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일제의 식민통치 1부 - 1910년대 무단통치의 특징

시북(허지수) 2014. 7. 3. 01:38

 일제강점기, 나아가 현대사 이야기. 저는 잘쓰기 보다는, 다만 성실하게 써내려갈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강의를 잘 반사할 수 있도록 다시 노력해 봅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께는 정말 고맙습니다.

 

 1910년대의 모습으로 출발해 볼까요? 1910년대의 일제 정책을 "무단통치"라고 부릅니다. 풀어쓰면, 무력에 의한 통치라는 뜻이에요. 힘으로 조선을 찍어누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일본은 지금 대한제국이라는 한 국가를 완전히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조선이 가만히 있었던가요? 항일무장투쟁을 펼치기도 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고, 끝까지 이럴 수 없다고 분노하던 선조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펼쳐지고 있기에, 일제는 일단 최대한 강경하게 눌러버리자 라고, 1910년대 무단통치를 채택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구체적인 모습들을 이제 살펴봅니다. 1910년대가 되면, 총독이 조선에 파견되는데요. 앗, 그런데 이 총독이 무관(군인)출신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네, 그야말로 힘에 의한 통치를 해야 한다고 보여주는거지요. 또한 당시에 자문기구로 중추원을 두고 있었습니다. 중추원에서는 조선의 민족반역자들, 친일파들을 꾸준히 회유하고 모아서 통치의 자문을 얻곤 했습니다. 뭐, 실제로 작동되는 것은 명분만 자문기구일 뿐, 그야말로 친일파들을 모아놓아서 한 자리씩 주는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고요. 노골적으로 친일파들을 대우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하겠습니다.

 

 참, 중추원이라는 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독립협회를 다룬 문서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중추원은 국회 기능과 비슷합니다. 즉 의회를 구성해서, 의사결정을 해보겠다는 순기능이 분명히 있을테고요. 그렇다면, 과연 무단통치 시기의 중추원이 제대로 된 의회를 구성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럴 땐, 중추원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겠죠? 친일파들을 모아놓았으니, 중추원은 실제로는 "장식용"인 셈이고, 별달리 의미있는 기능을 할 수 없었습니다.

 

 1910년대는 헌병 경찰이 등장 합니다. 특히 중요한 대목인데, 물론 친절하게 천천히 설명할께요. 단어의 의미부터 볼까요? 헌병은, 군인들이 잘못을 했을 때, 조사하거나 관리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고요. 경찰은, 민간인들 (우리같이 일반 사람들이) 급한 경우에 도움을 요청하면 와서 조사하거나 일을 처리해주잖아요. 다시 말해, 헌병은 군인대상, 경찰은 일반인대상 으로 일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따라서 경찰은 때에 따라선 얼마든지 친절할 수 있다지만, 헌병은 엄격하고 통제적인 느낌을 곧바로 받을 수 있습니다.

 

 자, 이야기로 돌아와, 헌병 경찰은 그러면 무슨 의미일까요? 헌병이 경찰 업무까지 같이 보겠다는 말이에요. 엄격한 헌병 경찰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을 철저하게 지켜보겠다는 일본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헌병 경찰은 태형령이라고 해서, 조선인을 몽둥이로 때릴 수도 있었습니다. 까불면 바로 때리고 패겠다는 거에요.

 

 식민지가 되면 왜 나쁜지, 무엇이 나쁜지, 함께 생각해 보기에 좋은 주제이기도 합니다. 지난 문서에서 우리는, 1910~1925년까지 일본은 민주주의 발달기 (다이쇼 데모크라시) 라고 배경을 살펴봤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는 함부로 태형령을 내리고, 경찰이 사람을 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식민지인 조선은, 그대로 힘으로 찍어누르면서 무단통치를 하고 있으니깐, 조선인들은 헌병 경찰이 와서 너 인마 하면서 때려패는 거에요.

 

 이 상황을 두 글자로 줄이면? "차별" 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권을 무시하고, 대놓고 조선인들을 인간 이하로 다루는 모습. 일제강점기 첫 번째 문서부터 만나볼 수 있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무단통치의 전형적인 모습이 감이 오지요? 총독도 군인 출신에, 친일파들로 자문기구 만들어 놓았고, 헌병 경찰이 조선인들에게만 태형 때리는 장면. 이것이 1910년대 망국의 조선이 받아야만 했던 치욕입니다. 나라 잃는다는게 슬프고 참혹한 일이에요.

 

 덧붙여, 헌병 경찰은 즉결처분권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식으로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일처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씁쓸한 블랙 유머지만, 당시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기가 자꾸만 울음을 터뜨리자, 곶감 줄께 울지마~ 라고 달래봅니다. 하지만 시크한 아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곶감도 무시한 채 계속 울기만 하네요. 이 때, 헌병 지나가! 순사 지나가! 라고 말하면, 울던 아기 조차 뚝 하고 곧장 울음을 멈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무단통치는 무서웠던 거에요. 헌병 경찰의 위압적이고 살벌한 태도. 이러한 공포 분위기의 사회야 말로, 1910년대의 풍경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구한말 때부터 내려오던 4대 악법들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4대악법?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나는가요? 근대문화사 정리할 때 잠깐 했지만, 물론 기억 안 나도 괜찮아요. 뭐, 꾸준히 무한 반복하다보면, 분명 익숙해 질꺼에요. 보안법, 출판법, 신문지법, 사립학교령이 있습니다. 이런 악법들이 뭘 막고 있는걸까요?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이런 중요한 자유들을 모두 막고, 탄압해 버리는 법들입니다. 정말 숨이 막히는 느낌이네요.

 

 무단통치시기, 마지막으로 "칼 찬 교사"의 모습이 있습니다. 쌤이 제복을 딱 차려 입고, 칼을 차고 학생들 앞에 서 있는거에요. 무시무시 하겠죠? 뭐라고요? 하하. 개콘에 나올 것 같다고요? 아이구, 우리가 그만큼 평화롭게 살고 있는거에요. 잠깐동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요. 헌병 경찰이 사람을 감시하고 때려패는 시대였고, 그런 차별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칼 찬 일본인 교사가 수업을 한다는 것은, 교육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어린 아이들의 가슴 속에 어떤 흔적이 남을까요? "일본에 대한 두려움"이 뇌리에 딱 하고 박히는 거에요. 일본사람을 건들다간 칼 맞는다라는 공포가, 교육 현장에서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세뇌시키는 작업이란,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일본은 위대하다, 일본은 두려운 존재다, 복종만이 매맞지 않는다. 그렇게 배워온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독립투사로 커갈 수 있단 말인가요. 그죠?

 

 1910년대의 조선.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렇지 않을까요. 쓸쓸한 바람과 적막한 분위기. 사람들이 말도 함부로 못하고, 어디론가 숨고 위축된 상태로 살아가야만 하는 풍경. 또한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친일파가 되어가는 장면들. 그러므로, 나라 없는 장면이란, 이토록 끔찍하고, 정의가 저 멀리 실종되어서,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비극적인 풍경이라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무단통치를 살펴보았고요. 잠깐만 끊고, 이어지는 2부에서 1920년대의 이야기를 계속 살펴봅시다. 아픈 역사지만, 잘 기억해서 되풀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이야기들이네요.

 

 오늘의 영감 - 인간에게 제일 위험한 것 중에 하나가 있다면, 저는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서, "어차피 난..." 이라고 절망하여, 미래를 비관적으로 인식해 버린다면 곤란합니다.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행복을 찾아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짧은 한 줄입니다.

 

 "넌 안돼 라는 말을 어느 누가 하더라도 듣지 말아라."

 

 우리가 어려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버텨나가며, 살아갈 열정을 붙들고 한 번 더 힘을 내본다면, 세계는 그렇게 희망을 품에 안은 사람들 때문에 밝아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