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0월27일/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다니엘10:1-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0. 29. 18:53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0월 27일 주일 예배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 (다니엘10:1-11:1)

오늘은 구약 선지자 다니엘의 묵시가운데 마지막 묵시의 부분을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거대한 정복왕조들의 총리대신을 계속해서 역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포로가 되었던 한 소년이 어떻게 해서 바벨론의 총리대신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나라가 망하고 또 페르샤에서도 역시 총리대신을 지낸 그를 우리는 정말 신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이완용이처럼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의 영화를 꾀한 희대의 매국노에 대간신배이거나 그도 아니면 처세의 달인이었을까요?
정권이 그렇게 많이 바뀌어도 꿋꿋하게 30년간 이인자의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국내의 모씨처럼.

그러나 다니엘과 그 배후의 영적인 거대한 전투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다니엘에게 있어 거대한 제국의 총리대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타난 현상에만 집착하고 그 배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알 방법도 없습니다. 세계사의 흐름을 조절하거나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시세를 쫓아서 흘러갈 뿐입니다.

한마디로 힘없는 민초입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휩쓸리는, 게다가 힘없이 짓밟힐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기 때문에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우리는 패배주의라고 합니다. ‘나는 뭐를 해도 안된다. ’ ‘나같은게 과연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일을 하겠어’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의 처지를 잘 알면 우리는 결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의 생각이 우리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요?
이제부터 그 이유를 한번 살펴 보십시다.

다니엘서는 후반부인 7장에서 끝까지 다니엘이 경험한 4대 묵시를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도 본장부터 12장까지는 네 번째 환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묵시는 ‘힛데겔 강가의 대묵시’로 불려지는데 힛데겔은 요즘말로하면 유브라데스 강입니다.

이 묵시의 내용은 페르샤 이후에 일어날 알렉산더의 그리스제국과 그 뒤를 이어 일어날 네 나라를 기술하고 그 중에서 톨레미 왕조(남방왕)와 셀류쿠스 왕조(북방왕)의 전쟁에 관한 예언 및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4세(에피파네스)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게다가 말세의 대환난과 최후의 심판까지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굉장히 방대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 환상을 보고는 세 이레 동안을 슬퍼했다고 합니다.

다니엘에게 이런 굉장한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그는 우리의 세밀한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는 분이시지만 세계사의 흐름도 그의 섭리가운데 있음을 보여주어서 믿는 이로 하여금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대로 세상을 살아 가야한다는 것을 말하기위해서지요.

그러므로 세계사의 배후를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면 우리는 일어나는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묵묵히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레스3년(b.c.536년) 다니엘은 나이85세에 힛데겔 강가에서 21일동안 금식하면서 기도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고레스는 정복왕으로서 이스라엘에 해방령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대로 귀환시켜준 페르샤의 임금입니다.

고레스 3년은 해방령이 내려진지 1년이 지난 후인데 이때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함께 귀환해서 성전을 건축하다가 중단된 때입니다. 아마 다니엘은 포로귀환 때 참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주위의 방해로 성전건축이 중단된 고국의 암울한 상황을 전해들은 다니엘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묵시의 기본요건이 한 개 나와있지요?
첫 번째로 그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만일 이때 85세의 노구에 힘을 주셔서 좀 더 오래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해 달라고 금식기도 중 이었다면 하나님은 이런 거대한 묵시를 보여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그 일에 대해서 집요하게 집중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딸의 합격을 생각하며 기도한 다음 꿈을 꾼다면 그건 바로 딸의 합격에 관한 꿈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고국의 어려운 상황을 놓고 기도하는 다나엘에게 자기 민족과 관련된 예언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언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이 나타내는 사실 즉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역사의 흐름이란 것도 결국은 배후의 영적인 전투에 따라 드러난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을 생략합니다.
참, 이 예언은 정확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이 다니엘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세에 누가 슬쩍 끼워넣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예언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다니엘이 그 환상을 보고 난 다음 그는 힘이 다 빠져서 그만 혼절해서 쓰러져 인자의 음성을 들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일부를 눈으로 보고 난 다음 그 장엄함과 위엄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가 아무리 일생을 하나님과 함께 한 대선지자라고 해도 하나님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자고 있는데 ‘한 손이’ 다니엘을 어루만집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손을 가브리엘 천사의 손이라고 추측합니다. 5-9절은 성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고 그가 기절해서 자고 있을 때 이제 그를 깨운 손은 가브리엘 천사의 손입니다.

이제까지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준 이가 가브리엘이었고 미가엘을 다른이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을 깨운 것이 아닌가하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가브리엘이나 미가엘은 천사장이고 가브리엘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이로, 미가엘은 천군의 대장으로 나옵니다.

가브리엘은 힘이 빠져 혼절해서 자고 있던 다니엘을 흔들어 깨웁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다니엘을 이렇게 부릅니다.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정말로 놀랍고도 부럽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호칭은 여기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3년 전에도 다니엘은 이런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어때요?
이제 다니엘이 어떻게 그렇게 악조건 속에서도 항상 승리하고 승승장구하여 대제국의 총리대신을 연달아 하게 되었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도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는 다면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를 믿습니까?

아멘,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이들이 됩시다.
여기 본문의 일어서라는 말씀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제부터 주어질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깨달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자 다니엘은 놀라서 떨며 일어섰다고 합니다. 왜 놀랐을까요?
추워서요? 사실 산에서 밤새 기도하다가 새벽에 잠이 살풋 들었는데 꿈이나 뭔가에 놀라서 벌떡 깨어 일어나면 추워서 떨리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와서 소식을 전한다는 것에 놀라서 떠는 것입니다. 거대한 환상에 압도되어 땅에 쓰려져 자고 있다가 갑자기 천사의 손길에 놀라서 깬 사람에게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 놀라서 떨었던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서도 계속해서 떨고 있는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다음에 가브리엘 천사는 말합니다. 자신이 지금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왔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뭔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나 기도하며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한 해답을 받아 왔으므로 걱정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굉장히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2절 중반부에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어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올라올 때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먼저 응답하셨다는 것이지요. 그게 이제 드러날 뿐이지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러 온 첫날에 이미 응답을 받았답니다.
울며 불며 애걸복걸하지 않고 내가 이번에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한 첫날에 이미 나의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의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의 행위로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식의 기도행위를 하기 전에 이미 나의 마음을 아시고 먼저 들어주기로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에게 해답을 들려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응답’은 해결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듣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니엘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하려고 고행을 시작한 첫날에 이미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해답을 천사를 통해서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라는 말은 ‘괴롭히다. 학대하다’란 뜻으로 다니엘이 한 삼주간의 금식기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고행’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물론 완전한 금식은 아닙니다.

3절의 뜻으로는 나쁜 떡을 먹고 쓴 나물을 먹으며 고행을 했다는 뜻으로 번역되기 때문이지요. 왜냐면 그는 일절 굶은게 아니고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떡은 특별히 좋은 음식, 영양가 많고 기름진 음식의 뜻이 있으므로 기도하는 동안 거친 빵이나 물 같은 허기를 달래는 기본적인 음식은 먹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85세의 노구를 이끌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삼주동안 기도하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서 제발 몸이 약한 분들은 일절 음식을 끊고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몸도 조금씩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제목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고행하더라도 반드시 응답받아야겠다는 그 마음을 아시고, 그러니까 고행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 마음을 보시고 실행에 옮기는 첫시간에 이미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응답의 결과를 아는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삼주가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이 다니엘의 고생을 보시고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이미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행이나 고생의 보상으로 우리의 기도응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기로 , 고생하며 기도하기로 작정한 그 믿음을 보시고 기도하러 온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잘 나타내 줍니다.

묵시의 두 번째, 우리가 고행을 한 보답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려고 결심하고 실천에 옮기는 순간 이미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 기도를 다 아시고 응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때요? 굉장한 사랑의 하나님이시지요. 내 마음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고 아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기도를 쉬겠습니까? 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하지 않습니까?

‘기름을 바르지 아니했다’는 말은 다니엘이 기도하는 동안 자기의 외모에 신경쓰지 않고, 자기를 돌보지 않고 기도에만 전념했다는 말입니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현현이후 계속해서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은 다니엘은 역사의 이면에서 벌어진 영적인 존재들의 행동, 즉 영적인 전쟁에 관해서 듣게 됩니다.

13절에 보면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여기서 말하는 바사, 페르샤의 군주는 페르샤의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왕은 결코 천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사의 군주는 페르샤에 영향을 행사하는 악한 영, 악한 천사를 말합니다. 군주라는 말은 인간의 왕자나 지배자를 말하기도 하지만 미가엘도 역시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바사의 군주는 사탄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인간 왕국들이 전투를 하지만 하늘에서도 역시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탄은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야 하는 가브리엘 천사를 막아 그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인데 이는 사탄이 가브리엘보다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악령이 가브리엘을 막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21일은 다니엘이 기도하는 기간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21일간을 작정하고 소식하며 고행의 기도를 시작한 다니엘의 기도를 첫날 이미 들으셨지만 다니엘의 영적인 훈련을 목적으로 그가 그 작정한 기간을 다 채우기까지 가브리엘이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너에게 보내셨다’고 하는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이 금방 오지 않는다고 해서 조바심을 내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아마 뭔가 나를 위해서 나를 더 연단하시기위해서 무슨 목적, 나에게 더 좋은 일이 생기게 할 목적 때문에 하나님은 응답을 내가 기도가 끝낼 때까지 유보하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었고 응답받았으므로 결코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응답과 보호를 믿고 하나님 안에서 그와 동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미가엘의 이름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특히 영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천사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그 미가엘이 가브리엘을 도와 악한 영의 저지를 물리친 것입니다.
그래요 어떤 누가 있어 우리 하나님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의 천사인 미가엘도 악한 영은 막아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기만 하면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브리엘이 장래 있을 일들을 계시할 때에도 다니엘은 그 놀라운 소식에 그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인자와 같은 이가 다니엘의 입술을 만집니다.
사실 일개 인간이 하나님의 장구한 영적 계획을 알게 된다는 것은 너무 너무 두렵고 감당이 안되는 일이기는 합니다.

우리야 기껏해야 내가 잘되고, 내 자식이 잘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고 그런 것만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 한갓 인간, 즉 평범한 소시민인 우리들에게 너무 너무 거대한 전 세계적인 일들, 특히 장래 일들 까지를 포함하여 말씀하신다면 아마 우리도 다니엘처럼 장엄함과 경외감 그리고 두려움으로 말을 잃어버릴 것이며 땅에 엎드러져서 잠에 빠져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그런 것은 저하고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그냥 이번에 취직하겠는지만 좀 아르켜 주시고 좀 잘되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세계적인 하나님의 섭리는 그냥 대통령이나 왕들, 정치인들, 사령관들에게나 말씀해 주시지요. 어차피 그런건 제가 알아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이잖아요.

그렇습니까? 그러나 어쩌면 우리네 기도의 한계는 그 정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대답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런 더 거대한 , 너무 거대해서 어쩌면 우리네 인생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을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건 우리가 바로 이 세상의 광풍에 휩쓸리는 민초가 아니라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세력가임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한 일이 아닙니까?

“너희 세상아! 까불어 봐야 결코 나에게는 안된다. 나는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지. 내 맘에 안들면 내가 기도함으로 이 세상이 움직여질거야.”
어때요?  굉장하지 않습니까? 너무 너무 든든하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 나는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는 숨겨놓은 우주제국 황제의 아들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은 국물도 없습니다. 왜냐면 때가 되면 내가 본 신분을 밝히고 아버지와 더불어 왕노릇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천지와 세계를 움직이시는 내 아버지께서 나를 대신하여 보수하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거대한 인물인 우리가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하며 걱정하는 것은 너무 말이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쟎아요.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믿습니까?

그래요, 우리는 그런 신분입니다. 걱정하지도 염려하지도 마십시오. 이미 우리아버지는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영적인 훈련을 위하여 자기의 응답을 조금 늦게 전달되도록 유예하신 것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나 두렵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의 결과가 이미 나와서 이미 하나님의 전령이 이곳으로 그것을 전하기위해 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 때문에 조금 늦게 때가 될 때까지 모를 수는 있습니다만. 결코 내 기도가 하늘아버지에게 전해지지 못했는지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16절에 말하는 ‘인자와 같은 이’는 예수님은 아닙니다. 아마 가브리엘이거나 다른 천사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정설입니다.
다니엘이 놀라운 계시로 힘히 빠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자
“또 사람의 모양 같은 것”인 또 다른 천사가 다니엘을 만지며 강건하게 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부릅니까?

그래요,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그래놓고는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다니엘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연약한 상태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평안하라’는 말은 ‘솰롬’입니다. 히브리인의 인사.

이 말은 다니엘이 안전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가 마음의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강건하라’는 말을 두 번 연달아 함으로 우리가 힘을 내도록 원기를 북돋아 주는 격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상에서 국정 파트너로 삼으시고 말씀하시네요. 마치 에녹처럼 지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산채로 승천하는 사람입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고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강건하게 하십시다. 이미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았고 그가 천지에 지혜가 뛰어나신 분이 응답하셨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아버지의 뜻대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걱정하십시오. 내가 영적인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하여 맞추어 놓고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싸우고 세계의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물질적인 조금의 풍족함 뒤에 도덕적인 피폐와 부정부패, 그리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무서운 질병의 만연, 자원의 고갈과 인구의 대규모 폭발, 과거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진 이혼, 동성애, 그리고 미혼들. 그런가하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주위의 강대국들.
이 조그마한 나라가 독립을 유지하는 것은 실로 기적입니다.

우리나라도 한때는 국민총생산이 세계9위를 기록한 적도 있지요. 또 한때는 경쟁력이 세계11위를 기록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군대의 보유수로만 따지면 우리도 결코 약소국은 아닙니다. 세계6위 정도?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력은 강해도 너무 강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우리는 점점 더 약해집니다.

국내적으로 도덕과 종교가 피폐하고 인간의 도리가 어두워집니다. 국민들은 정치가를 증오하고 정치가나 재벌은 국민을 조종하여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최소한 이들을 계도하고 중심을 잡아야할 종교인들을 타락했고 이를 감시해야 할 언론은 부패했습니다. 조금의 이익앞에 꼬리를 흔드는 추태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는 관심 밖입니다. 나라의 부강이나 국민들의 편안한 삶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와 내집 만이 존재합니다.

더구나 한해 결혼하는 수의 1/3에 달할 만큼 이혼건수도 많습니다. 뿐입니까 지금은 아예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추세입니다. 물론 현실적 여건 때문에 결혼을 하지도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연적으로 2세의 생산이 적겠지요?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경향이 너무 심하여 우리의 출산율은 전세계에서 최하위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나라에서 아이를 낳은 것은 엄청난 손실과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게 아니라도 우리들은 서로 으러렁거리며 증오와 불신이 극에 달했습니다.
자살이 넘쳐나고 사기가 판을 치며 강간이 기승을 부립니다. 먹는 음식을 속이고 인간의 편리를 위해 도입된 첨단 제품은 사기에 이용됩니다. 이제는 뭐 믿을만한게 별로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불신이 판을 칩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까? 이것 참, 저도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이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신봉하는 사람인데. 나라는 외침에 망하기보다는 먼저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부패해서 망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처럼 음란하고 이기적이며 철저히 잔인한 경쟁사회, 패배주의가 만연하고 돈한푼에 서로 목숨을 걸만큼 도덕이 땅에 떨어진 사회를 보며 도저히 이땅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도 아직은 나라를 유지해 가는걸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그런데 그 신기함의 뒤에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영적인 전투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을 침노하는 악의 세력들을 막고 계시는 거대한 영적인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지 않는다면 주님도 이 땅에서 손을 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금방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나타난 현실의 뒤에 가브리엘의 진로를 방해하는 악한 바사의 군주와 또 그 악한 군주를 징치하는 미가엘의 싸움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중요한 영적인 전투에 승리해야만 우리가 바로 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나라가 하나님의 보시기에 선한 편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면 나라를 보존할 답도 나옵니다.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면 되는 겁니다.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약한자를 돌보고 억울한 일을 없게 하고 우리의 기본통치 이념이 하나님의 법에 맞게 되면 되는 겁니다. 도덕적으로 고양되고 윤리가 바로 서면 되는 겁니다.
군대의 수? 무기의 질? 경제력?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건전한 이성과 도덕관념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보응과 심판을 믿으며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며 선하게 행동하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구소련이 동구를 위성국으로 만들어 갈 때 북구에서 소련에 인접한 작은 나라 핀란드를 소련이 침공했을 때 그 적은 수의 핀란드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소련군을 물리쳤고 지금까지도 소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복지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소련은 이미 해체되었고 러시아가 섰지만 핀란드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어때요? 무엇이 우선인지 아시겠지요?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해야 되는 것.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있다면 우리는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어때요? 우리는 선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 우리교회가 들어서 우리를 선한 편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편으로 만듭시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있다면 세상의 파도에 내가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그어떠한 풍파도 내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나를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는 나를 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위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우리가 됩시다.
그러기위해 노력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눈에 보이는 위협에 굴하거나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나를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손길을 믿는 신앙 안에 든든히 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0월 2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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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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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옳은 선택이 곧장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의가 불필요한 가치로 추락하고, 여기저기 비참하게 굴러다닐 때, 이럴 때야말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돌이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가만히 있는 태도가 아니라, 계속 기도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다만, 우리가 "당신을 생각하므로" 따뜻하고 친절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 2013. 10. 시북. / 2014. 02. 덧붙임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