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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최고의 골키퍼 고든 뱅크스

시북(허지수) 2008. 4. 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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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don Banks

 최고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든 뱅크스는 잉글랜드 최고의 골키퍼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대한 선수입니다. 잉글랜드 레전드 선수인 고든 뱅크스, 그 투혼의 이야기 입니다.

 프로필

 이름 : Gordon Banks
 생년월일 : 1937년 12월 30일
 신장/체중 : 184cm / 83kg
 포지션 : 골키퍼
 국적 : 잉글랜드
 국가대표 : 73경기 출장

 고든 뱅크스, 잉글랜드의 수호신.

 경이적인 세이빙 능력과 판단력을 겸비한, 발군의 안정감을 자랑하는 골키퍼 고든 뱅크스. 잉글랜드의 뒷문을 철저하게 지켜주었던 고든 뱅크스는 선수 시절에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그의 별명은 이름을 따서 잉글랜드의 은행 [Banks of England] 이었습니다. 그가 있으면 안전하다, 믿을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고든 뱅크스는 명문팀에서 활약한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10대 때, 체스터필드라는 팀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합니다. 1959년 레스터시티 팀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골키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뱅크스가 있던 레스터시티팀은 1964년 잉글랜드리그컵 (현재 칼링컵으로 불리는) 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레스터팀의 사상 첫 우승트로피였습니다. 골키퍼로서 안정적이고 훌륭한 실력을 보여주었던 고든 뱅크스는 이 맘때부터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활약하게 됩니다. 20대 중반에 발탁된 것이니 늦다면 늦다고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나이가 뭐 중요한가요. 실력이 중요하지요.

 잉글랜드 국가대표 골키퍼를 맡게 된 이후로는, 더욱 든든해진 모습이 됩니다. 확고하게 주전 골키퍼로 자리를 굳힙니다. 이렇게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고든 뱅크스와 바비 무어가 이끄는 수비진은 말 그대로 철벽이었습니다. 조별리그에서부터 8강전까지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준결승전 에우제비오에게 한 골을 허용할 때까지, 443분 무실점을 기록했습니다. 공수가 훌륭했던 잉글랜드는 66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 주역 중의 한 명으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수호신 고든 뱅크스 입니다.

 1970년에는 더욱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70년 월드컵에 참가한 잉글랜드는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을 만납니다.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하는 브라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수호신 뱅크스가 있었습니다. 선방, 선방, 눈부신 선방이 이어집니다. 이 당시 브라질은 70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합니다. 또한 만나는 팀마다 3골 이상씩 넣으면서 가공할만한 득점력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공격력이 잘 통하지 않던 유일한 예외팀이 있었으니 바로 고든 뱅크스가 버티는 잉글랜드 였습니다. 아쉽게 잉글랜드는 접전 끝에 0-1 로 한 골을 내주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만, 고든 뱅크스의 선방은 실로 역사에 남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것이 펠레의 슛을 막는 장면입니다. 펠레가 찬스에서, 구석으로 정확하게 헤딩을 했습니다. 멋진 크로스에 훌륭한 헤딩, 누가봐도 아름다운 골 장면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헤딩슛을 정말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막아냅니다. 펠레도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후에 펠레는 이 선방을 두고, 내가 보았던 최고의 선방이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펠레가 최고로 꼽았던 그 기막힌 명장면을, 이제 인터넷이 발달해서 우리는 몇 번이고 쉽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번 잠시 보고 갈까요.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1972년이 되었습니다. 30대 중반의 고든 뱅크스는 한참 전성기를 달리는 중이었습니다. 당시 소속팀이었던 스톡시티의 리그컵(現칼링컵) 우승을 이끕니다. 이 우승트로피는 현재까지도 스톡시티의 유일한 트로피이기도 합니다. 결승전에서 첼시를 맞았는데, 고든 뱅크스는 이번에도 멋진 선방으로 뒷문을 단단히 책임져 주었고, 스톡시티는 창단 후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 해 고든 뱅크스는 FWA선정 올해 최우수 선수상에 선정됩니다. 왕실에서 OBE 훈장도 받게 되었고, 인기도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고든 뱅크스는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그 영광의 1972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오른 쪽 눈에 큰 부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팬도 많았고, 사랑도 많이 받았던 잉글랜드의 수호신이... 그렇게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서 국가대표와 선수생활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습니다. 열렬한 팬이 눈을 기증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고든 뱅크스는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결국 오른 쪽 눈은 실명하게 됩니다. 은퇴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지요. 그 때 사고만 없었더라면 아마 고든 뱅크스 선수도 분명 센추리클럽 멤버(대표 100경기 출장)가 되었을 것입니다. 고든 뱅크스가 이렇게 하차하고, 캡틴이자 명수비수인 바비 무어도 노쇠해지자, 잉글랜드 대표팀은 74년월드컵 예선에서 수비에 허점을 노출하면서 예선탈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때까지 6연속 월드컵 본선출장을 자랑했던 잉글랜드 대표팀으로서는 참으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뱅크스가 뛰던 70년 월드컵 이후, 잉글랜드는 74, 78년 두 대회를 연속으로 예선탈락했고 82년이 되어서야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

 뱅크스의 이 불운한 부상은 잉글랜드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고든 뱅크스에게는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고든 뱅크스의 마음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축구가 불타오르고 있었나 봅니다. 오른 쪽 눈 실명도 그의 열정과 재기를 막지 못했습니다.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다시 한 번 골키퍼로 활약하게 됩니다. 예전만큼 걸출한 실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열정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1977년에는 최우수 골키퍼에 선정되는 등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며, 인기도 대단했습니다. 1977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공식적으로 은퇴합니다.

 아마 잉글랜드에서 고든 뱅크스만큼 사랑받은 골키퍼도 드물 것입니다. 그가 따낸 세 개의 트로피는 모두 첫 트로피기도 했습니다. 66년 월드컵의 우승트로피도 물론 위대하지만, 레스터시티, 스톡시티에서 따낸 첫 트로피는 고든 뱅크스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쪽 눈을 잃게 되었어도, 그는 축구선수로 마지막까지 투혼을 불사르면서 최우수골키퍼로 은퇴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잉글랜드 최고의 골키퍼로 칭하기에도 그 표현이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고든 뱅크스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하기에도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펠레마저 도무지 사람의 플레이가 아니었다고 극찬했던 고든 뱅크스의 눈부신 모습들... 고든 뱅크스는 영원히 빛나는 레전드로 앞으로도 기억될 이름일 것입니다. 이상으로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