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3월23일/홍수가 그치고(창세기8:1-9: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3. 24. 01:36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3월 23일 주일 예배

홍수가 그치고 (창세기8:1-9:1)

제가 요즘 창세기를 새롭게 해석하고, 보다 자세히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 왜냐면 제가 어딘가의 직장인들을 위한 성경교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인데요 지금 창세기편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하면서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창세기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계속해서 창세기만을 설교하지는 않겠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이미 노아의 홍수가 끝이 나고 이제 새롭게 인류가 이 땅에 퍼지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이 땅에 백오십일을 넘치면서 땅위의 모든 생물들은 죽어 버립니다. 물론 식물들은 살아 남지 않았을까합니다만 일단 사람과 짐승들이 사라진 땅에 이제 물이 서서히 줄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상당히 인상 깊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뭐가 인상 깊지요?
잘 보세요. “하나님이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 들었고”라는 구절에서 바람을 불게 하신분이 누구입니까? 그래요, 하나님 이시지요. 엘로힘.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바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바람.

바람이란 말은 ‘루아흐’ 즉 성령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보내신 바람이라. 뭔가 바람이기도 하지만 성령님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물론 여기서는 단순히 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바람을 보내신 것, 특히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생각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그 바람은 마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내 주신 성령의 역사를 연상시킵니다.
왜냐면 이제 오랜 방주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노아의 가족과 육축들을 이땅에 다시금 내려 보낼 준비를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1:2에 보면 “여호와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이 있지요. 바로 여기서 나온 ‘여호와의 신’이 ‘루아흐’, 즉 오늘 본문에서 ‘바람’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태초의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사역을 위하여 바람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고 계시는 모습이나 오늘 본문에서 홍수 후의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이 땅위의 물을 감하게 하려고 바람을 불고 계신 모습은 뭔가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노아의 홍수가 끝이 나는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실 정도로 죄악에 물든 부패한 인간들을 이 땅에서 쓸어버리시고 노아의 가족과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 절은 ‘언약의 여호와’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는 거대한 ‘권능의 하나님’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8:20에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라고 해서 언약의 하나님이란 용어의 여호와란 단어를 사용한 것과 대비 됩니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바람이 불어서 물이 감하였지만 온 지면을 뒤덮을 정도의 엄청난 물이 다시 증발만 했겠습니까? 그랬다가는 당장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다시금 비가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때 바람이 물을 말려서 증발시킨 것 뿐만 아니라 지면의 이리저리로 흩어서 물과 뭍을 나눈 것으로 봅니다. 마치 천지창조시와 같지요?

물론 첫 창조와는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극지방에 얼어 있는 거대한 빙산이지요. 강과 호수들, 그리고 바다로 물이 흩어지고 땅이 드러나며 바람으로 말라서 이제 마른 땅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이 방주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한 일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일입니다. 제물은 이미 방주에 탈 때부터 이때를 대비하여 하나님의 명령으로 넉넉히 준비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죄악에 찌든 인류를 멸하시고 새로운 인류와 언약을 체결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끝은 창조시의 아담에게 하신 말씀과 너무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자, 오늘 우리는 노아의 홍수 후와 창조시의 기사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로 제2의 창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서 번성하게 하신 것이므로 창조라는 말은 가당치는 않습니다만 인류는 마침내 물로 정화된 새롭게 깨끗한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법을 따를 것을 다짐하며 새롭게 역사를 시작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노아의 홍수가 얼마나 첫 창조와 비슷한가 하는게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왜 그렇게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지상의 인간들을 쓸어버리셨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향하여 번제를 드리며 언약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하며 충만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첫 아담에게 하셨던 약속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좋은 일입니까?

땅이 비록 말랐지만 수많은 부패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온 땅에 사체들이 흩어져 있다면 사람과 짐승의 시체가 썩는 냄세로 사람이 살 수 없겠지요. 그래서 바람으로 물을 이리저리로 보내시면서 시체들을 특정한 곳으로 흘려보낸 건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과 짐승의 시체가 썩어서 석유가 되었고 식물이 썩어서 석탄이 되었다고 하는데 제가 그쪽으로는 잘 몰라서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네요.

여하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너무 끔찍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8:21뒷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불편한 속내가 엿보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시금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신 이유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도 아니고 지금 살아 남은 노아의 가족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도 아니라 단지 사람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이미 죄악에 오염되어서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사람 때문에 죄없는 자연을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굳이 물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얼마든지 인류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핵폭탄들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부산과 울산 옆에 뭐가 있습니까? 원자력 발전소가 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우선 편하고 싸게 먹힌다고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될 지를 몰라서 지금 전전긍긍입니다. 수명 30년짜리 원전의 수명을 아무리 연장해도 결코 백년 이백년 사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원자로의 핵융합을 막을 수도 없다면서요. 이게 뭡니까? 불을 붙일 수는 있어도 꺼뜨릴 수는 없다니.

그러니까 전쟁으로 핵폭탄이 터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핵으로 사람들은 멸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그 끔찍한 고리 원전의 바로 옆에 살고 있습니다. 저 산굽이만 돌면 임랑 해수욕장이 나오고 그 바닷가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아찔하지요.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더 이상은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기뻐했는데요 바로 그 다음에 의미심장한 말이 나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이 말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땅이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땅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더 끔찍합니다. 날지 못하는 인간들이 땅이 사라지면 허공에서 어떻게 살아 갈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인간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새롭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요 인간은 생육해서 번성해지면 항상 사고를 칩니다.
우리 인간들의 힘만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인간을 살피지 못하게 몰래 범죄를 저지르며 하나님의 품에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최후의 심판도 예비하신 것입니다.

천지 창조의 그 장엄한 순간으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서 인류는 범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나아가서 형제를 죽이며 하나님을 속이려 하고 반항하려 합니다. 마침내 인간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여 흘러 넘치는 지경에 까지 흐르는 것을 보셨습니다.
6:5 이후에 보면 “사람의 죄악이 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하나님을 일러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그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용서만 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정하신 분량이 찰 때까지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이라 불릴 뿐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우리에게 죄악에서 돌이킬 충분한 기회를 주십니다. 첫 아담의 범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홍수 심판을 준비하시고는 인간들에게 죄악에서 돌이킬 120년의 기간도 동시에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참 착한 나의 백성들이구나!’하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온 세상이 다 범죄해도 나만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뉴스를 보기가 두렵습니다. 온갖 불의와 부정과 억울함에 관한 기사들만 잔뜩 있습니다. 이 땅에서만 하루에도 수십명 씩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힘들어서 목숨을 끊은 이들의 피값이 땅에서부터 하늘에 호소합니다. 그래도 이 땅이 보존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착한 행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앞둔 유예기간입니다.

‘이제 그만 나쁜 짓을 하고 나에게로 돌아오너라’고 지금도 애타게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예배당 안에만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이들이 모인 곳은 그 곳이 아무리 화려하고, 그 사람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수천억, 수백억짜리 예배당이 나타내는 것은 그 교회가 얼마나 부유한가이지 그 교회가 얼마나 성령이 충만하며 얼마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곳인가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이전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행위를 돌이켜 하나님의 법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것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사람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뇌물을 받아 판결을 굽히지 않습니다. 사람을 무고하여 억울하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나의 배를 불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나의 것으로 남을 돕습니다.

힘이 있다면 힘으로
물질이 있다면 물질로
지혜가 있다면 지혜로 하나님이 만드신 나의 형제를 돕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다 억울하다’ 하는데 나만이 잘 살 수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빈사상태에 빠져있는데 나만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온갖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와 어려움과 원망과 불의에 귀닫고 이태리산 대리석과 붉은 카페트를 밟고 서서 파이프 오르간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이 과연 하나님에게 상달 될 수 있을까요?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자 하나님은 저들을 홍수로 심판하셨고 온 땅에 죄악이 관영하여 저들의 피값이 땅에서 호소하자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멸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옵시다. 하나님의 법대로 삽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웃을 돌아 봅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를 밝고 건전하며 웃음 지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를 힘씁시다. 이것이 우리에게 심판의 유예기간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끔찍한 멸망의 심판에서 살아남는 길이 될 것이며 이 나라를 계속해서 보존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보시고 그만하면 되었다고 하시며 복을 주실때까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를 힘써 행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3월 2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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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목사님은 우스갯소리를 보태어, 영화 노아의 광고를 인터넷에서 보고, 노아 이야기를 설교로 준비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정말이지 감동적인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제 마음을 사로 잡는 대목은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것" 언제 우리가 억울한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할 때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있겠지요. 저 역시 약속을 제대로 못 지킬 때가 하도 많은터라, 정말이지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늘상 목사님이 십년 넘게 강조하는 대목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기피하면, 그 능력도 사라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이야기를 자주 하십니다. 예를 들면, 복을 받아서 넉넉한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부를 오직 자신이 배불리 먹는데만 사용한다면, 그 부는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반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베푸는 사람에게는 점점 더 많은 일들이 다가온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작년 미국 아마존 베스트셀러였던 기브앤테이크 라는 책에서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려운 순간을 함께 하고 도와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순간이 될 수 있다... 라는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서 있는게 아닐까요.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함께, 타인의 인생도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내 코가 석자겠지요. 나 하나 겨우겨우 살아가기에도 너무나 벅차고 자꾸만 힘이 들테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해서 선한 일들을, 멋진 일들을 해나갈 수 있다면, 주님께서 분명 잊지 않고 다시 채워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