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3월16일/가인과 아벨(창세기4: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3. 17. 01:09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3월 16일 주일 예배

가인과 아벨 (창세기4:1-)

오늘 저는 가인과 아벨, 아담의 두 아들에 관한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형제끼리 죽이고 하는 내용은 교육상으로도 좋지 않고 덕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이제까지는 의도적으로 무시해왔는데 이제 비로소 한번 이 주제를 다루어 보려고 생각합니다.

1.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비극적인 일의 발단으로 보이는 제사를 받는 문제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까요?
혹시 가인이 피흘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일까요?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새끼를 드렸다고 3,4절에 나와 있는데 과연 그래서 일까요?

한마디로 가인은 곡식으로 아벨은 양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곡식을 싫어 하셨을까요?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해입히신 하나님을 보면 뭔가 좀 그럴 듯도 하고.... 우리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명확하게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어렵습니다.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요?

2.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그래서 우리는 성경 원문의 모든 표현을 샅샅이 살펴본 결과 몇가지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란 표현입니다. 왜냐면 가인 편에는 ‘땅의 첫 소산과 그 실과’란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물을 묘사할 때는 단순히 “땅의 소산”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아벨의 제물을 소개할 때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성경이 무언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인이란 이름에는 ‘세우다, 건립하다, 얻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세운 자’ 혹은 ‘얻은 자’란 뜻입니다. 1절에 보면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나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당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이상 인간들과 함께 하시지 않을 거라는 상실감에 젖어 있었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언약의 실천이 계속되는 구나하는 확신과 기쁨으로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창세기1:28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가인의 탄생으로 그 명령이 기억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첫 아들은 비록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첫 아들에게 ‘땅을 정복’하는 임무를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농부가 된 것입니다.
‘농사하는 자’라는 성경의 표현은 해석하면 ‘땅을 다스리는 자’나 ‘땅에게 봉사하는 자’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업에서 나온 소산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타락 후 인간에게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셨습니다. 농부가 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다만 가인에게는 없는 표현인 “첫 새끼와 그 기름”이란 표현이 아벨에게는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가인의 제물은 ‘땅의 첫 번째 소산’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4:4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라고 되어 있는 말이 원문에는 ‘그의 양 첫 새끼들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들’이라고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바친 양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였다는 것입니다. ‘첫 새끼’란 말 속에는 ‘처음 난 것’이란 뜻도 있지만 ‘가장 뛰어난 것’이나 ‘우두머리’란 뜻도 있습니다.

게다가 ‘기름’이란 말에는 ‘지방’이란 뜻 외에도 ‘살지고, 기름지며, 아름다운’ 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3절과 4절에 각각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대해서 표현한 것을 보면 마치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서로 비교하기 쉽도록 표로 정리한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인의 제물은 정성이 부족했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자,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에”란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없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이 말을 직역하면 “그리고 날들의 끝으로부터 이 일이 있었다”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성경에서 주로 심판을 나타내는 문맥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지금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단순히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받고 받지 않고의 의미가 아니라 가인과 아벨이 그 동안 수고한 결과를 심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평가할 시간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가인과 아벨이 자기의 시험결과물을 가지고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제사의 의미가 아니라 시험의 순간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제물은 받으셨으나”와 “받지 아니하신지라”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말 성경의 표현은 ‘제물을 받고, 받지 않고’의 뜻 밖에 없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응시하다, 둘러보다란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셨다는 표현을 달리 해석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 개인과 더불어 그가 바친 제물을 가만히 살펴보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에 바쳐진 제물에도 중요성이 있지만 제물을 드리는 아벨 개인을 하나님은 먼저 주목하고 살펴보신 후에 아벨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을 행했다고 판단하여 아벨의 손을 들어 주신 것입니다.
결코 제물이 제물을 바치는 사람보다 더 우선시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4,가인과 그의 제물은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가 아니라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험의 때에 가인의 악함을 아시고 가인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악하게 보인 가인이 어떤 귀한 제물을 드려도 하나님의 눈에는 들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 자체를 맘에 들지 않아 하셨기 때문에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신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하셨지요. 이 말은 가인의 제물이 어째서 거부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라.

그겁니다.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기 위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직업을 선택한 가인은 그 행위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하고 결국은 죄성이 가인 자신을 집어 삼키는 일을 당하여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스스로 놋땅에 거하며 성을 쌓아서 유리하는 자의 저주에 맞서려 하지만 끊임없이 유리하는 어둠의 자식이 된 것입니다.
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죄성에 잡아 먹혀서 혹시라도 만나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서 하나님께 자기의 목숨을 구걸하는 두려움의 비참한 사람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가 어둠의 자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가인의 후예들이 세상의 문명을 이룩한 것을 담담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가인의 후예인 인간들, 사람의 아들들과 딸들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들까지 타락시켜서 거대한 홍수의 심판을 당하게 되고 맙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자가 된 것이지요.
아득한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요? 그래요.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으로 천년은 아득한 세월이지만 당시의 저들에게는 겨우 한 사람의 일생일 뿐인 짧은 순간이지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눈 아래 있습니다. 과연 아무개가 세상에서 내 뜻대로 내 명령을 지키며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피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끝에
우리를 살피실 때
우리가 내어놓은 제물보다 먼저 그 제물을 가지고 온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 제물을 받기도 하시며 거부하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지 못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답니다. 왜 엎드려 있겠습니까? 바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우리를 집어 삼켜서 죄의 종으로 만들려고 우리 집 문앞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선을 행하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끝에 주께서 우리를 살펴보실 때 착한 종이라 선한 종이라 잘하였도다하고 칭찬받는 종이 되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전적으로 믿으며 주가 주신 삶에서 기쁘게 선을 행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3월 16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설교를 생각해 보면서, 결코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종종 쓰시는 표현을 빌리자면, 잘못된 일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분노의 게이지가 점점 차오르다가, 마침내 가득 차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비교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는터라서, 사실 별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가인은 그 자신도 제사를 드렸단 말이지요. 가끔은 가인은 좀 억울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여하튼, 언제나 신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을 때, 저는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높은 기준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기독교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다라는 평가를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높은 기준을 좇아 살아가는 것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는 어느새 적당히 타협을 하고선, 가인처럼 사는게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일단 내가 가지고, 그 후에, 좀 덜 좋은 것, 필요없는 것은 남을 주고, 교회에 주고...... 등등, 그리고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예수님도 마찬가지겠지만, 가식적인 모습을 그렇게나 싫어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 뿐인 인생이 될까봐 저는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말로만 뭐든지 다 하는 모습이 되어가는 것을, 정말이지 반성하게 됩니다. 타인을 생각한는 것은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하나님은 물을 것입니다. 너는 이웃을 사랑했는가? 너의 배고픔은 그렇게 참지 못하면서, 이웃의 배고픔은 그렇게 쉽게 외면했는가? 라고 물을 것 같습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내가 가인과 다를 바가 대체 무언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되물었습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