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9월1일/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로새서3: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9. 3. 15:47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9월 1일 주일 예배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골로새서3:5-)

우리는 지난주에 골로새서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설교한 구절의 바로 앞부분을 살펴보려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바울이 밉다고 말씀드렸지요. 우리의 상황은 보지 않고 우리가 무슨 성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해서 도저히 행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주에 바울은 우리에게 성도로서의 삶에서 모두 17가지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 개 한 개가 다 지키기가 극히 어려운 것임도 보았습니다. 이분이 은근히 재미있습니다.
그 짧은 구절에 무려 17가지를 요구했는데 이제 오늘 구절에도 여러 가지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된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오늘도 잔뜩 있습니다.

저도 걱정이 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 참다 참다 “나 성도 안 할래.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고...그러면 무슨 재미로 살아”할까봐서 겁이 납니다. 솔직히 목사인 제가 봐도 이분이 요구하는게 너무 많고 수준이 높아요. 그런데 그 한 개 한 개가 참으로 어려운 것들뿐입니다. 쉬운게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보니까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먼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이 ‘죽이라’는 말은 옛사람의 성품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원문으로는 ‘단호하게 일거에 완전히’ 죽여 없애버리라는 말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줄여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천천히 장기적으로 보고 죽여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번에 단호하게 단칼에 죄성을 죽여 버리라는 말입니다.

가슴이 아프지요. 우리 몸이 워낙 죄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단칼에 죄성을 죽여버리는 일은 매우 아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사람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세상의 죄성을 죽여라

원문의 뉘앙스를 조금 더 살펴보면 우리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무 반응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죄에 대하여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은 죄성에 너무 오래 젖어 있었고 또 죄가운데 출생되었기 때문에 죄성을 생각만해도 너무 좋아서 전율이 일어 납니다. 그러므로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땅에 있는 지체’는 인간의 타락한 죄성을 가리킵니다.
다섯가지 죄성을 말하고 있는데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입니다.
음란이나 정욕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우리의 뇌는 쾌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이러한 죄성에 푹젖어서 마치 마약환자처럼 우리의 몸이 점점 쇠함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지 못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찰나의 쾌락을 위해서 불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우리의 몸을 불사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하기 전에 그만두라는 단호한 명령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가지가 우리의 “땅에 있는 지체”랍니다. 얼마나 우리하고 친했으면.......
그런데 이런 다섯가지의 맨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탐심입니다. 성에 대한 탐심의 발현이 음란과 악한 정욕이며 돈에 대한 탐심이 나타난 것이 부정과 사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욕심이 모든 죄의 뿌리라고 말씀하셨지요.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하나님께서 지기에게 주신 것을 만족할 줄 모르고 남의 것을 탐하는 탐심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됩니다. 일단 탐심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게 되면 하나님대신 그것이 우리의 신이 될 것이며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인데 결국 탐심은 사탄이 인간을 조종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됩니다.

‘빼앗아라, 훔쳐라, 거짓말 해라, 죽여버려’ 바로 이것이 사탄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탐심으로 인한 마음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도덕적 무능력을 자복하는 것을 지난주에 우리는 겸손이라고 한다는걸 배웠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제시한 인간이 버려야 할 옛사람의 품성이 다섯 가지인데 그 중에서 음란은 영어의 ‘포르노’의 어원입니다. 즉 여기서 포르노란 말이 나왔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포르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비정상적 성행위 및 불법적 성관계를 총망라하는 표현입니다.
다음 부정은 정결치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주로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를 말하고 제사,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못함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다음으로 사욕은 신약성경에는 겨우 세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이 광범위하게 사용한 단어로서 정욕의 동의어지만 주로 수동적 측면에서 제어하기 어려운 악한 욕구를 말합니다.
정욕은 사욕과 반대로 성경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능동적 측면에서의 악한 욕구를 가리킵니다.

탐심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과 상관없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 욕구가 끊임없다는게 중요하지요. 이게 충족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의 노예가 되면 비극적 파멸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러한 다섯가지의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없지만 원문 성경에는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말이 나옵니다. 즉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 위에 임하느니라”
즉 바울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다섯가지를 지체없이 죽여야 함에도 죽이지 않고 행하는 이들은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말에 불순종하는 불순종의 아들들이고 즉 사탄의 아들들이며 이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노는 과일즙이 꽉 차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즉 좋지 않은 감정이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목구멍까지 꽉차 올라서 입만 열면 진노의 호통이 나올 것 같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입을 열어 우리를 책망하시기 전에 우리가 이러한 다섯가지 죄악을 지체없이 죽여야 합니다.

사실상 우리 주님은 한없이 용서하고 자비롭고 사랑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에 대한 공분을 가지고 계시고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끝까지 회개치 않을때는 가차없이 분노의 채찍을 휘두르시는 분이십니다.
7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다섯 가지 죄가운데서 살았지만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합니다. “살다”는 말은 그냥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죄악을 지었으며 그러한 행동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는 구별되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니 우리가 이전에 살았던 삶은 죄악의 삶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욕심내며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미워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나아가 모략하고 도둑질하고 심지어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는 아주 난장판에서 이전투구의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죄인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사람이 된 우리는 단호하게 그러한 다섯가지 죄악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버리기가 어려울 줄 알지만 그러나 끊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불순종의 아들들로 여기고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내리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분노가운데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분노가 임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천망회회, 하늘의 그물은 성긴 것 같아도 결코 놓침이 없다는 그 말을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그래요 우리 아버지의 눈동자가 지금도 우리를 살피고 계십니다. 그 눈을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으십시오.
또 시작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엄청나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 다섯가지 죄성을 끊어버리는 것도 어마어마한 일인데 또 요구하는게 있습니다. 이분이 아주 우리를 성자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는지...........

이제까지 바울이 말한 것은 옛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새사람이된 지금은 반드시 끊어버려야하는 성품을 말했는데 이제 그는 버려야 할 행실을 이야기합니다.
앞의 다섯가지 성품은 죽여 버려야 하는 것이고 이제부터 나오는 것은 벗어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벗어 버려야 할까요? 지난주에 우리는 새사람이 입는 옷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옷을 입으려고 하면 헌옷은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새사람을 입기위한 준비단계입니다.

여기서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은 분, 악의, 훼방, 입의 부끄러운 말,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섯가지 성품을 죽여 버리고 다섯가지 행실을 벗어 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총 열가집니다. 이것대로 따라할려니 걱정스럽네요.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이니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성도가 되려고 하면 무려 27가지를 실천해야 합니까?

자 다섯가지 행실을 한가지씩 살펴 봅시다.
먼저 ‘노’는 마음에 품는 불쾌한 감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게 되면 주위 사람들과 감정적인 대립을 가지기 쉽고 밖으로 표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을 심히 상하게 하는 죄입니다. 노를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안으로 삭이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아예 노를 품지 말라는 것이지요. 스트레스의 주범? 하하, 참 어렵지요?

다음은 ‘분’입니다. 분은 ‘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남을 해하려고 하는 독한 마음으로서 모든 죄의 발단이 되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옛날 ‘가인’이 분을 품은 결과 끔찍한 일이 일어났지요?
다음으로는 악의입니다. 악의는 도덕적 의식이 아주 낮음으로 인하여 외부로 표출되는 악습이나 비행을 말합니다.  악의라고 해서 단순히 악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훼방은 남을 헐뜯고 방해하며 치욕을 주는 구체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다음 부끄러운 말은 천하고 상스러운 말로서 남에게 정면에서 치욕을 주어 인격에 손상을 가하는 입술의 범죄를 말합니다. 그런데요 정의감에서 사람의 면전에다 대고 욕을 해도 할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일단 좋은 단어를 사용하고 인간관계 자체를 파괴할 말은 피해야 합니다. 그 말을 사용하면 되돌아 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지켜야 할 선을 지키자!

거짓말은 악의 기원이 되는 것으로 속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짓말 하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속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악함을 알고도 스스로 합리화를 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가 표출되어 남을 속이고 이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거짓말이 신성모독의 범죄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세요. 그 결국은.......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탐심이 마음의 상태를 병들게 한다면 거짓말은 우리의 행실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행실에서 벗어 버려야 할 다섯가지를 말하면서 내적인 감정에서부터 점점 행동이 표출되어 남에게 영향을 크게 끼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노나 분을 품게 되면 악의를 가지고 다른 이를 훼방하기위해 여러 가지 궁리를 하게 되고 그 결과 구체적으로 자신이 입은 모욕을 갚기위해 입의 부끄러운 말이나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사람들은 뒷감당을 생각지 않고 그냥 말을 막하고 행동도 막합니다. 나중을 생각지 않는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이와같이 기독교인의 삶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행실을 바로잡기 이전에 먼저 우리의 내적 성품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바로 잡을 수 없다면 아예 생각도 나지 않게 죽여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무려 열가지입니다. 진짜 어렵습니다. 한가지 한가지가 엄청나게 크고 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힘써 지켜보십시다.
이렇게 열가지를 죽이고 벗어 버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함을 입었는데 그 새로움이 지식에게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악 속에서 살던 우리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죄악의 행위들을 벗어 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해질 수 있습니다.
성도라고 불려질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심지어 우리의 금쪽같은 물질을 바친다고 해서 우리가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섯가지의 품성과 다섯가지의 행실을 당장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이 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준비가 완료되는 것이지요. 이런 바탕위에 지난주의 17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헌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 사탄의 백성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네요.

그러한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날로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9절의 ‘벗어버리라’는 말은 8절의 ‘벗어버리라’는 말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무장해제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죄된 인간본성과 행위로 부터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새사람이 되었다면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한다는 말이 됩니다. 옛사람으로는 죄악된 연륜이 아무리 높던지 간에 그는 이제부터 순수한 하나님의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차 영적 갓난아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된 우리는 어디까지 새롭게 되어야 합니까?
다른말로 우리의 새로운 목표는 어디까지지요?
10절에 있습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
그래요, 우리가 지식에까지 새로워져서 하나님과 더불어 완전한 교제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죄를 끊어버리고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며 죄악에 대해서는 돌격해서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선성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 놓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죄의 벽이 허물어 져야만 우리와 하나님과 다시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와 이번 주에 모두 열가지의 버려야 할 것과 17가지의 행해야 할 것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너무 많고 너무 어렵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이것 다 지키면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성자가 되던지 아니면 (진정한 성자는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야만 가능하므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결코 나를 그냥 이대로 두지 아니하시고 높이 드실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되기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한번 행해 봅시다. 아니 좋습니다.
완벽히 행하라는 말은 아니고 그냥 열심히 노력해 봅시다. 그리고 죄악된 품성은 단호하게 끊어버립시다.

우리의 죄된 본성이 죄악의 향기를 그리워해서 단호하게 일거에 끊어버리는 것을 꺼리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단호하게 한번 끊어보십시오.
참고로 중독이 되면 그걸 생각만해도 뇌에서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중독에 관해서 연구를 좀 했는데요 어떻게 하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설교하려고 생각합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면 그 반대의 경우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겠지요.
그런가 아닌가 한번 보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옛사람의 품성을 끊어버리고 죄악된 행실의 옷을 벗어버리는 그래서 새로운 품성으로 옷입고 새롭게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 마지막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는 결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9월 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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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심리학적인 접근을 해보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면, 나중에는 아예 습관화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습관은 미래를 예측가능하게 만들며, 저절로 인간을 움직이게 만들지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금요일 저녁과 다가오는 주말을 사랑하며, 일요일 저녁이 되면 허무감을 경험하는지도 모릅니다. 물들어 있는 습관을 버리기란 어렵습니다. 이것은 월요일 아침을 사랑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대단히 힘겨운 요구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멀리하고, 싫어하는 것을 사랑하라니...

그런데 간혹 사소한 일을 계기로, 점점 달라져가는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커다란 충격이 와야만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며,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저는 항상 궁금했습니다. 사람은 정말로 잘 변하지 않는데, 어째서 이들은 그렇게 힘든 순간을 견디며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가?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그 밑바탕에 "믿음"이 깔려 있는 경우가, 굉장한 힘을 준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나는 반드시 변할 수 있어" 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삶이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부상을 당했을 때의 회복속도까지 빨라졌습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 지금의 내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 그래서 고통스럽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행동을 바로 잡아나갑니다.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요? "나는 어차피 안 돼", "해봐야 거기서 거기지", 이렇게 믿음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사람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변화의 기회가 다가와도 전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조금 가혹하게 말한다면, 이렇게 사는 인생이란, 지난 날의 낡은 습관에 기대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단지 숨만 쉬고 있는 안타까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피곤한 선택이 되겠지만, 매일 의지력을 발휘해서, 변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어제의 나와는 달라져 있는 현재의 내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왜 먼저 옷을 벗을 것을 강조할까요. 어제의 옷을 벗어야만, 새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들고 있는 컵 안의 내용물을 비워내야, 새로운 물을 담을 수 있으니까요. 물론, 익숙하던 게 편하고 맛있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냥 즐기며 살면 되지, 왜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매일 현실에 안주한채, 몇 달, 몇 년을 살아가다보면, 정작 기억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그런 인생은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 끝에는 결국 덧없음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인생을 더 풍요롭게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더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아인슈타인의 이 말을 늘 기억합니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 기적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반성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이 기적 같이 즐거운 순간이고, 새로워질 수 있는 순간임을 매일 망각하면서, 미친듯이 습관에 의지하면서 뻔하게만 살아가려고 합니다. 당장 그 얼어붙은 마음에 도끼를 들고 내리 찍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조금 과격한가요. 하하 :) 괜한 잡설은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변화하세요. 달라지세요. 당신은 가능성의 존재이며, 오늘이 바로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 2013.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