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1월10일/성령의 은사(고린도전서12: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1. 12. 14:24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1월 10일 주일 예배

성령의 은사 (고린도전서12:1-11)

우리가 예수믿는 삶을 살고 있는데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무얼 주셨지요?
누구에게는 엄청난 돈을, 누구에게는 엄청난 권력을, 누구에게는 사랑스런 가족을, 누구에게는 잘생긴 외모를, 누구에게는 튼튼한 몸을, 누구에게는 충성스런 부하를, 누구에게는 마음 맞는 친구를, 누구에게는 정깊은 연인을 주셨는데 저에게는 과연 무엇을 주셨지요?

좋습니다. 조금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 저에게는 무얼 주실거지요?
우리가 만일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무엇이든 가지고 계시며 또 무엇이든 주실 수 있는 분에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저에게 무엇을 주실 겁니까?

과연 나는 무엇을 받았고 또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를 받을 수 있고 또 받았을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러한 것들 중에서 영적인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실망되십니까?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왕왕 실수하는 것이 있는데 영적인 것보다 당장 눈에 보이고 사용할 수 있는 육적인 것을 먼저 구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결코 육적인 것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모든 나타나는 육적 현상은 영적인 활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사실 고린도전서7-15장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질문한 여러 가지 내용에 대한 목회적 답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은사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사가 영적인 질서와 관련이 있는 것이기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로 이 신령한 것에 대해서 잘 알기를 원하여서 여기에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답변은 먼저 은사의 표면적인 다양성을 말하고 다음으로는 그렇게 다양해 보이는 은사가 바로 동일한 성령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성령님이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개인의 자랑이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것이 답변의 주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답변을 잘 본다면 바울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중 부정이지요. 이 말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좋고’가 아닙니다.

따지고보면 영적인 일은 이성적으로 규명하기도 어렵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단지 영적인 일의 결과가 나타난 현상을 보고서야 사람들은 ‘아, 성령께서 역사하셨구나!’하고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에 관심이없는 이나 세상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인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부 고린도교인들이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질문한 것에 답변을 하면서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암암리에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너희 고린도 교인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지금 고린도 교회가 혼란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서로 잘났다고 뻐기기만 하지 왜 이런 은사가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아마 고린도교회에는 회심한 이방인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의 회심 이전의 상황을 소개합니다.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먼저 바울은 우상의 특징을 “말 못하는”으로 표기합니다. 이 말은 모양은 그럴듯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죽어 있는 우상을 조롱하는 말임과 동시에 형체는 없으시지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성령님을 대비시킨 말입니다.

한국의 산하에는 수많은 그럴듯한 우상들이 있습니다. 거대한 돌덩이나 구리, 쇠로 만들어진것에다 순금을 뒤집어 쓴것도 있습니다. 옥이나 도자기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도 있습니다. 이런게 다 모양만 그럴듯하지 말도 못하고 아무리 그 앞에서 복달라고 빌어도 응답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지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상이 살아서 우리를 이끌고 인도한다는 말입니까?

말만 못하고 나머지 능력은 그래도 발휘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상은 모양만 그럴듯하지 결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말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능력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사람들을 끌어 갑니까?

그건 바로 미혹의 영,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사실은 사탄을 숭배하는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이라는 존재를 섬기는 것은 바로 사탄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금정산 신령, 도봉산 산신? 동해의 용왕, 오래된 나무 귀신, 거대한 바위귀신?
절에있는 수많은 부처상들.
그 모든 것은 모양만 그럴듯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에 깃든 사탄의 영이 사람들을 마치 그러한 신들이 있는 것처럼 미혹한다는 말입니다.

자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본격적으로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말하기 전의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가령 어떤 성도가 자기는 어떠한 성령의 은사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언도 예언도 지혜도 지식도 없고 그저 하나님만 바라며 예수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좋습니다. 그것뿐이지 그에게는 아무런 은혜의 징후가 보이지 않습니다. 옆의 누구는 방언을 하고 또 옆의 누군가는 통역을 하고 , 또 다른 누군가는 병을 고치고 , 또 다른 누군가는 예언을 합니다. 기적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난립니다. 그런데 나는 맹맹합니다. 전혀 그런 신비한 경험도 성령의 은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는 아무것도 안주셨는가?’ 하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성령을 못 받았는갑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성령받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 약장사도 이것보다는 더 그럴듯한 말을 합니다.
이천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한 유대인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가 십자가에서 피흘린 것이 어떻게 나의 죄를 사하는 것이 될까요?
그래서 그가 어떻게 자유자인 나의 주가 될 수 있지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고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하시지 않는다면 이건 정말 터무니 없는 소리로 들려서 결코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주로 믿는다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아무러한 역사를 일으키지 못해도 그 자체로 성령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아무런 은사가 없다고 실망하거나 내 믿음이 적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게 아닐까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에 나와있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는 말은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린 예수를 가리켜 신명기21:21에 나와 있는 저주받을 자로 말한 유대인의 구호입니다. 성령받은 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습속을 알지 못하기에 예수를 믿지 않는 이라도 예수를 저주받을 자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그런 유대인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혹시 꿈을 꾸었는데 생시에 그 꿈이 맞았던 경험이 있습니까? 혹시 말씀을 듣거나 읽는 중에 마음이 뜨거워져서 눈물을 흘린적이 있습니까?
혹시 무심코 내가 소원했던 일이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나를 돕는 손길을 느낀적이 있습니까?
우연으로 보이는데 여하튼 사건사고를 비켜간 경험이 있습니까?

좋아요, 더 나가봅시다. 비가 개이고 운동장의 흙이 파여서 실개울이 생겨서 맑고 깨끗한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을 보고 아 맑다고 느낀적이 있습니까?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숲이 너무 푸르르고 나무가 너무 아름다운 것을 느낀적이 있습니까?

그 모두가 성령께서 내 마음을 건드리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매일 보는 자연에 새삼스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요, 나는 성령의 간섭안에서 비로소 주위에 , 나의 내면에 눈을 뜨게 되는 영적인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 판단의 고비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받은 이임을 믿으십시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들어갑니다.
먼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라는 말에서 모든 은사가 동일한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본문을 시작하면서 ‘신령한 것’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령이 주가 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신령한 것을 ‘은사’로 표현했는데 이 은사라는 말은 카리스마의 복수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
이게 바로 은사의 기본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에게 주신 선물들이란 말입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댓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마음에 안들어요? 이것 말고 저것 주세요. 글쎄요.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계속 나갑니다.

5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에서 ‘여러가지’라는 말은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를 여러 갈래로 나누다’라는 분배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종류의 선물이 아니라 한 개의 선물을 분할해서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표면상으로 다양하게 보이는 선물들이 실제로 한가지란 말입니다. 왜냐면 같은 것을 단지 여러명에게 분배한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타난 현상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우리의 눈에 다르게 보이는 현상일 뿐이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보다 저것이 더 좋고’ ‘저것을 받은 이가 더 하나님의 이쁨을 받고’ 이런게 없다는 말입니다.
원문을 번역하면 ‘은사는 여러 가지’가 아니고 ‘은사는 분배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럼 누가 분배를 해 주시지요? 동일한 성령님, 전혀 다른 분이 아니라 똑 같은 성령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쌀을 나누어 주는데 다만 포장지가 다르다’고 해석해도 됩니다.

은사에 관한 것에 이어서 교회내의 직임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임역시 신령한 것에 속하네요.
여기서 직임은 먼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봉사를 말합니다. 목사니 장로니 권사니 집사니 권찰이니 교사니 찬양대원이니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두 번째는 사도들이나 전도인들의 특별한 책무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연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굉장하지요?
우리가 단순히 연보를 하는 것도 직임에 들어간다는 말이지요. 하하

조금 극적으로 이야기할까요? 목사나 집사나 모든 직분이 같고 심지어 공식적인 타이틀이 없어 그냥 성도님으로 불리는 이도 마찬가지로 똑 같다는 것입니다. 연보도 필요가 있어서 바치는 것이므로 이것 역시 주의 교회에 필요한 직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직임 역시 ‘여러 가지’지만 직임을 부여해 주시는 주는 같은 분입니다. 여기서의 ‘여러가지’ 역시 앞의 ‘여러 가지’와 같은 말입니다. 즉 같은 것을 단지 나누어서 분배해 준다는 말입니다. 같은 분이 같은 것을 나누어서 포장해서 주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 직임이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게 더 높네 저게 더 높네’하고 자랑하고 경쟁하는 것은 우스운 짓입니다. 우리 말로 ‘장로’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히브리어로는 자켄, 수염을 말합니다. 영어로 엘더, 늙은이를 뜻합니다. 우두머리 장짜와 늙을 로짜가 합쳐진 우리말이 너무 멋있게 들려서 모든 성도들이 장로님 소리를 들을려고 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직임 역시 개인에게 주어지는 벼슬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한 역할의 분배인 것입니다. 모두 다 귀하고 어느것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우리가 잘아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에네르기.
사람의 일이나 세상에 감도는 우주적이거나 물리적인 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하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그래요, 사역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같은 하나님이 같은 것을 그냥 분할해서 나누어 주는 것일 따름이지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것, 똑 같은 것을 단순히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역이나 저 사역이나 모양이 다른 것은 교회의 처한 상황과 필요가 달라서이지 결코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가 더 크고 저 역사가 더 크니 하는 쓸데없는 경쟁심은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그것에 따라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외부적 사역은 비분리적이며 공동적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7절에는 이러한 역사의 목적이 나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같은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은사’를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말하거든요. 각 사람의 필요와 형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그 모든 은사가 성령의 나타남의 표현이란 말입니다. 방언을 하는 것도 , 예언을 하는 것도, 지혜와 지식의 말씀도, 병을 고치는 것도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일 뿐 근본은 ‘사람에게 성령께서 나타나신 표현’이란 말입니다. 어때요? 왜 각 은사가 같은지가 잘 나와 있지요.

우리의 눈에 다르게 보일뿐 동일한 성령께서 나타난 표현의 차이 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나타나셨을까요?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 은사를 가지고 목에 힘주고 부자가 되고 이득을 얻게 하도록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 가야 될 것은 은사란 주어진 것이지 결코 훈련이나 무슨 수단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 종종 은사를 훈련이나 고행이라는 수단으로 획득할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가 참으로 가지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기 전에는 결코 어떻게 해도 가질 수가 없기에 더 가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제 어떤 은사가 있는지 한번 볼까요?
먼저 ‘지혜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지식의 말씀’입니다. 둘 다 말씀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다에 말씀 즉 ‘로고스’를 사용한 것은 지혜와 지식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로고스는 ‘말이나 설교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먼저 지혜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러한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가 복음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으며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고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알려진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혜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타인에게 구원의 진리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것을 제일 큰 은사라고 하고 가장 확실한 성령받은 표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식의 말씀은 교사들에게 속했던 은사라고 말합니다. 목사와 교사라고 할때의 교사.
그러므로 지식의 말씀은 복음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 또는 복음의 여러 사실에 대한 관계를 다루는 은사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믿음이 아닙니다. 특별한 선물로서 주어진 믿음을 말하는데 ‘산을 옮기는 등의 기적을 행하는 믿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특별한 신앙의 힘에 의하여 외부적으로 나타는 것으로 우리 성도가 가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네 번째는 병고치는 은사입니다. 병고치는 은사에 대해서는 저도 할말이 많은데 여기서 ‘치유하다’란 말이 복수형으로 쓰여져서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적인 여러 종류의 질병을 치유하는 은사를 지칭합니다.
다섯 번째의 은사는 ‘능력 행함’입니다. 이 은사는 기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종류의 초월적 역사를 포괄합니다.

여섯 번째는 예언함입니다. 예언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은사를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로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시의 내용과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선포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예언함을 사모하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 은사가 특별히 교회의 덕을 세우는것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은 예언과 방언중에서의 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영들 분별함을 말합니다. 이러한 은사들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은 교회의 영적 순결을 보호하기위해 매우 중요한 은사입니다.
여덟 번째는 각종 방언 말함입니다. 그런데 방언이면 방언이지 각종 방언은 또 뭡니까?

그건 당시 고린도 교회에 다양한 종류의 방언이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 방언은 각지역의 말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종교적인 열광상태에서 발설하는 무아경의 언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언은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최고의 은사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바울은 의도적으로 방언을 여덟 번째로 나열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은사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방언이 통역이 없다면 일반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교인들 가운데서도 알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가지고 영적인 소외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이 말하는 은사는 통역함입니다. 방언을 통역해서 인간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요.

참고로 통역의 은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은사는 각지역의 언어로 듣게된 오순절 당시의 방언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방언의 종류도 한 종류로 통일된 것이 아니므로 너의 방언은 사탄의 방언이고 내 방언이 더 좋은 방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들을 가지고도 영적인 우월성을 주장한 것 같습니다.
전혀 다른이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은 교회에 무슨 덕이 있을까요? 알아 듣지를 못하는데. 그러므로 통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 말함으로 본문을 맺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은사를 주시는 것은 성령의 자유의사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성령께서 이런 것을 주셔야 되고 내가 이런 상황이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이것이 되어야 한다는 공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여건과 특질을 파악하시고 그러한 삶에 가장 적합한 은사를 마음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데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까? 기도의 능력을 보고 싶어요, 그러니 다른 은사로 바꿔주세요. 이런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애타는 기도에 주께서 응답하셔서 이것저것을 주시겠지만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특정한 것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자비에 기대어 간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면밀하게 살피시고 가장 적합한 것으로 개개인에게 일일이 친히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들을 모아서 주의 교회를 든든하게 새우고 유익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도 뭔가를 얻고 싶습니까? 그런데요 이미 내가 더 좋은 것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갖고 있는게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남이 알아 주지 않습니까? 별로 쓸모가 없어보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거룩한 성령이시기 때문에 그가 나누어 주시는 선물을 기쁘게 받아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는 모두 같은 것이며 은사는 성령이 사람에게 나타난 표시일따름이라는 것이며 은사를 주신 이유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하신 표시를 허락하시옵소서.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1월 10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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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의학에 대해서 저는 아는 게 없지만, 최근에 읽었던 체세포의 경이로움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세포라는 게 본디 출발은 하나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피부세포를 떼어내서, 이것으로 간세포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던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제는 피부세포를 원래의 세포로 되돌리는 것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세포가 초기화 될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본디 피부세포나 간세포나 같은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손이 중요하니, 발이 중요하니, 눈이 중요하니, 간이 중요하니, 라는 옛사람들의 비교는 조금 무의미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옛말에도 눈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말이 있긴 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저는 포도막염 때문에 한 쪽 눈을 크게 다칠뻔 했기 때문에, 눈이 중요하고, 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피부가 다쳐서 피가 나더라도 곧 아물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의 시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다가, 주사를 맞고 원래대로 회복되니까,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확실히 눈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하하.

그러니까, 결국 이 설교의 핵심적 내용은, 굳이 "비교하지 말라" 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남의 재능과 비교하지 말라" 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핏대를 올리고, 혹은 나는 못났다고 자학이 시작된다면, 이런 공동체는 쉽게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이며, 자신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며 활용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저는 가끔, "서른 한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있는 가게" 그러니까, 베ㅇㅇ라ㅇㅇ 가게에 들려보곤 합니다. 어떤 친구는 초콜릿 들어있는 걸 좋아하고, 어떤 친구는 녹차맛을 선호합니다. 저는 그래도 치즈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이 좋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맛이 다르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재능도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하는 분야가 다르고, 잘 하는 분야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서로의 존재를 고마워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훨씬 즐거운게 아닐까 싶어요.

예전에 저는 예술 쪽의 판타지가 있었습니다. 피아노를 근사하게 치면서, 마성의 중후한 목소리로 여심을 흔드는 사람! 아이구, 안타깝게도, 그런데 전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거, 하나라도 잘하자 라는 생각에, 매주 한 권정도는 책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글자만 보면 짜증나거나 잠부터 온다는 사람이 주변에 꽤 많았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아, 글자 보는 것이 재능인갑다. 하하.

무슨 맛을 좋아하는지가 재능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모르겠으면, 이것저것 시도해보면 힌트를 얻게 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민트맛은 어쩐지 치약같아서 썩 내키지가 않습니다. 피아노를 잘 쳐보려고 애써보다가, 스스로가 인내와 끈기가 없다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좋아하는 글자라도 열심히 보자 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좋아하는 것을 힘껏 노력해서 좀 더 잘하게 되고, 나아가 재능을 살려,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참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 2013.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