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0월20일/수년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하박국3: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0. 22. 16:14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0월 20일 주일 예배

수년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하박국3:2-)

오늘 우리는 그동안 보아왔던 바울서신을 조금 뒤로하고 구약의 하박국 선지서를 살펴봅니다.
유대의 말기는 절망과 부패 그리고 멸망으로 이어지는 참혹한 시기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선지자에게는 의인이 악인에게 고난을 받는 하나님의 공의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국내적으로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가난한자와 약한자들을 학대하며 수탈하고 대외적으로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 오지 않고 악을 자행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지요.

악의 축이랄 수 있는 바벨론 때문에 적어도 의로운 국가처럼 보이는 유대, 하나님이 선택한 국가가 고난을 받는 것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순같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질문합니다. 그냥 질문한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에게 지금 불만을 말하며 항의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됩니까? 어찌 우리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 유대가 악해도 그래 바벨론보다는 그래도 의롭지 않습니까? 이렇게 항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이런 일은 오늘날 더 빈번합니다. 요즘은 어떤 국가가 절대 악이니 절대 선이니 하고 나누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사람의 경우에 내가 그래도 저사람보다는 의로운 것 같은데 저 사람은 점점 잘되고 나는 점점 안되는 이런 현실은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의 공의를 주관한다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죄를 용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믿는 나의 적은 죄를 벌하기위해 예수믿지 않는 큰 죄인을 사용하신다는 게 도저히 말이 안됩니다. 이게 뭡니까? 하나님.

이런 식이면 차라리 내가 예수 안 믿고 말지, 이게 정말..........
우리는 눈에 드러나는 이런 모순에 할 말을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그분의 존재자체를 회의하게 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럴 수가 없어...........

바로 하박국 일장과 이장은 그러한 하박국의 질문과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어집니다. 기회가 있으면 차차 보기로 하고 오늘 3장의 내용은 조금 다른 내용입니다. 과거지향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니 없니 하는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실 것 인가하는 미래지향적인 메시지입니다. 과연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해 주실 것인가?
본문은 일절의 말처럼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그는 기도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바로 시작되는 본문은 의미심장합니다. 게다가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도대체 하박국이 들은 소문은 뭘까요? 무슨 소문을 들었는데 하박국이 듣고 놀랐습니까? 뭔가 굉장히 심오한 뜻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조금 허탈한 것이 이 ‘소문’이란 말은 잘못 번역된 말입니다. 원문을 다시 제대로 번역하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놀랐나이다”이런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왜 의인이 악인에게 고통을 받는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 즉 유대를 괴롭히는 바벨론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 내가 바벨론을 이용하여 나를 떠나고 부패한 유다를 징치하고 곧이어 의인을 핍박하고 나를 믿지 않는 바벨론도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걸 우리 성경은 ‘소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조금 더 엄격하게 말하면 “당신이 말씀하신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백성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뭐가요? 바로 앞서의 대답. ‘바벨론이 지금은 잘나가고 그들이 유다를 멸하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나의 택한 자 라고 해도 나를 떠나고 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내가 이방세력을 가지고 그를 징치할 것이고 나의 징치의 수단으로 사용된 이방인도 바로 그 죄를 더해서 내가 더 크게 징치할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우리의 눈에 악인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 결국 하나님이 그들에게 더 큰 벌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놀랐나이다”는 말도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말은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주를) 경외하나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놀랐다는 말보다 더 심오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그 은혜로운 성품, 그에 입각한 하나님의 행사로 말미암은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로서의 경외의 감정을 말하기 때문에 단순히 놀랐다고 말한다면 이는 본문의 뜻을 축소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소원을 아뢰기 전에 나의 간구를 올리기 전에 나는 먼저 주의 놀라운 말씀에 순복하며 그를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의 능력은 무한하시고 그가 손을 펴시면 아무도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절대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을 경외하는 선지자가 하는 기도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제 하박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흥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우리 목사님들이 많이 사용하지요. 그런데 목사들이 좋아하는 그런 부흥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흥은 ‘살다, 생명을 보존시키다’는 말입니다.
지금 거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을 살려내어 생명력을 넘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늘어나도록 해 달라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교회의 성도들 개개인의 신앙상태가 만일 유명무실하다면 이런 이들이 다시 힘을 얻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힘찬 신앙생활을 하게 해 달라는 의미라면 맞는 말이 되겠지요.
그런데 무엇을 부흥하게 해 달라고 지금 빌고 있습니까? 교회? 나라? 우리 집안? 아닙니다. 그가 부흥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은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이 뭔데요? 바로 ‘심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하실 심판을 말합니다. 하박국은 바벨론만을 심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죄로 오염된 선민을 먼저 일차적으로 심판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바벨론을 심판해 달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유다를 빨리 심판해서 멸망케 하시고 다음으로 유다를 괴롭힌 바벨론도 멸망시켜 주십시오?

이거 어째 성경본문의 내용이 우리가 생각 했던 것 하고는 점점 달라집니다.
글쎄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 먼저 교회 안에 있는 가짜 예수쟁이를 먼저 심판하시고 다음에 불신자들을 멸하십시오? 아니 가짜가 아니라 한때 나태한, 조금 실수한, 일시적으로 외도한 예수쟁이를 심판하십시오?
하나님 먼저 우리나라를 멸하시고 다음에 우리를 괴롭히는 나라를 멸하십시오?
이거 뭔가 말이 안되는데요................

하박국이 이렇게 간구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설령 그것이 선민들에게 일시적으로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대적 바벨론의 파멸이란 결과를 가져오며 선민이 반드시 견지해야 할 의를 회복하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는 이는 선민에게 구원과 승리를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또한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통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해 봅시다. 만일 공의의 하나님이라면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들을 만한 진짜 죄를 짓는 성도를 하나님이 단지 자기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눈감아 주고 이방인의 죄는 즉각 즉각 벌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오히려 잘못된 성도가 심판을 받고 죄를 회개하고 올바로 살아서 제대로 된 성도가 된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이 된다는 것이지요.
단지 우리가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바르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우리가 다시 돌아오면 우리를 더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결코 피할 수 없으면 그들을 향하여 일단 징계의 채찍을 든다면 용서고 뭐고 없이 멸망에 처하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의 자녀됨을 든든해 하는 것입니다.
결코 아무리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결코 유명무실하게 하지 마시고 반드시 이루어 주십시오.
어때요?
우리가 그렇게나 부흥회 문구로 사용하던 하박국의 이 그럴듯한 말은 실제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기도를 들어주시면 하나님의 채찍에 신음하게 될 교회가 많아 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심판을 면하기위해 그냥 넘어가요? 안됩니다. 그러니까 채찍에 맞기 전에 빨리 회개하고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 공의의 법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시 예수쟁이가 참 착하구나! 이렇게 되어야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자기 신도만 사랑하는 것은 악마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되어도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 자체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공의의 하나님에게 그러한 이기적이며 편파적인 사랑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을 그냥 해석해서 ‘이 수년 내에 유다하고 바벨론이 빨리 멸망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박국이 기도한 건 아닙니다.

단지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지금 당신의 백성, 의인들이 너무 너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공의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심판이 여전히 유효하며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의 법대로 약자를 보호하며 억울한 이를 없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동시에 사람을 사랑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수년내에 라는 말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짧은 시간이 되게 해 달라는 말도 됩니다. 공의의 심판이 오면 지금 당하는 고난이 빨리 끝날거니까 빨리 심판이 일어나게 해 달라는 말이되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유대를 미워해서 이렇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는 유다를 온전히 회복시켜서 모든 이들이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고 국외적으로는 바벨론이라는 자기들의 대적이 멸망하고....

그렇게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수년내에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교회 교인들이 많아지게 해 달라는 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놓고는 그래도 혹시 심판받는 이들이 힘들까봐 이렇게 기도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사실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위해 악을 심판하신다면 그 와중에 의인들이 불가피하게 고통을 받을 수 있음을 하박국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짧은 순간이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가령 IMF가 왔을 때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몰렸는데 이 와중에 의인들이라고 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 사회나 나라에 내린다면 그 안에 속한 의인들에게도 당연히 그 여파가 미치게 됩니다.

사실 이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그 와중에라도 하나님의 자녀에게 긍휼을 잊지 말고 베풀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채찍을 휘둘러 버리면 우리 인생은 누구 누구 할 것 없이 그냥 그 채찍에 휩쓸려서 악인과 함께 멸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라도 천사를 보내어서 롯과 그 가족을 구해 내셨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후의 순간에라도 결코 긍휼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걸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안 주셔야 우리가 시련의 터널을 통과하는 원동력이 되고 소망을 잃지 않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소망의 싹을 꺾어 버리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3절부터는 내용이 바뀝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영광과 위엄을 묘사하며 찬양하는데요 한가지 여기서 쓰여진 하나님은 보통처럼 ‘엘로힘’이 아니라 특이하게 ‘엘로아흐라고 표현 되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 엄위하신 분.

여기서 하나님은 ‘데만’에서부터 오시는데요 ‘데만’은 에서의 장자로 소개되는 ‘엘리바스’의 아들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그 뜻은 ‘남쪽’입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는 시내산을 말합니다.
시내산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곳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한 장소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데만에서 오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대로 불의를 저지르고 불순종하는 선민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심판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따라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고 지켜주심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자가 바란산으로부터 온다고 하는데 여기 바란산도 시내산과 가데스바네아 사이에 있는 산으로 하나님과 선민과의 언약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말 성경에는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라고 해서 ‘오시며... 오시는도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오신다는 말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말에서는 어법에 맟추려고 두 번이 쓰인것처럼 번역했지만 원래는 한번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온다는 말은 여기서 오고 계신다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데만에서부터 오고 계시고 바란산에서부터 오고 계시고
이말은 그가 심판과 선민의 보호를 위하여 오고 계시는 중이라는, 뭔가 때가 임박했고 그의 역사가 비록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루어 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온게 아니기 때문에 장래의 사실을 말하기는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느낌을 주기위해 현재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한번 약속하시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약속은 비록 일시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결코 유명무실하지않고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며 그가 사실은 그의 때를 위하여 지금 오고 계시듯이 우리의 눈밖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좌절하거나 그가 없다고 부정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의 약속을 믿고 그의 심판을 대비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우리의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 가면 됩니다.

사실 본문의 이 표현은 하박국 선지자가 출애굽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 그리고 하나님과 선민간의 언약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선민을 심판하고 바벨론을 심판할 일이 제2의 출애굽과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서 이제 하나님의 자유민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자로 오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경외를 받으실 엄위하신 분인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우리를 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악을 멸하고 선을 권장하며 그의 약속을 지킴으로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굳고 단단한지를 가르침으로 오는 세세토록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를 찬송케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지금의 혼란하며 음탕한 그리고 이기적이며 패악한 세대애서 제대로된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죄악이 워낙 관영했기 때문에 한두 사람 의인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답시고 그 악에 맞서려 해보아도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그 한두 사람의 의인을 보호한다고 전체 악한 사회를 이대로 둔다면 하나님의 법은 땅에 떨어지고 결코 하나님의 법과 공의가 바로 서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자꾸 늦추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앞당겨서 지금의 이 부조리한 현실을 깨고 하나님의 공의가 우뚝 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와중에 거센 세파에 휩쓸려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인 승리를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날개아래 우리를 품어서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 주실 것임도 믿습니다.

세상이 어려워진 것은 세상의 잘못도 있지만 하나님의 법을 적극적으로 지키고 세상의 악과 맞서려 하지 않은 우리 성도들의 잘못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 풍조에 휩쓸려서 개인적인 복락만을 구하며 세상의 구원에 눈감고 불의가 자행되는 것에 눈감는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지옥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만들어야 할 것은 세상의 이기와 욕심과 투쟁과 미움이 판치는 그런 세상, 인간이 만든 지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온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을 잊어버리고 나의 복락과 구원만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만이라도 깨어서 제2의 출애굽이 될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가 빨리 이루어 지기를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우뚝서고 새로운 나라가 되며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일을 위하여 우리 주님은 지금 이곳으로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지금 언약을 이행하시기 위해 인간세상으로 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세상에 휩쓸려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세상에 대한 연민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꿋꿋이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 원망과 불평, 증오와 억울함에 대한 하소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뒤덮고 하나님에 대한 찬송소리로 이 세상이 뒤덮이도록 만듭시다.
그러한 일을 하는데 내가, 우리가, 우리 교회가 앞장선다면 그 나머지를 우리 주께서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0월 20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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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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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최근 보았던 글귀 중에는, 링컨의 연설문 일부가 생각납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껍니다. 라는 유명한 연설이지요. 이걸 다른 말로는 민주주의라고도 합니다. 국민이 주인인 세상이니까요. 오늘날 주인자리에는 다양한 것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힘 있는 권력이 주인노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살 수 있을 법한 자본이 주인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꿔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위한 정부, 자본을 위한 정부는, 과연 영원할 수 있을까요? 영원하다는 착각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요.

하박국 선지자가 외치던 부흥이라는 것이, 양적 팽창이 아니었다는 건 개인적으로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것, 정의로운 세상을 그토록 열망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굳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잘못한 일들에 대해서 벌하고, 잘한 일들에 대해서 고무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가끔 이와 반대로 가는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른 바 불의라는 것은, 위의 말을 뒤집어 놓으면 됩니다. 잘못한 일들에 대해서 그냥 괜찮다며 합리화 시키고, 잘한 일들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면 됩니다.

대체, 그런 세상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약자부터 가혹하게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잘못을 해도 성공만 하면 만사OK 라는 막돼먹은 일들이 팽배할 것입니다. 힘있는 자들이 그 힘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국민이 죽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고, 적당히 흉내만 내주면 됩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밑에서 시달리던 국민들 조차도 나도 손에 더러움을 묻혀야지 하면서, 삶의 소중한 가치를 훼손하기 시작합니다. 나 하나 잘 살기 위해 서서히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한 나라가 부패에 잠기게 되면, 그것을 쉽사리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지난 날 많은 학자들의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비록, 진실이 하나 둘 매장되기 시작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쓰러져가는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품격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세상에서도 양심껏 살아가려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결국 주께서 지키실 것입니다. 사람은 무소불위의 자리에 그토록 앉고 싶어해도, 정작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는게, 아이러니한 역사의 교훈이 아닌가 싶네요. / 2013.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