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개화파 vs 위정척사파의 분위기 파악하기

시북(허지수) 2013. 10. 28. 17:08

 서론은 소박한 멘트로 엽니다. 인간의 삶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비교가 아닐까 합니다. 비교하는 순간 "다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비교우위나 열등감으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불행을 자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괜히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그냥 묵묵히 길을 가세요! 어제의 나보다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면 충분한 거니까요!

 

 일단 간단 복습부터 살짝 해볼까요. 10년 동안 정권을 잡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불평등 조약이었고, 그 대표적인게 치외법권과 해양측량권 문제가 들어가 있었다. 기억나지요! 오늘 문서는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자, 이제 이 강화도 조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당연히 당시에도 이 사태를 좋게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 (=위정척사파) 이 있었으니까요.

 

 우선 개화파들이 있었는데요. 강화도 조약 체결했으니까 문을 열고, 변화하자고 주장합니다. 위정척사파는 완전 반대입니다. 문을 닫자, 큰일난다며, 강하게 정부 정책을 반대하고 나섭니다. 헷갈리지 않도록, 친절하게 다시 풀어쓰면, 개화파는 문을 열자는 거고요. 위정척사는 싫거든, 됐거든, 문닫어! 입니다. 위정척사라는 말은, 성리학을 지키고, 사악한 무리(서양)를 배척하자 는 의미입니다. 이제 자세히 꼼꼼하게 들어가봅니다. 재밌어요!

 

 개화파는 기본적으로 정부정책에 찬성이지만, 얼마만큼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생각들이 조금 달랐습니다. 당장 중국(양무운동)과 일본(메이지유신)만 해도 개화에 관한 입장이 달랐던 것처럼요. 온건개화파에는 김홍집 같은 인물 이 있었고, 청나라에 의지하는 친청 경향이 있었습니다. 온건개화파는 "동도서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동쪽의 도는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중국의 양무운동이 말하던 "중체서용"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고요. 개화의 속도도, 개화 OK :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고 다소 천천히 가자 는 겁니다.

 

 급진개화파는 김옥균 같은 인물 이 있는데, 친일적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나라를 팔아먹는 못난 친일파 같은 개념과는 조금 다른 성격입니다. 급진개화파의 친일노선은 일본을 모델로 해서, 빨리 개화를 서두르자는 의미 입니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개화를 위해,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요. 급진은 급해요, 급해! 문명개화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정치도 바꾸고, 법률도 바꾸고, 종교도 수용하고, 의식 자체를 전환하자고 주장합니다. 서양의 정신까지도 본받자는 급진적인 방법인데요.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유사한 맥락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개화파가 온건과 급진으로 나뉘었던 것은 아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개화 노선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뒤에 배울) 임오군란 이후에 확연하게 주장이 나눠지기 시작했지요. 한편 처음 언급했듯이 개화파는 민씨세력과 함께 개화를 추진해 나갑니다. 그리고 이 점이 흥미로운데, 아무래도 민씨 정권 입장에서는 온건 개화파를 더 좋아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입장에서, 급진개화파처럼 갑자기 확 바뀐다는게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고요. 다시 말해, 민씨 세력과 온건 개화파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정도를 염두하고 보시면 앞으로 이해가 편합니다.

 

 그럼 이제 "안 돼"를 외치던, 위정척사파 도 살펴봅시다. 시기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60년대 하면, 대원군 집권시기와 겹치는데요. 이 때의 위정척사는 "통상수교거부(통상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항로, 기정진 같은 인물이 있고, 유생들이 대원군의 외교노선을 지지했고요. 그런데 의문이 살짝 들 수 있습니다. 사실 대원군은 대내적으로는 서원철폐 등의 개혁을 밀어붙이며, 유생들이나 양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유생들 입장에서는, 당시 개혁안은 열받지만 조금 받아들이더라도, 외국세력이 들어와서 정신적 기반 (성리학) 을 흔들어 대는건, 절대로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예 서양이 떠드는 행위를 없애버리라고 강하게 반발했고, 또한 병인박해로 이어지기도 하잖아요. 그러므로 전통 유생들은 주로 위정척사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70년대는 이미 1876년에 강화도 조약으로 문이 열리잖아요. 그러니까 이 때의 위정척사는, 개항반대를 외칩니다. 최익현을 들 수 있는데요. 얼마나 결사적인가 하면,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올라와, 개항할꺼면 차라리 나의 목을 치라며, 절대 반대를 외칩니다. 그 이유가 장난 아닙니다. "왜놈이나 양놈이나 똑같아! 안 돼!" 라며, 왜양일체론을 주장합니다. 대쪽같은 신념이 느껴지는가요. 후덜덜! (사실 프랑스나 미국이 쓰던 방법과 똑같은 형태로, 일본이 군함을 들이밀며 조선의 문을 열었으니까요. 가히 날카로운 통찰이라 하겠습니다.)

 

 1880년대는 - 전반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모습 을 보여주는데요. 이만손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래에 언급되는, 영남 만인소 사건 - 유생들 만명이 상소를 들고 일어나는 등 개화 반대를 열심히 합니다! 그렇게나 개화 반대, 개화 반대를 외쳤으나, 정부에서는 들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위정척사 운동은 1890년로 접어들며, 다르게 전개 됩니다. 이 때부터는, 과감하게 의병투쟁을 전개하며, 직접 칼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을미-을사-정미 의병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내용들은 나중에 또 살펴보게 됩니다 :) 그러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전반적 흐름이 이렇더라~ 정도를 느껴보면 충분하니까요.

 

 우리가 핵심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가 각을 세우며, 대립구도를 형성 하고 있더라. 이 점을 이해한다면 좋겠네요. 자, 그럼 이제부터 개화파의 구체적인 정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개화를 하고 문물을 받아들이려면, 좀 알아봐야 하잖아요. 그래서 일본에 수신사를 보냅니다. 1차는 강화도조약을 맺은 겸해서 다녀왔다면, 1880년, 2차 수신사가 일본에 가는데 이 대목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당시 관세문제와, 부산 말고도 어디를 또 열지 개항장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김홍집 등이 일본에 간단 말이지요. 쉽지 않은 문제이다보니, 논의가 잘 진척되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재밌게도, 청나라 사신 황쮼셴을 만나서, 김홍집은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갖고 오게 되었습니다.

 

 조선책략! 이 책의 내용은,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서, 친중 + 결일 + 연미 라고 하는 외교전략이 들어가 있었어요. 중국과 친하자, 일본과는 결합하고, 미국과 연결하자 는 전략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해 봅시다. 친중? 뭐, 조선은 계속해서 중국과 친하게 지내는 편입니다. 결일? 뭐, 일본과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가까워지고 있네요. 핵심적 문제는 연미 - 미국과 손을 잡으라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 때문에, 한반도가 지금 난리가 납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유생들이 불꽃같이 들고 일어납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중국과 일본과는 예전부터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잖아요. 전통적인 사대교린정책도 있고요. 그런데 난데없이 미국과 손잡으라니, 이건 정말 유생들이 볼 때는, "왓 더 헬!!!!" "이게 뭡니까!!? 미쳤어요!!? 말이 돼?!!" 라는 느낌으로 다가 오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일본과의 조약은, 나름대로 해오던 관습이 있었기에 받아들여졌다면, 다른 나라와의 조약은 극렬한 거부감부터 드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 연미 조항 때문에, 1880년대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격렬한 개화 반대, 영남 만인소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상소는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김홍집이 가져온 그놈의 책략을 보고 있자니, 내 가슴이 쓰려서 살 수가 없나이다!!! 눈물이 흐릅니다!!!"

 

 음, 어떻게 본다면, 이념갈등에 가까운 느낌도 듭니다. 이게 과연 1880년대의 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만약에 갑자기 한국이 북한과의 수교를 한다고 정부가 추진한다면, 왓!더!헬! 뭐??? 거품 물고 반대할 사람이 많지 않겠어요? 하하, 당시 유생들의 멘붕상황이 뭐 그런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미국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신미양요도 겪었고, 한바탕 대판 싸웠던 나라 잖아요. 그런 나라와 지금 손을 잡으려고 하니, 유생들은 절대로 절대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1880년대 유생들의 반미저항, 영남 만인소 운동을 파악해두면 되겠습니다. 배경이 조금 복잡해 보이는데 재정리 해볼까요.

 

 김홍집이 일본에 갔다가, 중국 사람을 만나서 조선책략을 갖고 왔고, 이걸 정부에서 돌려보고, 고종도 살펴보고 합니다. 그 내용에는 러시아의 압박을 막으려면, 미국과 손잡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생들이 볼 때, 이건 미친짓이야! 라며, 상소가 올라오며, 대거 항의하는데, 이것이 영남 만인소 운동이라는 것! 음, 꽤 간단하지요? 이렇게 하나씩 파악해가면 되는겁니다 :)

 

 한편, 시험에 낚이는 아픔(!)을 피하기 위하여, 지금 언급되었던 수신사와 예전의 조선통신사를 잘 구분해 둡시다. 수신사는 일본에 건너가서 개화 일본을 배워 오고, 조약 협의를 위해서 건너간 것이고요. 통신사는 조선의 문물을 일본에 건네주기 위해서 대규모로 파견되었던 사절단 입니다. 완전히 성격이 다르므로, 잘 체크해 두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통신사까지만 해도 문화적 흐름이, 중국 - 조선 - 일본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면, 개화 이후에는 이 흐름이 뒤집힙니다. 일본 - 조선 - 중국으로 가는 전반적 유입흐름이 있었어요. 법과 정치 등 많은 걸 확 바꿔버린 일본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랄까요.

 

 자, 이렇게 대립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조선 정부는 개화를 전담하는 기구를 설치해가면서, 계속해서 개화를 밀고 가는데요. 아이쿠, 벌써 내용이 또 길어졌네요, 잠시 끊고, 다음 문서에서 계속 됩니다 ^^ 상당히 급박한 모습과, 긴장감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조선 말의 흥미진진한 근대사 이야기. 앞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아아, 국사가 신나지 않으십니까~ 하하.

 

 오늘의 영감 - 잠깐이지만,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최근 읽었던 인상적인 책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연금술사의 작가 코엘료가 쓴 글인데, 꼭 전해드리고 싶네요. "꿈이 손에 잡힐 듯할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인생이 주는 이런 큰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의심하게 되니까요. 우리는 그동안 뛰어넘은 장애물, 겪어온 고생과 희생을 다 잊고서... 괜한 죄책감 때문에 오랫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파괴하려 합니다."

 

 승리 지점에 거의 다 와서, 문득 포기하고 멈추어버리는 경우가 정말로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지나온 걸음걸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열심히 살아왔다면, 그래서 충분히 멋진 선물이 눈앞에 보인다면, 그것에 기뻐하며, 마지막까지 힘내어 걸어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려 4억부가 팔렸다는 해리포터의 작가인, 롤링은 처음에 원고를 12번이나 퇴짜당하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가능성을 믿고, 마지막까지 밀어붙여 볼 때, 놀라운 일이 뒤따르는 것 같아요.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