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을미사변 - 조선의 국력이 다해가는 징조

시북(허지수) 2013. 11. 11. 19:58

 러시아 중심으로 민씨 정권이 갈아타면서, 친일 박영효를 역적으로 축출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3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친러적 성향이 강해졌습니다. 러시아나 미국을 끌어들이면, 일본을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겠구나 싶었던 거지요. 한편, 이와 반대로,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 정도야, 주무를 수 있다고 계산합니다. 사무라이 칼로 테러해 버리지 뭐... 1895년 10월 8일의 일입니다.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명성황후에 대하여, 일본이 테러를 시도합니다. 1895년 을미사변 입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지요.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고자, 낭인(일본무사)들이 들어와서, 고종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칩니다. "명성황후 어딨냐~?" 결국 일본 무사들은 좇아가서 궁녀들과 명성황후를 죽이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일으킵니다. 이쯤되면, 조선의 운명이 거의 다하였다는 느낌이 듭니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살고 있는 곳이, 낭인들에 의해서 침범되고, 이토록 처참한 일을 당하다니요. 근대사의 치욕이자, 비극이었습니다.

 

 명성황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며 두 가지의 시선이 존재합니다. 이번 문서에서는 굳이 고정된 판단을 내리기 보다는, 견해들을 소개하는 정도만 해볼까 합니다.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먼저, 긍정적인 모습으로 해석하는 쪽은, 약소국인 조선 입장에서 외세를 잘 활용해서, 나라를 이끌어 가려는 현명한 여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명성황후가 머리가 비상하고, 상황 판단이 빨랐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편이고요.

 

 다만 안타까운 점은, 국제 정치에서 외세가 마냥 순진하게 조선을 돕기 보다는, 오히려 조선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점을 그냥 단순히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농민운동 때, 외세를 이용해서 진압했다는 점은 악마의 한 수가 아니었나 라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조금 엄격히 말하자면, "외세를 계속 끌어들여야만 우리(정확히는 민씨 정권)가 버틸 수 있다" 라는 인식의 한계도 엿보인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해석을 하는 쪽에서는, 위기 때 마다, 청나라 등 외세를 계속해서 끌어들여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다가 끝내 또 다른 외세의 시퍼런 칼날에 당하고 마는 여인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나라가 몰락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권 유지부터 생각한게 아니냐, 따라서 국권보다는 사적인 욕심만이 있었을 뿐이다 라며, 혹독한 비판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결론은, 읽는 분의 몫으로 남겨놓고자 합니다. 일종의 여백의 미 같은 거지요. (*일본의 칼에 쓰러진 것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성황후의 지난 날 행동들이 모두 아름답게 꾸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박영효를 역적으로 내몰며 친러로 돌아선지 불과 몇 달도 안 되어, 발생한 을미사변! 그 이후, 조선은 이제 4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이번 내각의 특징은 (친러로 가려는 왕비를 살해했으므로) 역시나 친일입니다! (김홍집 내각 기준으로는 :: 1차,2차 친일 → 3차 친러 → 명성황후 시해됨 → 4차 친일)

 

 그나저나, 여전히 살아남는 김홍집이라는 인물! 신기하지요. 이른바 "조선 개화의 설계도"를 마련했던 인물입니다. 당시 조선에서 세계정세를 참 잘 파악했었던 인물이며, 개화정책에 적임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카멜레온적인 모습도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말하자면, 줏대는 없지만, 일처리는 뛰어난 정치가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자, 이제 1895년 4차 김홍집 내각 (친일성향) 에 의해, 을미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을미개혁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건양이라는 연호가 등장합니다. 군제를 개편해서, 중앙군은 친위대로 편성, 지방군은 진위대로 설치 하였습니다. (한편 친위대는 1905년에 없어지고요, 진위대의 경우 1907년 군대해산을 통해서 없어집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을미개혁인 1895년입니다~)

 

 사회적으로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게 단발령 이었지요. 이건 문화충격 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몸을 물려받아서, 자신의 신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단발령 시행한다며 강제로 상투를 잘라버린다니요. 그야말로 만행에 가까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체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게 거의 이념처럼 작동되던 사회였는데, 단발령이 강제 시행되니까 문제가 커집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괜히 갔다가 머리카락 잘리면, 아주 열받을테니까요. 기록에 의하면, 단발령으로 머리카락이 잘리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회적 충격이 발생한 단발령이었고, 안 그래도 을미사변으로 반일감정이 부쩍 올라간 시기에, 친일적 을미개혁이 이어지니, 유생과 농민들이 전국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성리학을 공부하던 이들은 차라리 내 목을 치라면서, 분노하기도 했고요.

 

 그 외에도 을미개혁에서는, 종두법의 시행 이나, 태양력의 사용 이 있었습니다. 태양력의 경우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기점으로 해서, 이 날부터 양력 1896년 1월 1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학교령을 통해, 초등학교가 생기게 되었고, 여학생들도 학업을 할 수 있는 문이 열렸습니다. 또한, 우편업무가 재개 됩니다. 갑신정변 때, 우정국이 불타는 사건으로 중지되었던 우편업무가, 늦게나마 재개 되었고요.

 

 여기까지가 을미개혁의 내용들입니다. 1894~95년 사이 일어난 변화가 참 많았습니다. 1895년 조선의 모습은 상당히 우울해 보입니다. 백성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고, 고종 임금 역시도 지금 너무나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왕비가 이른 새벽에 시해되질 않나... 이렇게는 도무지 살 수 없잖아요. 무서워서 잠을 못 잘 정도입니다. 나도 혹시 참변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여전했고, 남은 고종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다음 해인, 1896년 고종의 선택, 뒷 문서에서 이어집니다.

 

 오늘의 영감 - 20세기 존경받는 지도자 중에 한 명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발언을 덧붙여볼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니다. 얼마나 세게 넘어졌는지 비웃거나 그들이 더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말로만 꼬집는 사람들이 아니다. 영예는 실제 무대에 오른 이의 몫이다. 일이 잘 풀리면 엄청난 성과가 가져다주는 승리감을 만끽하고, 실패한다고 해도 최소한 멋지게 도전해본 다음 실패하는 사람 말이다."

 

 최선생님은 중국 대나무 비유를 이야기 합니다. 5년동안 이 대나무는 단지 마디에만 머물러 있고, 전혀 자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으며, 성장을 위해서 도전하고, 준비하고,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마침내 5년이 지난 후, 대나무는 1년만에 무려 25미터나 미친듯이 엄청나게 자라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현실을 창 밖 풍경처럼 바라보며, 무심한 듯 비평이나 가십을 날리며, 말로는 마치 세상을 주름잡는 영웅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임승차를 하려고 하며, 대가 없이 좋은 결과만을 탐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쉽게 가지려는 오만한 마음을 발견할 때면, 크게 반성부터 하곤 합니다.

 

 멋지게 도전해보는 삶, 실제로 노력을 해보는 삶, 그렇게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영예롭고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노력한다면, 놀라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면 되는데 노력하지 않았기에 실패했다"는 변명은 비겁합니다. 전혀 멋지지도 않으며, 가혹하게 말해 단지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행동을 귀찮아하고, 편안한 것을 추구하며, 쉬운 길로만 가려한다면? 부디 그렇게 말만 살아 있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감히 바랍니다. 제 자신에게 가끔씩 구사하는 충격요법을 써봤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나마 긴장감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치는 순간이 올 때마다, 꼭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