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벧엘로 올라가자(창세기35:1-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8. 31. 07:11

 

벧엘로 올라가자 (창세기35:1-7)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몸은 이 세상과 함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세상사람들과 더불어 거래하고 교류하며 세상의 법과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세상의 풍습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도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완벽하게 성스러운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거룩해 가는 중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성화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거룩해 질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죄없이 깨끗한 몸이 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 도중에 더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세상에서 저지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에서 마음껏 위로받고 새로운 힘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하나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참으로 필요하지요.

 

더구나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에 우리에게 결단의 시기가 필요합니다. 적당히 세상에 한발 하나님께 한발 걸치고 그렇게 사는 것에서 나아가 하나님께 한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편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자녀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참으로 거룩한 무리 성도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위기의 순간이나 정말 중요한 문제가 닥치기 전에는 그렇게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벧엘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아등바등하느라 그런 하나님과 만날 장소에 갈 시간이 없어요.

 

그럼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곳에서 결단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그럴 수 있습니다. 어디서나 하나님께 집중하고 기도하며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 속에 있을 동안 주위와 격리하고 하나님에게 집중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쟎아요. 우리는 세상 속에서 맡고 있는 여러 가지 타이틀이 있습니다. 회사의 직원, 가정의 가장, 교회의 직분. 집에 황금을 쌓아 놓지 않은 다음에야 생활인으로서 맡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시간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결단하려고 할 때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우리가 반드시 결단해야 하고 우리네 삶속에서 하나님과만 대화하며 그에게만 집중할 곳도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결코 빵만으로는 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말씀 역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을 함께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1.디나가 성폭행을 당하다
야곱이 그렇게나 두려워하며 걱정하던 에서와의 문제가 잘 풀리고 무사히 가나안에 정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의 무리들은 이제 세겜 성의 앞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는 비교적 초목이 많고 물이 풍부해서 유목민들에게는 상당히 좋은 지역이었고 그 세겜 사람들은 야곱에게 친절했습니다.
모든 문제가 잘 풀려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감이 풀려버렸을까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내의 여자들을 구경하러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세겜성의 추장에게 납치를 당해서 그만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야곱은 자기 부족이 세겜의 문화에 동화될까봐서 성내로 들어가지 않고 성밖의 들판에 장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만 디나가 성내로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이 디나를 겁탈한 뒤에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청혼을 하게 된 것은 세겜이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냥 너무 예뻐서 이름도 묻지 않고 납치해서 성폭행을 했는데 하고 보니까 자기의 부족민이 아니라 성밖의 유력부족장인 야곱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동했던 것입니다.

 

세겜은 자기 부족민의 딸은 묻지 않고 취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독재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도덕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성적인 타락과 인명에 대한 경시.

 

아무개의 딸이겠거니 하고 그냥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취했는데 알고 보니 이 여자가 야곱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일족의 족장일 뿐만 아니라 인근에 이삭과 에서라고 하는 대족장의 아들이요 동생입니다. 야곱의 딸을 손에 넣으면 야곱의 세력을 손에 넣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세겜은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곱의 딸과 결혼하려고 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알고 청혼한 것은 아니지만 일이 공교롭게 된 것입니다. 세겜은 이일이 자기에게 주어진 큰 복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이 납치되어 욕을 당한 것을 알고는 세겜성의 추장인 세겜을 죽일 뿐만 아니라 세겜성의 모든 것을 진멸하고 처자를 노예로 삼고 가축과 곡식과 재물을 약탈할 악랄한 계획을 세우고
거짓으로 ‘너희가 할례를 받으면 우리가 너희가 함께 하겠다’고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겁니다.

 

사실 성경의 기본 원리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설마 여러분에게 그런 정도를 요구하겠습니까? 만일 오늘날같이 악한 세상에서 그런 원리를 실천하려 했다가는 신자들은 하루도 안돼서 만신창이가 되고 말겁니다.
그러나 보복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상대적으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겜이 잘못했는데 그 주민들이 무슨 죄입니까?

 

한사람의 죄로 성내의 모든 이들이 죽고 노예가 된다면 너무 끔찍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목민들에게 이런 식의 보복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하게 양이나 치고 있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약탈하고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특별히 악해서라기보다는 당시의 풍습에 젖어 있어서 이러한 악행이 전혀 과하게 여겨지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여하튼 이 할례를 받게 되면 엄청나게 아프고 거동이 불편해 집니다. 보통은 삼일째에 그 고통이 가장 심해진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거짓말에 속은 세겜과 그 주민들이 할례를 받고 한참 고통스러워 앓고 있을 때 디나와 같은 엄마를 둔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서 세겜성을 기습합니다. 그리고는 건장한 남자들은 학살을 하고 다른 이들은 노예로 잡아버립니다. 또 야곱의 남은 아들들과 종들이 뒤이어 약탈에 가담합니다. 이들은 디나를 구해내었지만 동시에 세겜성을 약탈해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마 이 정도로 세겜성을 도륙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을 때 시므온과 레위에게 저주를 합니다. ‘형제들 가운데 흩어져라.’ 야곱은 은근히 뒤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는 잘 까먹어도 원한은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이지요. 보통 사람입니다.

 

2.하나님의 이름을 악한 일에 사용하지 말라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벌하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서 상대방을 속이는데 이 할례를 이용합니다.

 

물론 할례의 의미가 당시에 꼭 히브리인이 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 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이미 할례가 어느 정도는 중동 지역에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할례가 보편화된 관습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겜 사람들은 ‘까짓거 한번 해주지 뭐’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왜 세겜 사람들이 전부 할례를 받으면서 까지 야곱의 일족과 함께하려고 했느냐면 야곱의 재력을 노리고 한 것입니다.

 

세겜성은 가나안에서 비교적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지역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세겜성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겜사람들은 야곱의 일파가 완전히 자기의 부족민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과 재산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할례한번 받고 재산과 사람을 취한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야곱의 재물이 다 자기 것이 될 것이라고 선동하는 구절이 나오쟎아요.
34:23“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이 말이 그럴듯했기 때문에 세겜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겜은 자기 개인적인 정욕을 충복시키기 위해 또 자기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주민들을 회유하려 했고 주민들은 야곱의 재물이 탐나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야곱이나 세겜이나 세겜의 주민들이 모두 악당입니다. 서로 인간적인 이해관계와 정욕대로 행동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법은 아무런 실제적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하나님의 법은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이런 악당들이 악한 의도로 하는 할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가 있는 할례를 이런 더러운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저들을 진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의도로 사용하기 위해 할례를 받은 이들은 모두 죽었고 처자와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할례를 하라고 속인 자들은 재물은 모았지만 멸족의 위기 앞에서 거주지를 떠나 벧엘로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됩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야곱은 그렇게나 미적대며 가지 않던 벧엘로 올라갑니다. 벧엘은 해발 800미터가 넘는 고지대로 자기들이 살고 있던 세겜보다 몇백 미터나 높은 지역입니다. 비옥한 들판이 아니라 점점 산으로 산으로 올라 갑니다.

 

3.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은 이때까지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요. 제일 처음에는 아버지를 속였다가 하란으로 도망한 사건이 있었고 두 번째는 외삼촌에게 잡혀서 죽을 뻔한 위기가 있었고 세 번째는 형 에서에게 잡혀서 죽을 뻔한 위기가 있었고 이제 주위의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잡혀 죽을 뻔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은 실로 위기의 연속인데도 자그마한 평화가 오면 어김없이 하나님을 잊고 세상과 짝하다가 위기를 당하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딱 현대인의 전형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요즘 우리들하고 닮았는지...
야곱은 말년에 돈 욕심이 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죽으면 이 재물이 무슨 소용이냐!’이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의 재물을 끌고 오자 그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라고 꾸짖습니다.

 

웬일이지요? 야곱이 아들을 꾸짖다니.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고 신앙인의 자세로 바뀐 것일까요?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말로 우리는 야곱의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러니까 내가 지금 수가 적어서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너희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도덕적으로 너무 잔인하다거나 ‘하나님 앞에서 좀 심하지 않니?’와 같은 이유가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가나안 원주민하고 싸우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약센데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느냐고 야단을 친 겁니다.

 

만일 내가 수가 많고 세력이 크면 얼마든지 이런 식으로 정복하고 빼앗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엿보입니다. 사람의 천성이 결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위기가 닥쳐오면 정신없이 하나님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번 한번만 살려 주시면 제가 어떻게 하고 뭘 드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하고........하면서 뉘우치며 새사람이 되는 듯 하지만 그 위기가 지나가고 나면 또 마찬가집니다. 그러면서 가는게 인생인가 봅니다. 야곱의 일생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집니다. 야곱하고 비슷합니다.

 

4.서원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35장에 보면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야곱이 그 옛날 형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가다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야곱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그랬는데 과연 하나님은 야곱을 기억하시고 그로 하여금 평안히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약속을 이행하셨지만 야곱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지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너 왜 약속 안지켜, 나는 약속을 지켰다. 너도 빨리 약속을 지켜”
우리는 그렇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온갖 것을 약속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한번만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뭐도 하고 뭐도 하고 ... 그러나 위기가 지나가고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싹 바뀝니다.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그 약속을 지키라고 촉구하십니다.

 

물론 본문에서 야곱이 약속을 안 지켰다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불행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기는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다시금 위기의 순간을 맞고서야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할 마음이 생긴 겁니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지 무려 십 몇년만에 위기를 당하고서야 비로소 야곱은 자기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난 다음 무려 삼십 몇년이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야곱은 자기의 약속을 지키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너무 늦게야 알게 된 것이지요. 너무 늦게야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너무 늦습니다. 인생을 허비하고 마지막에 알게 되다니요?
혹시라도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그러 일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 일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약속을 이행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무 늦어서 파국이 오기 전에 그 약속을, 서원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5.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주변의 상황이 자기들이 계속해서 세겜에서 거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으로 변해가자 마침내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야곱은 위기의 상황에 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벧엘로 올라갈 것을 다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십여년 전에 얍복강가에서 야곱에게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너를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에서 그는 야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본문에도 역시 그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곱이라 불립니다. 그는 실로 이스라엘로 불릴 만큼 신앙으로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과 더불어 피곤한 싸움을 세상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 합니다. 그의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더 이상은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삼십여년 전에 네가 한 서원의 약속을 이행하라고 하십니다. 야곱은 적당히 세상 속에서 살기를 원했지만 여건이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공격으로 그와 그 집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게되자 그는 비로소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 속에 있는 이교적 요소를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드라빔부터 여러 가지 점치는 도구들을 장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귀걸이는 점치는 도구입니다. 두쌍의 고리를 던져서 점을 치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야곱의 무리에는 야곱과 그 자식들만 있는게 아닙니다. 얼마 전에 세겜성에서 잡아온 여자와 아이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부족민들은 가나안의 이교적 풍습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가나안 거민들과 분리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려고 사는 곳까지 분리했지만 결국 이들은 살고 있는 환경의 영향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한 저들이 벧엘로 올라가봐야 헛수고입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 놀랍게 변화했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자기 할아버지의 하나님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불렀지 결코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하면서 그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하나님이 과연 내 가족의 하나님, 내 부모의 하나님, 내 할아버지 할머니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나의 일생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위기의 순간만 모면하려고 임시방편으로 하나님을 찾지 말고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그런 이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일생에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과연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로 하자 하나님은 세겜인근의 부족들에게 두려움을 주셔서 야곱이 위기에서 벗어나 벧엘에서 거하며 하나님께 단을 쌓을 수 있었고 결국 야곱은 강성한 일족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벧엘로 올라갑시다.
벧엘에서 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나의 하나님, 그 옛날 내가 고독하고 의지할이 없어 어려울 때 나와 함께 하신 내 일생의 보호와 인도가 되신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에 어려움은 있었을지라도 그래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된 것입니다.

 

적당히 세상과 벗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렇게 보내지 말고 하나님의 편에 확실히 서서 세상과 싸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위기의 순간에 함께하시며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하나님과 한편인 믿음의 용사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8월 31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긴 세월 후에야, 비로소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세월이 아깝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의미에서, 젊은 날 기독교인이 되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기쁨입니다.

 

다만 성실할 수 있기를, 다만 겸손할 수 있기를, 오늘 하루도 기도부터 하게 됩니다. 2014. 가을날.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