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병인양요, 신미양요, 척화비 이야기

시북(허지수) 2013. 10. 21. 00:16

 지난 문서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자, 이제 프랑스가 병인박해 소식을 듣고, 바로 그 해 (1866년) 배를 끌고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병인양요의 발발입니다. 여담으로 여름 경, 첫 번째로 프랑스가 한 번 정탐하러 들어왔을 때는, 기록에 의하면, 조선 사람들이 부채도 선물하고, 먹고 잡수시라고 황소도 선물하는 등 참 잘해주었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에요. 지난 번 살펴본 제너럴셔먼호만 해도 미국인들이 생떼를 부리다가, 불탔다는 거지요. 뭐, 말하자면, 가는 말이 험하면, 오는 말도 반가운 말이 오지 않아요! 당연하지요. 나라의 역사나 개인의 역사나, 쓸데없이 괴롭히면, 반드시 되돌려 받는게 아닐까 싶어요.

 

 여하튼 프랑스는, 10월경 대규모의 군대를 끌고와서 직접 침략에 나섭니다. 병인양요 - 강화도에서 전개되는 프랑스와의 싸움!!! 사실은 전력상 싸움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배가 가진 대포의 사정거리가 조준한 상태로 무려 700미터가 나갑니다. 순식간에 슝하고 날아와 쿠콰쾅 하고 엄청나게 터지고요. 당시 조선의 포는 겨우 300미터 날아가는 정도에요. 게다가 포탄이 그냥 육중한 게 그대로 날아가 박히는 개념이지, 폭발하는 개념과는 조금 달랐고요. 이러니까 멀리서 쏴대는 프랑스와 싸워서 승산이 거의 없습니다. 옛날 유행하던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장거리 공격을 활용해 언덕 위에서 치사하고 아프게 슝슝 쏘고 있는 느낌? (죄송합니다. 저는 이 게임 할 줄 모릅니다... -_-; 예전에 TV에서 언뜻 보니, 그런 식의 전략이 있더라고요; 아 요즘 아이들은 롤인가를 하지, 스타를 하진 않겠군요. 시대감각이 떨어져서 죄송합니다. 하하.)

 

 자, 어쨌든 프랑스와의 싸움은 전력상으로는 정말 힘겹습니다. 강화도가 초토화가 되어갑니다, 해전이 이럴진대, 육지전도 기술력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프랑스 총은 500보 거리까지 슝 날아갑니다. 조선 총은 화승총이라서, 100보 밖에 날아가지 않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얼마 안 가 강화도는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나, 열악한 무기 속에서도 끝까지 항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대표적으로 양헌수가 정족산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정면승부가 안 된다면, 매복 게릴라전은 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한, 한성근은 문수산성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요. 프랑스도 급기야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고, 집요한 저항이 펼쳐지자, 철수를 결정하게 됩니다. 한편, 병인양요에서 중요한게 있는데, 강화도의 외규장각이 있었단 말이에요. 좋은 서적들도 많았고요. 그걸 그냥 통채로 들고가거나, 불태워 버리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외규장각도서가 약탈 당하기도 했고요. 여기까지, 병인양요의 개념들을 키워드로 살짝 정리해 봅시다. 프랑스, 강화도, 양헌수, 한성근, 외규장각도서 약탈! 그 발발되는 명분적 계기는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라는 것까지 체크 되었나요?

 

 이제 다른 이야기로, 두 해가 지났습니다. 1868년에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있었어요. 남연군묘가 도굴 당할 뻔 했습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입니다. 덧붙여 오페르트 "독일" 사람 입니다. 아! 각 나라를 잘 연결해서 이해해두는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근대사가 진행되면, 사건들이 나라와 연결되어서 흘러가는 경향이 있어서요. 예를 들면 프랑스? 하면 병인양요부터 떠오른다면, 정말 탁월하신 겁니다. 아 방금 했으니까 당연히 기억해야겠지만요 :)

 

 자, 여하튼, 충남 예산에서 오페르트 일당이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합니다! 자, 남연군이 누구였나요? 당시 막강한 개혁을 밀어붙인 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에요. 그런 중요한 인물의 묘를 후다닥 파헤치고 들고 먹튀하려다가... 아휴. 이건 뭐 야만이고, 진짜 진상짓입니다. 충남 예산 사람들이 한밤중에 삽질 소리에 놀라서 가보니까, 이런 막장 집단이 대원군 아버지 묘를 파헤치고 있는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XXX!!!! 라면서 짱돌을 집어던지면서 거세게 몰아붙였고, 그나마 다행히도 이 도굴 사건은 실패로 끝납니다. 대원군 입장에서도 참 황당하고 열받는 일이었겠지요. 안 그래도 통상수교거부가 대원군 외교노선의 기본인데, 더욱 강력한 수교거부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한편, 같은 해인 1868년에는 일본이 쓰윽 찾아옵니다. 메이지유신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니까, 이를 좀 알리기도 할겸, 우리랑 수교해요~ 라면서 찾아왔습니다. 확 달라진 일본은 새로운 외교문서 "서계(국서)"를 들고 왔는데, 관직 호칭도 예전과 달라져있고, 중국만 쓰던 황조, 황상 같은 말도 들어가 있고, 따라서 대원군 정부가 수교를 거절해 버립니다. 할 수 없이 일본 사람들은 부산에서 죽치며 무려 3년을 기다리게 되고요. 일본과는 끝끝내 수교가 거부되는데, 결국 일본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아니 왜 새로운 일본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지 부글부글 열받게 되고, 한국을 이참에 치자는 정한론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일본은 이후 조선과의 국교를 단절해 버립니다. 이른바 이 서계 (국서) 거부 사건은 이후에 시간이 흘러 강화도 조약 등을 다룰 때 또 등장할테니, 일단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만 염두해 두면 되겠습니다.

 

 이제 본격 신미양요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제너럴샤먼호 불탄 사건 이후, 약 5년이 흘렀고, 1871년 미국이 공격해 들어옵니다. 미국과의 싸움도 역시 강화도에서 벌어졌고요. 당연히 이번에도 화력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 군사 기술력이 정말 무지막지 합니다. 다만 조선 사람들도 열심히 싸웠습니다. 어재연은 광성보 전투에서 격렬하게 맞섭니다. 조선 사람들 수백명씩 참 많이 죽었고, 미국 사람들은 몇 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번에도 약탈이 빠지면 곤란했던지, 거대한 장수 수(帥) 글자 깃발을 가져가 버립니다. 미 해군사관학교에 이 깃발이 전시되어있다가 지금은 반환되었습니다. (덧붙여,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도서도 임대형식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요)

 

 강화도에 가보면, 무명용사의 묘가 많이 있습니다. 어재연 장군 등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비록 무기는 열세였지만, 우리 땅을 지키려는 마음은 참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끈질기게 저항한 끝에, 미국 역시도 철수합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미국이 우방국가로 인식되지만, 첫 만남은 배가 불타고, 신미양요 같은 큰 싸움도 했었다는거. 첫 만남은 우호적인게 결코 아니었다는 것. 참 신기하지요. 외교라는게 영원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 그 때 달라질 수 있다는게 외교의 측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미양요를 거치며 미국은 물러났습니다. 두 번의 양요를 거치면서, 대원군은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생각해 봅시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중국의 문을 열게 만들었고, 미국은 일본의 문을 열게 만들었는데, 조선은 지금 프랑스도 미국도 결과적으로 물러가게 만들었습니다. 대원군은 이 사건을 많은 사람에게 좀 알려야 겠다 싶었습니다. 비석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척화비 입니다! 척화비 내용은 "외국 세력들이 우리와 통상을 요구했을 때,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건 매국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라고 멋있게(!) 써서, 척화비를 세우는 겁니다. (한편, 헷갈리는 내용이 하나 있으니 시험을 대비해 체크해둡시다. 척화비에는 신미양요 뿐만 아니라 앞서 있었던 병인양요에 관한 것도 함께 언급되어 있습니다. 외국과 싸워야 한다! 대원군의 수교거부 노선이 확 와닿는군요!)

 

 자, 여기까지 대원군 집권기에는 이와 같은 일들이 있었고, 척화비까지 세웠다는 것.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대외노선으로 밀고 갔다는 것을 정리해두면 되겠습니다. 특히,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시험에 잘 나오니까 꼭 체크하고 명확히 파악해 두세요~ >.<

 

 여기서부터는 결과적으로 평가되는 대목이긴 합니다만... 과연 흥선대원군이 수교거부로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이후 일본에 의해서 문이 열리는게 아니라, 아마도 프랑스 혹은 미국에 의해서 문이 열리게 되었겠지요. 그러면 조금 다른 역사 전개가 펼쳐졌을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수교거부정책으로 인해, 근대화 속도 면에서는 확실히 조금 늦춰진 감이 있으니까요. 이 점이 주로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자주 전개되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다른 쪽 관점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주적이고 강력한 수교거부로 인해, 주변국가들이 조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가령 일본의 경우도 조선과의 수교가 잘 되지 못하자, 다른 대안을 추구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조선을 치자는 정한론이 슬슬 등장하기도 하고요. 주변에서 볼 때, 조선이 좀처럼 만만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렇게 볼 때, 조선의 비극은 그 기개만큼의 실력이 후에 따라가지 못했던 점이 아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하튼, 1963년부터 펼쳐지는 대원군의 10년 치세는 여기까지 였습니다. 이후의 전개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민씨 정권과 개항의 모습. 참 중요합니다! 내용이 길어질테니, 그 이야기는 다음 문서에서 계속됩니다~ 아래부터는 잡문이니, 패스하셔도 좋습니다 ^-^)/

 

 오늘의 영감 - 서양사학과의 주경철 교수님은 1820년 이후, 세계의 패권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을 소개합니다. 가령 1820년 당시 선진국이라면, 지금도 대부분 선진국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소수의 예외적 나라가 있습니다. 그 대표주자가 한국과 일본입니다. 일본이 비교적 빨리 선진국에 진입했고, 한국도 이제 IMF 등의 국제기준으로 선진국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서양문물을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그토록 잘 받아들였던 일본의 비결이 무엇일까 꽤 고민해 봤습니다. 일본 역시도 처음엔 문 닫는 쇄국을 추진했었고, 또한 가난한 동아시아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한홍구 교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의 양반이나, 중국의 신사에 비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다" 라고 합니다. 많은 것을 바꿨을 때, 그만큼 부담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은 번역이나 사전 만드는 능력이 엄청나서, 좀 더 잘 받아들이는 문화도 있고요. 우스갯소리로 전반적으로 한국사람이 일본사람보다 영어를 훨씬 잘하더라도, 볼 수 있는 콘텐츠는 일본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일본은 자국어로 번역된 자료가 방대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제법 속상했습니다. 일본은 더 가난해서, 더 과감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번역함으로서, 정보를 널리 알리려고 하는 그 집착으로 인해, 결국 근대화의 승부가 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일본은 문맹도 상당히 높았으나, 엄청나게 교육에 쏟아부으며 급격히 문맹률을 떨어뜨립니다. 그렇게 급성장하며, 세계를 전쟁으로 밀어붙일만큼, 강력한 나라가 되어갔지요. 가끔은 다 바꾸려는 전략이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급성장한 대표주자가 되었습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가끔 우려가 됩니다. 이제 우리가 너무 가진게 많아서, 변화를 거부하고, 적당한 현실에 안주한다면, 소수를 밀어주는 구조를 방치한다면, 약자를 계속 밟고 간다면, 훗날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국민소득이 2만불이 넘어가면, 그 뒤로는 얼마를 버느냐 보다는, 삶의 질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행복이 좌우된다고 합니다. 선진국이야, 누구나 2천만원은 노력하면 벌 수 있는 천국이라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휴식과 인간적인 예우가 갖춰지는가가 어쩌면 삶의 질의 관점에서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특권을 즐기기에 바쁜가, 특권을 타파하려고 고민하는가, 그 관점의 차이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번 강조했지만 부패와 거리가 먼 나라일수록 국가경쟁력이 높습니다. 오늘날 국가기관이 동원되어 부패한 행위를 자행하고서 나몰라라 하고 있다면, 내년에는 아예 국가경쟁력이 30위권 밑으로 추락하는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가진 게 많고, 부패하다면, 발전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싶네요.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