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사도행전1:15-2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9. 7. 06:06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사도행전1:15-26)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뭐냐면 “나 아니면 안돼” 또는 “나만이 그것을 할 수 있어”
어떻게 보면 영웅들의 독백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보통은 영웅이 아니라 교만한 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글쎄요, 교회의 일 중에서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만한 일이 있을까요?
잘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척교회들이 성장하다가 시련을 겪는 일이 바로 사람의 문제입니다. 직분자를 세우는 문제로 개척교회들은 부침을 겪습니다. 내가 직분을 맡지 못했다고 억울하고 분해서 나와 친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버립니다. 특히 장로를 뽑는 문제로 시험을 겪는 교회를 제가 여러 군데를 보았습니다.

 

‘내가 여기 아니면 갈데가 없나?’ 그리고는 다른 교회로 옮겨버립니다. 물론 이런분들은 보통 세상적으로 잘난 분들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도 환영받습니다. 돈있겠다 세상지위도 있겠다. 건강 있겠다. 그리고 신앙도 좋겠다. 뭐 어느한 곳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알아 주지를 않습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교회에 남아 있을 거냐?’ 그리고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면 떠난 사람도 힘들지만 남아 있는 성도들도 힘듭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그가 떠났구나!’ 그런 죄책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차피 교회는 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여기나 저기나 같은 교회겠습니다만 이런 분들은 큰 교회에서는 잘 떠나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에서는 잘 떠나지만 큰교회에서는 오히려 내가 더 노력해야지 하면서 다음 기회를 겸손한 자세로 노립니다. 그러니까 다음 선거가 있을 때까지 더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각종 대소집회에 참석합니다. 헌금도 잘하고 이름이 날 만한 일은 찾아 다니며 합니다. 표를 얻기위해서.

 

결과적으로 큰 교회는 이런 일들로 인해 시험이 드는 것이 아니라 더 잘됩니다. 큰교회라는 브랜드가 가진 힘일까요?

직분자를 뽑는 선거에서 떨어진 이들은 목사가 특별히 자기를 미워해서 떨어뜨리려고 운동한 일이 없음에도 목사를 원망합니다. 알아서 뒤에서 밀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동료 교인들을 미워합니다. 나같이 잘난 사람을 알아 주지 않고 내 눈에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아무개를 밀어 줬다는 거지요.

 

초대교회에서 가장 큰 직위는 사도직입니다. 이 사도는, 특히 주님을 따라다닌 12사도의 수에 드는 것은 기독교회사상 가장 영예로운 자리입니다. 주께서 더 이상의 사도를 뽑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하늘로 승천하셔서 지상에서 그의 권능을 대신할 사도를 임명할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적에게 넘겨주며 주를 배신한 가룟 유다의 수를 채워야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가룟유다는 주님을 배신하고 그 죄책감으로 자살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제자가 11제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룟유다는 특별히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매우 똑똑하고 셈에 밝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단에서 연보궤를 맡고 있는 사람으로 요즘말로 하면 회계인 셈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비공식적으로 수제자처럼 설치는 베드로를 제외하고 아마 제일 중직자일 것 같습니다. 주님의 제자단에는 회계를 제외하고는 알려진 공식적인 임원이 없습니다.

 

그런 중책을 맡았던 유다고 세상적으로 타락하고 주님을 배신한 다음 자살해버렸습니다. 그냥 11명으로 계속가면 안됩니까?
그래요, 특별히 의미가 없는 숫자라면 다른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12는 무지 무지 중요한 숫자입니다. 12는 바로 하나님의 수 3과 인간의 수 4를 곱한 것으로 완전수 또는 무한의 수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12지파로 불렀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의 아들은 12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지파 대신에 요셉의 아들, 즉 이스라엘의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13지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를 계속해서 12지파로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레위지파에게 땅을 주지 않고 나머지로 12지파를 삼았다면 요한계시록에는 단지파의 이름을 빼고 12지파를 만들었습니다.

 

이삭의 형인 이스마엘 역시 12방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축복도 역시 12가 됩니다. 심지어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약의 12지파의 족장과 신약의 12장로(사도)를 합하여 24장로가 됩니다. 그러니 11명으로 줄어든 사도의 숫자에 한명을 더해야 합니다. 그래서 12를 채워야지요.


1.한 일백이십명이나
요즘 성경책에는 ‘약 백이십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굳이 정확하지도 않은 숫자를 추정치로 적어논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지도자가 열명의 성인남성을 지도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회당의 기준도 성인 남성 열명입니다. 그래서 120명의 회중을 지도하기에는 적어도 12명의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지도자가 열명을 지도하는 것은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요즘 군대의 분대 편제가 9명입니다. 분대는 아시다시피 군대 편제의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이런식으로 나가는데 가장 작은 단위인 셈입니다. 이 정도를 넘어서면 개인 대 개인으로 지도하기가 어려워 진다고 합니다.

 

백이십명이 교회의 인원으로는 별로 많은 것처럼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이러한 숫자는 처음 13,4절에 기록된 숫자들보다 대여섯배가 많아진 것입니다. 13,4절에는 예수의 사도들과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이 나와 있는데 이들을 합하면 약20명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12제자에서 시작하여 여인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가담하여 20여명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두배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 되지 않아서 120명으로 나오고 결국에는 오늘날 세계의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품이 나올만큼 적게 보이던 그들은 한번씩 폭발적인 성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적게 보이는 이 숫자는 사실상 급속하게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숫자가 성령을 받고 삼천 오천을 넘어서 나중에 약 2만명의 거대 공동체로 커나갑니다.
그런데 120명의 교인들을 기록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의 결원을 보충하는 일이지만 사도들끼리 의논하지 않고 전체 공회에서 처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중대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교회전체 즉 공동의회에서 처리하게 하려는 선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밀실에서 소위 중직자들끼리만 의논하고 처리한다면 틀림없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혹은 불만있는 자들도 생기고 이로써 교회가 분열될 수 있습니다.
간단하거나 일상적인 업무가 아니라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비일상적일 때 교회 전체의 의사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목사와 장로가 모인 당회가 아니라 모든 세례교인들이 참여하는 공동의회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2.그때에 베드로가 일어서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의 결원을 보충하려한 때가 기도하고 있던 때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지혜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부족하기 때문에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동안에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가 일어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중요한 안건을 발의하기위해 일어 섰습니다. 베드로는 물론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 수제자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초대 로마교황이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총대주교(교황)는 로마제국내에 무려 다섯명이나 있었습니다.

 

로마와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지금처럼 로마 교황이 전 카톨릭 교도를 다스리는 체제가 아닙니다. 다섯명의 총대주교는 스스로 다른 총대주교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면 다섯 개의 도시는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기는 했지만 이후에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뒤이어 서열2위로 나옵니다. 게다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교제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방인과의 교제를 끊은 일로 바울의 책망을 받기도 했고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역시 교회의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잘 해결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다른 모든 이를 압도하는 교황과 같은 권위를 가져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동역자들 중의 리더십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가 된 순서대로 수석장로를 만들어서 그가 은퇴할 때까지 교회를 좌지우지하게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당연직인 담임목사인 당회장과 매년 선출되는 당회 서기가 그 일을 담당하도록 하고 특정 개인이 장기적으로 교회를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요즘 가만히 보면 교회 장로들은 스스로를 회사의 이사처럼 여기거나 아니면 국회의원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를 기업의 월급쟁이 사장, 좋은 말로 ceo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장로들이 자기들이 교회의 주인인양 여기고 또 목사를 언제든지 쫓아 낼 수 있고 자기들이 누구나 고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교회를 치리감독하게 사자를 파견하신 주님의 감독을 거부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라고 해도 마음대로 교회의 중요한 일을 좌지우지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이들이 맡은 바 직무에 있어 직능상의 차이는 있지만 결코 높고 낮음이나 귀하고 천함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중직자란 말도 쓰지 말 것을 주장하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서서 하는 첫말이 ‘형제들아’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나 ‘교인들’이 아니고 ‘형제들아’입니다. 베드로는 스스로를 다른 사도들과 동등되다고 여겼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가령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잘못을 한 이들을 책망하고 치리할 때 만일 목사나 장로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다른 이들이 그 죄를 책망하고 치리해야 합니다. 전체의 중의를 물어서 치리할 것이며 책망할 것입니다. 결코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권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하지 말라고 한 일을 한 이들을 책망하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한 자는 하나님이 말씀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가 잘못을 했다면 책망을 달게 받아야 하며 잘못이 아니라 누명을 썼다면 기도하고 공회 앞에 자기의 견해를 밝힐 것입니다.

 

3.성경이 응하였으니
베드로가 일어서서 가룟 유다의 배신이 성경에 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배신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며 우리가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기도로 시작해야 하지만 성경을 지침으로 삼아 이를 따라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주옥같은 말이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상황논리가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로 교회의 원칙을 삼아야 합니다.
왜냐면 성경은 저자는 달라도 모두 성령의 말씀으로 성령은 인간저자를 이용하여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모두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일을 성경에서 시키는 대로 할 것입니다.

 

4.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우리가 교회의 직분자를 뽑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출되는 직분자는 결코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며 봉사하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17절에 ‘직무’라고 할 때 이 말의 원뜻은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사도의 직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로 선출되는 것은 섬기려 함이고 봉사하려 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장로나 권사, 집사 역시 섬기려 하고 봉사하게 하기위해 뽑는 것입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자는 결코 잘난체 하거나 사람들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곳에서 교회의 직분자들은 군림하려하고 섬김을 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항상 말썽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한 부분을 맡았던’ 이란 말에서 ‘맡았던’ 이란 말의 원뜻은 ‘일반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 제비를 뽑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어떤 직무를 맡기기 위해 사람을 뽑을 때 성경에서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란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합동 교단에서는 총회장을 제비뽑기로 선출합니다. 미리 추천받아 압축한 두 후보를 놓고 제비를 뽑아서 일꾼을 선택하는 방법은 가장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합동교단에서 이런 식으로 총회장을 뽑게 된 것은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어서가 아니라 선거에 너무나 많은 부정과 폐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권과 음모가 난무하는 선거판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제비뽑기를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민주주의 정체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일꾼들을 뽑을 때 투표를 하는 행위 즉 선거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방법이 바로 제비뽑기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제비뽑기로 된 사람이 적격자가 아닐 확률이 높다고요? 그래서 미리 이배수로 압축한 후에 선택하는 방법이 사용되었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 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직무의 한부분을 맡았던’ 이란 말에서 우리는 그가 이 봉사에서 자신의 몫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직무를 맡은 사람은 혼자서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한몫을 담당한다는 생각으로 직무에 임해야 합니다.

 

‘내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수 없어’라는 교만한 생각이나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직무에 임한다면 의도치 않는 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며 사탄의 시험에 잘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항상 동역자보다 내가 더 나은 것은 아니며 저들과 더불어 섬기는 일에 한몫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자기가 제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해서 자기가 맡은 연보궤에서 돈을 조금씩 훔쳐서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으로 나옵니다. 아마 그는 이런식의 횡령이 들통나지 않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무식한 동료들이 어떻게 자기같이 똑똑한 사람의 회계부정을 눈치 채겠느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5.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와 함께
21절과 22절에 보면 새롭게 충원할 사도의 자격에 관한 말이 나옵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그래놓고 맛디아와 요셉을 추천합니다. 이 말은 요셉과 맛디아가 12제자와 마찬가지로 요한의 세례때부터 주님과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사람의 이름을 여기서 처음으로 접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요, 요셉이나 맛디아는 주님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음에도 그 이름이 이때까지 성경책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코 주를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단에서 회계를 맡았던 매우 똑똑하고 임원직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배반하고 주를 팔았고 끝내 자살하고 말았지만 전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과 함께 했던 요셉과 맛디아는 이제 그 이름이 성경책에 기록된 것은 물론이고 사도의 후보로 천거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의 유명인이 무명인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신앙이 좋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신앙이 못하고 인격이 못할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 사도를 보충하려고 하는 이 시점에서 가룟 유다 보다 더 나은 제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적극적으로 팔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배신하고 그를 저주하고 떠났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주님을 공공연하게 여러사람 앞에서 저주까지 했는데요.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단지 회개하고 다시 주께로 돌아왔고 한사람은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을 택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나를 교회에서 알아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뽑아서 높이 올리실 것입니다. 나의 그동안의 노고와 헌신에 상주실 것입니다.

 

6.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이 말은 앞서의 말을 보충하는 구절입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된 사람들끼리 일상 생활을 함께 했다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주님을 따라 다니고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주님과 인격적 교류를 나누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들 중에 직무를 맡을 자격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믿는 경력이 몇십년이니 하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내가 주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는가 , 내가 주의 제자로서 그의 명령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면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져야 하고 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해야 하며 주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주의 제자의 일원으로 직무의 한몫을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7.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사람
마지막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사람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도록 직분자를 뽑았는데 정작 본인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그건 제대로된 선택이 아닙니다.

 

내가 보았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말을 사람들이 신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다른이로부터 믿음을 얻어야 합니다. “도저히 저 사람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항상 거짓말만 하고 사기나 치는 개망나니의 말을 어떻게 믿어?” 라고 할 정도가 되면 그 형편없는 이의 입에서 나온 부활에 대한 증거를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니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야 될 것은 해야 되는 것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거창하게 전도지를 노상에서 돌리는 것만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하철안에서 주님의 부활을 소리높여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가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 싶으면 불법도 마구잡이로 저지르고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나에게 조금이라고 해가 되거나 귀찮으면 하지 않고 외면하는 삶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경영하는 기업들에서 부정과 불법이 만연함을 봅니다. 물론 다른 기업들이 더 깨끗한지는 제가 모르지만 그래도 기독교인들이 하는 기업은 양심적이어야 하며 다른 이들보다 훨씬 주님앞에서 떳떳해야 합니다.

 

자그만 이익 때문에 불법을 저지른다면 그의 불법은 그리스도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며 가룟유다처럼 자그마한 이익에 그리스도를 파는 배신입니다.
경쟁하며 시기하고 분내는 삶도 역시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직무를 맡길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온몸으로 증거할 사람이어야 합니다.

 

8.제비뽑아
결국 기도하고 제비뽑아서 맛디아가 선택되었습니다. 요셉과 맛디아 중에서 맛디아가 뽑혔네요. 요셉의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보아 사실 요셉이 맛디아보다는 조금 더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주의 선택은 요셉이 아니라 맛디아였습니다. 이후 별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요셉은 이에 순복하고 자기의 사명을 묵묵히 이후로도 계속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제비를 뽑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제비뽑아’란 원 의미는 ‘주었다’라는 뜻입니다. 원문에는 이 구절에 우리성경에는 생략된 ‘그들에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어절을 넣어 다시 적게되면 ‘그들에게 제비뽑아’가 됩니다. 너무 어색합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잘못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으로 번역하면 ‘그들에게 제비가 주어졌다’는 해석이 됩니다.
뽑은게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원래 제비뽑기의 방식은 두사람의 이름을 적은 표식을 그릇에 집어 넣고 세게 흔들어서 튀어나온 것에 적힌 이름을 가진 사람을 선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제비를 뽑은게 아니라 그 제비가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이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이 모든 일에 성령께서 주장하신다는 사실이 여기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손을 통하던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직무를 받는 것이지 내손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위 선거운동이라고 하는 인간의 개인적인 노력이 표를 얻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배후에는 주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직무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원해서, 아니면 다른 많은 이들이 원해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세우셨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그의 부활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시작한 하늘왕국을 확장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나에게 이 자리를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나라의 녹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나 스스로 돌아보아 근신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내가 그리스도께서 주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나의 삶이 성도로서의 삶으로서 주께서 보실때에 합격할만한가를 날마다 스스로 살피며 근신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면 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할께요.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는데 이제부터 잘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면 됩니다.
이제까지 잘해온 분들은 더 열심히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제비를 주셨습니다. 주의 지명이 나에게 온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주신 이 귀한 직책에 알맞은 그런 멋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9월 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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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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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일 년 정도 학급 지도위원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인사 하거나, 당번 정하고, 소소한 일들의 연속이었고, 모범적이어야 했음에도 친한 친구 몇이랑 당시 유해하다는 게임센터(*오늘날 PC방)를 종종 갔다가 딱 걸렸던 추억도 납니다. 지금에 와서야 돌이켜보면, 내가 그토록 꼬마였음에도 주변의 눈이 많았기에, 걸려서 혼났던 게 속상했던 것 같았고, 따지고보면 그런 관심을 어릴 적부터 받아왔기에, 관심에 익숙해져서 그 점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늘 홍 목사님은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십니다. 그에 비해서 저는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결국 사람은 그 자리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높은 직책이 있으면, 아무나 앉혀놓으면 어쨌든 일이 돌아갈 때를 목격할 때가 매우 많았습니다. 뭐, 장기적으로 볼 때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요.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서 내린 결론은, 좋은 자리에, 좋은 사람이 서 있는 것, 쉽게 말해, 윗물부터 맑게 유지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겠는가. 라는 상식적인 결론입니다. 군대에서는 서서 하는 회의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앉아서 인간 거수기 YES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의사결정의 긴장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 등등 필요할 때는 서서 회의를 한다고 합니다. 좋은 결정을 하기란 어렵지만, 그럼에도 중요하고 위급한 것을 우선해야만 하는 것이 군대라면,

 

하나님의 군대의 용사인 우리가, 매일을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기뻐하며, 멋진 기독교인이 되면 그 얼마나 멋집니까. 저는 우리가 그런 성도가 되어갈 수 있다고 감히 확신합니다. 안내하는 자가 오히려 기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 2014. 10. 리뷰어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