문요한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활동 속에서 "가끔씩은" 자신이 온전히 발휘되는 느낌을 받는가?" 에 YES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렇게 가끔씩이라도 자신이 온전히 살아가고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는 정말 멋진 선택을 한 것입니다.

 

 빌리는 처음에 빙그르르 도는 행동도 잘 하지 못하고, 계속 연습에 매달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게 가능하구나!" 라고 깨닫게 됩니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나의 것을 완성해 나가는 순간이야말로, 빌리가 살아간다는 기쁨을 깨닫는 "경이의 순간"이 아닐까요. 마침내 빌리는 엄한 아버지 앞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표현하는 대범함을 보여줍니다. "보세요,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대목은 눈부십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아버지의 희생에 더욱 감동하게 됩니다. 자신이 지켜온 신념을 져버리고,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아들을 위해서 헌신적인 저자세로, 돈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 진한 부성애의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가 진정 명작 소리를 끝없이 듣는 까닭이지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라는 노골적인 질문에, 세상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아들아, 너를 위해서 나는 기쁘게 내 짐을 안고 갈테니, 너도 힘껏 살아보렴." 영화는 상대적으로 연인과의 사랑 보다는, 거의 일관되게 부자간의 정, 사제간의 정, 친구간의 정을 아름답게 그립니다.

 

 이성에 푹 빠지는 낭만적 사랑만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동화 대신에, (이를 테면, 저주에 걸린 공주가 왕자님의 달콤한 키스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동화 대신에)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공주는 저 홀로도 얼마든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다네~ 사실 공주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도 곁에 있다네~ 그리고 공주를 끝없이 아껴주는 아버지가 있다네~ 그래서 그저 삶이 행복하다면, 누군가의 연인이 되어도, 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네! 왜냐고?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법을 이제 실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지!

 

 타인에 대한 비의존, 자유로운 날개짓, 저는 이 점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일반적으로 호의로 여겨지는 "잘 모르는 타인이 먼저 손을 내미는데도" 빌리는 그 거짓되고 가식된 친절에 강펀치를 날려버립니다.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이,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툭툭 내뱉는 말들과 친절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을 따라서 더 적극적으로 삶을 누려가는 것입니까?

 

 빌리 엘리어트 같은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따뜻하게 말해줍니다. 삶이 정말로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계속해서 내가 바라던 삶을 향해서 걸어갈 것을 권합니다. 때로는 거대한 장애물이 길을 막고 있어서, 벽이라도 긁고 싶고, 화장실 구석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하염없이 슬퍼지겠지만, 그래도 계속 행동할 것을 권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두려워하는 빌리에게 말합니다. "돌아올 생각따위 집어치워라, 벌써 네 방은 세입자 구한다고 내놨어!" 빌리의 곁에 조용히 계시던 어머니는 또한 말합니다. "항상 자신에게 충실하거라. 난 언제나 너의 곁에 있으마."

 

 충실하게 산다는게 완벽한 기쁨만이 가득한 동화 같은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충실한 삶은, 때로는 거대한 벽 앞에서도, 막막한 두려움 앞에서도, 춤을 추고, 행동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애시당초 상처 받지 않는 삶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영화에서 아버지는 아껴두었던 예물을 전당포에 맡기고, 피아노까지 부숴가며 힘겨운 나날을 이어갑니다. 이것이 과연 자신의 지난날 사랑을 부정하는 행위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된다고 할지라도, 아들과의 주어진 인생,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인생은 더 적극적으로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충실함이란, 장애물이 있어도 계속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바람을 멈춰세우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자신이 포기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놓고 ㅇㅇ탓이라고 합리화 하고 있는건 아닐까요.

 

 소중한 것을 팔아서라도, 누군가를 응원할 수 있는 삶은, 너무나 빛나는 아름다움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서, 누군가를 지지할 수 있는 삶은, 너무나 빛나는 순간들입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과거를 버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며, 끝까지 희망을 간직하고 전진해 나갈 때, 우리는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나게 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영화가 종종 보여주듯 사람은 불안정하고 참 약합니다. 제 아무리 강한 신념 조차도, 사실은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그저 힘없이 주저 앉게 될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볼품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문득 분노나 슬픔이 차오르기도 합니다.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방황하는 시간이 오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래도 뭐 어떻습니까. 여전히 사람은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오늘의 가능성을 믿고, 더 용기 있게 살아가고, 고통스럽더라도 계속 살아나가는 것! 그래서 영화 마지막은 우리에게 인생의 절정을 멋지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행복한 순간도 있나니!" 우리가 더욱 힘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감하게 충실한 삶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요. / 2013. 08.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