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열강의 경제침탈 2부 - 전쟁의 뒷배경엔 경제가!

시북(허지수) 2014. 1. 7. 23:55

 지난 문서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임오군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인해, 전격 진압되었습니다. 명성황후도 죽을 뻔 했다가 복귀하고 말이지요. 자! 중요한 건, 이러면서 청나라와 조약을 맺어요. (*아참, 제목만큼은 열강의 경제침탈인데, 지난 문서부터 계속해서 조약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조약들이 실은 이권침탈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헉... 10글자! 길지요. 여하튼, 이걸 체결합니다. 재차 언급하지만, 사실 임오군란 문서를 다룰 때 다 했던 내용들을 복습하는 거에요. 경제적 측면에서 개항기를 다시 보기 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러니, 절대로 부담갖지 마세요.

 

 그러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핵심을 볼께요. 개잔무역을 허용하고, 내지채판을 금지한다 는 것이 핵심입니다. 외계어 같군요. 그죠? 이럴 때는, 언제나처럼 쉽게 다시 풀어쓰니까 걱정마세요.

 개잔무역 OK - 서울 양화진에서, 상점을 차려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가능합니다. 청나라 상인들 신이 났어요!

 내지채판 NO - 벌써 감 잡은 분도 간혹 있겠지요. 청나라 상인들이, 내지 → 그러니까 국내의 다른 곳으로 물건을 들고 가서, 파는 것은 안 된다는 거에요. 아주 간단히 정리한다면, "중국 상인들은 양화진에서만 팔아야 함" 입니다. 쉽죠? 하하.

 

 본질적으로 접근해 본다면, 1882년 이후, 서울 양화진이 열렸고, 중국 상인들이 들어왔다 이 점이 핵심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요? 천천히 살펴봐요. 이제까지는 그래도, 일본과 조약 체결하면서, "부산에서만" 물건이 오고 갔단 말이지요. 그것도 고작 10리(4km) 안에서만 일본인들이 물건을 팔았었고요. 아니, 그런데, 지금 청나라 상인들은 어떤가요? 수도 서울에 진입해서, 신나게 물건 팔고 있어요! 과연,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일본의 입장이 당장 난처해지자(불리해지니까), 곧장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뭐야? 청나라만 지금 혜택주는 겁니까?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일본도 물건 맘껏 팔게 해달라 데쓰요!" 자, 그러면서 1882년 일본과 또 하나의 약속을 체결합니다. 조일 수호 조규 속약을 맺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 많은 조약들, 이름도 어렵고, 알쏭달쏭한 조약이름 다 외워야 하나요? 아이구, 그렇진 않습니다. 각 나라와 체결되는 조약들이 흘러가는 과정을 이해해보고 즐기면 되는 거에요. 그러면서 어떻게 경제침탈이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거고요. 그러니, 매번 언급하지만, 너무 부담갖지 마세요 >.<

 

 여하튼, 일본의 집요한 요구에, 설정되었던 간행이정(일본상인제한거리)이 10리 에서 50리로 5배나 늘어납니다. 2년 뒤에는 또 다시 늘어나서 100리로 늘어났고요. 100리라고 한다면, 무려 40km의 범위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깊숙히 들어가 볼께요. 부산 뿐만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1883년에는 인천항까지 열리게 됩니다. 인천에서 40km라고 한다면, 거의 뭐 서울까지 와서 일본상인들이 마음껏 장사할 기회가 열린 거와 다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중국 상인들에게 "자, 이제 서울 오픈!" 이라는 혜택을 주었더니, 곧이어 일본 상인들도 유사한 혜택을 얻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놓고본다면, 지난 문서에서 잠깐 언급했던, 초창기 거류지 무역이라는 것이 이제 끝났습니다. 즉, 일본상인들이 서울에 있는 소비자에게 물건을 직접 판매합니다. 마찬가지로 청나라 상인들도 서울에 있는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고요.

 

 그러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까지 일본물건들 중개무역을 하면서 쏠쏠하게 돈을 벌어가던 보부상, 객주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걸까요? 한류스타 PSY(싸이)가 부릅니다. "우린 완전히 새됐어!", "우린 망한 스타일!" 그러니까, 수년 전까지 짭짤하게 돈을 벌다가, 갑작스레 임오군란 이후, 조약 내용이 달라지니까, 보부상과 객주들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큰 타격을 입고 말았네요. 흥미롭게도, 조약이 이번에는 국내상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일상과 꽤 밀접하다는 것, 계속 강조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

 

 그리고나서. 1883년에는, 드디어 조선에서 "지난 날, 조일무역규칙(강화도조약)에서 무관세 설정이 되었던 건, 너무 심했다. 이걸 좀 고쳐달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82년 미국과 조약할 때는 관세 설정을 제대로 넣었으니, 이참에 일본에게 분명하게 할 말이 있었던 겁니다. 한참 고생 끝에, 1883년 일본과의 재협상이 시작됩니다. 그 결과물이 "조일 통상 장정" 입니다. 확실히 문제 있어 보이던, 그 3무 정책을 늦게나마 수정하는데 성공합니다.

 

 늦었지만 그래도 관세 설정 하고요. 무제한으로 심각하게 유츌되던 곡물, 이걸 막기 위해서 지방관이 방곡령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계속되던 곡물 유출" 막을 권리를 드디어 지방관에게 준 것입니다. (단, 세부적 조건으로는 방곡령을 내릴 때는, 1개월 전에 미리 일본에게 통보를 해야 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제 불합리하던 보이스피싱급 강화도조약을, 보다 더 합리적인 수준으로 재협상 한 것입니다. ㅠ_ㅠ... 늦게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일본이 낼름 자기네들에게 불리하게끔, 바보처럼 순순히 재협상 할리가 없잖아요. 일본도 나름대로 얻어가는게 있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1883년에 "최혜국대우" 조항을 얻어갑니다. 조선은 중요한 거 2개를 재협상 하는데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치명적인 것은 내주고 말았습니다. 글쎄, 세상엔 공짜가 없다니까요...

 

 여기서부터 이번 문서의 하이라이트 입니다. 자, 과연 이 조약들은 어떤 결과를 만들었을까요? 정리해본다면,

 1876년부터 일본 상인이 조선에 들어와 물건을 팔기 시작했고요, 1882년부터는 임오군란 진압을 계기로, 중국 상인이 서울에 들어와서 물건 팔고요. 몇 년 후에는, 일본과 중국이 자기네들 물건을, 서울에서 서로 파느라 바쁩니다. 여기까지는 꽤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 뒷이야기는 충분히 적나라 합니다. 상대적으로 강대국이었던 청과 일본, 이들은 조선에서 독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기 나라만 마음껏 장사하고 이익을 얻어가길 원했습니다. 자연히 일본과 청나라의 사이는 경제적 이유에서도, 좋아질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1894~95년 두 나라는 조선 땅에서 전쟁까지 할 만큼 으르렁 거리지요.

 

 이렇게 보면 청일전쟁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청일전쟁이라고 한다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그래서 텐진 조약에 의해 일본 군대도 동시에 들어왔다는 걸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두 나라 군대는 물러가지 않고, 조선 땅에서 치고박고 싸우더라는 것이 청일전쟁의 정치적 접근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경제면에서 본다면, 흥미롭습니다. 단언컨대, 경제적 목적 없이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정치적 명분을 내밀었을 뿐, 뒷배경에는 경제적 이권다툼 이라는 것이 항상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청일전쟁은 조선을 정치적으로 주무르고자 하는 야망이면서, 동시에 조선을 통해서 막대한 이권을 독차지 하려는 치열한 싸움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제 결론, 청나라와 일본은 예전부터 (1882~83년부터) 경제적 문제로 서로 경쟁하고 있었음을 이해해둔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조금 섬뜩한 이야기 입니다. 조선을 집어 삼키고자, 지금 외부의 A 라는 나라와, 또 다른 B 라는 나라가 서로 경쟁 할 수도 있음을 역사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특정한 틀에 고정된 것이 아닌, 폭넓은 시야라는 게 중요합니다. 어떤 선택이 국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가, 어떤 선택이 국가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가... 제가 써놓고도, 참 어렵고 중요한 질문이고, 생각이 요구되는 질문 같습니다. 본디 국가를 이끄는 사람들이 현명한 선택을 해야 마땅하며, 또한, 당연히 국민 한 사람, 시민 한 사람의 생각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몰라라" 로 외면한 상태에서, 저절로 의사결정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일종의 모순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합니다.

 

 열강의 경제침탈 이야기, 3부에서 1890년대 조선 이야기를 계속 이어하겠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너무 늦지 않도록, 좀 더 노력할께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무엇보다 스스로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근사한 2014년이 될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오늘의 영감 - 알랭 드 보통의 표현이 비겁하게 얼어붙은 마음을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주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가 결정할 수 있다. 오늘날의 문제들을 보면 세상을 너무 밝게 보는 사람들 탓에 생긴 건 거의 없다."

 

 때때로,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지레 겁먹고 포기한 채, 적당함 이라는 현실 안주의 벽 속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하면서도 탁월한 결과를 얻기를 욕망하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포기하지 못한 채, 여전히 붙들고 있다면, 잠깐만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 이것이 많은 경우 성공과 실패를 갈라 놓습니다. 가능한 것을, 정말로 이루어 내려면, 당연히 삶에서 많은 부분을 간단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만히만 있어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만 있어도 여전히 세계는 흘러갑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어도, 여전히 세계는 흘러갑니다.

 

 "그래, 가능할지도 몰라!", "오늘에 최선을 걸어보겠어!", 그런 의미에서, 카르페 디엠 이라는 라틴어는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가 아니라, 어쩌면, 오늘 내가 가능한 최선까지 가보았는가? 라는 질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카르페 디엠에 대하여 "매 순간에게 멈춰라! 라고 말해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런 말들이 저를 다시 희망의 세계로 이끕니다. 쓸데 없는 것을 멈춰라, 재능을 탓하는 것을 멈춰라, 다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며, 할 수 있는데까지 노력해보라. 라고 격려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다면, 이번 한 해, 조금은 더 성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부디 힘내시길!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