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세기32장)/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9. 14. 09:06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세기32장)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네 삶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후좌우를 살피며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한 순간도 우두커니 있으며 세상을 관조하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정신없이 달음박질하기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지체하면 시대와 세상에 뒤쳐질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서 철이 들면서부터 정신없이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문득 어느날 스스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 나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 존재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우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이 모습으로 서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살아 날 수 없는 삶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경우가 혹시 없습니까?

 

제가 서울에서 이산 저산을 다니며 기도할 때 언젠가 수락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위험한 곳은 잘 가지 않는데 그만 그 날은 뭔가 변덕이 생겨서 절벽사이에 난 소나무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절벽에서 추락을 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엄청난 비극이 될 뻔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낙동강의 지류에서 놀다가 제가 물에 빠질 뻔 한 일이 있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강물에 빠져서 어떻게 되었다면 지금 이렇게 있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때로는 우리네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네 삶이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 졌으리라고 생각되어지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전혀 선택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선택은 할 수 없지만 그때 그랬다면 아마 나의 삶이 달라 졌으리라는 그런 순간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우리가 알 수도 있지만 모르고 지난간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순전히 우리 하나님의 인도의 결과입니다. 그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의 소명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그런데 우리가 영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알수 없지요? 그러나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가장 확실한 우리 하나님의 소명, 부르심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앞으로의 삶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바꾸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요? 천만에요, 우리는 모두 목숨이 다하기 전에는 언제나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가 꿈을 가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1.마하나임이라 하리라

 

자, 이제는 우리 서론은 그만하고 본문을 따라서 한번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20년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오면서 길옆에 진을 치고 그를 옹위하며 움직이는 천사들의 군대 진영을 보고는 이는 ‘마하나님’이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한 외침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 노년에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감사의 외침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을 돌아보며 그가 올린 신앙고백이 ‘마하나임’이라는 한마디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진영이란 뜻입니다. 군대가 진을 친 곳을 ‘진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하나임이란 말은 단수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고 쌍수입니다. 쌍수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 진영이 자기를 둘러싸고 진을 친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가 자기를 둘러 진치고 있음을 보고 이를 마하나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마하나임’은 지금도 내 주위에서 나를 둘러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실상 야곱은 벧엘에서 외갓집으로 갈 때인 약 20년 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네가 가는 곳은 어디든 내가 너와 함께해서 지켜주겠고 네가 반드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야곱 역시 자기가 무사히 이땅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벧엘에 제단을 쌓겠으며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그는 무사히 거대한 부와 많은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때의 약속을 잊고 벧엘로 단을 쌓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형님의 진노를 가라앉힐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키시며 보호해 주신다고 하는 약속은 받았지만 실제로 그의 삶은 고단했고 힘들었으며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로 야곱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는 커녕 처음부터 외삼촌에게 사기를 당해서 결혼대상자가 바뀌었으며 하지 않아도 될 7년간의 노동착취를 당했고 정식으로 근로계약을 하고 난 후에도 그의 품삯은 열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물론 좋지 않은 쪽으로.

 

그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십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이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외삼촌의 양을 치기에 밤이 맞도록 하였답니다. 밤낮을 잊고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그는 최선을 다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했답니다. 심지어 일을 하는 도중에 손실이 발생하면 그의 돈으로 물어 내었답니다.
이렇게 보면 야곱을 너무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비록 인격은 좋지 않아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고용주인 외삼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기의 품삯이 열 번이나 불리한쪽으로 바뀌었답니다. 결혼상대자를 사기를 당해서 칠년간의 노동을 한 것도 모자라 20년동안 그는 정말 뼈빠지게 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된 걸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가 부자가 되었고 자기가 운이 좋았기 때문에 안전했다고 믿었지만 야곱의 눈앞에 보인 하나님의 군대 진영을 보고는 비로소 지난 20년의 세월동안 하나님의 군대가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기를 둘러 진치고 지키고 있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하나임입니다.

 

외삼촌의 손에서 피하려고 가족과 양떼를 몰고 도망치다가 잡혔음에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외삼촌의 꿈에 야곱을 해치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답니다.
이 동네가 매우 살벌한 동네이므로 외삼촌과 조카라고 해서 무사히 넘어가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금방이라도 칼질과 노략질이 일어날 분위기였음에도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을 살리신 것입니다. 자기를 쫓아온 외삼촌 라반이 자기 입으로 한 말입니다.

 

야곱은 전혀 그정도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20년동안 야곱이 알던지 모르던지 그를 지키고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이제 가나안 지경의 첫동네에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의 눈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천사들의 군대 진영을 보고 비로소 야곱은 20년전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이천리나 떨어진 외삼촌의 집으로 갈 때에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그 보호와 인도의 약속의 말씀이 비로소 생각난 것입니다. 나는 한번도 그 사이에 하나님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를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나의 삶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보니 더 최악의 결과가 오지 않고 결과적으로 내가 이렇게 살아서 많은 처자와 가축과 재물을 가지고 안전하게 집으로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때문이라는 것을 그가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마하나임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2. 야곱이 마하나임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군대를 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야곱은 어찌해서 가나안땅에 들어와서야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되었을까요?

야곱의 감탄사, ‘보라 마하나님이라’는 감탄사로 보건데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가 지난 20년 동안 하란에서도 자기와 함께 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한곳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따라서 진을 치고 움직이고 있다고 마하나임아닙니까?

 

그러니까 벧엘에서 하란으로 갈 때도 하란에서 생활할 때에도 지금 이렇게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노상에서도 하나님의 군대가 자기를 둘러싸고 함께 움직이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가 이방 하란에서 고생할 때나 사막을 길을 갈 때 야곱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 진영이 보이지는 않았는데 가나안의 경계 안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군대를 보게 된 것에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시지만 영적 가나안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길로 갈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사모할 때에야 우리의 눈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말없이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아버지의 정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길로 갈 때에는 우리의 눈에 나타나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며 그의 법을 지킬 때에는 우리의 눈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그는 우리의 등 뒤에서 말없이 우리를 보호하시며 ‘얘야, 그쪽으로 가서는 안된다. 네가 가야 할 길은 이쪽이야’ 하시며 우리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간섭하시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눈에는 여건으로, 환경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이야기 하면서 ‘네가 지금 서있는 그곳이 바로 너의 소명이다’ 환경으로 우리를 몰아 가셔서 아무리 둔한 나라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막다른 길에 다다라서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가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게 바로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자리입니다.

 

사실 32:1의 “길을 가는데” 라는 말은 우연히 길을 가는데 옆으로 하나님의 군대 진영이 눈에 보였다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가나안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목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미리 진을 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칠 것 없는 사막, 드넓은 광야에도 마음대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상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곳으로 가야 물과 숲이 여행자를 기다리는 그런 길이 있습니다. 다른 곳보다 훨씬 힘도 덜 들고 물과 그늘이 있으며 안전한 그런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야곱이 반드시 와야 하는 길에 미리 진을 치고 그가 그 지경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가 우리의 눈에 나타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를 설정하시고 그때까지 우리가 다른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길로 가도록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일시적으로 다른 길로 갈 수는 있어도 그때는 먼길을 돌아 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아! 내가 서야 할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하고 느끼도록 하시는 것이지요. 비록 우리가 지금 눈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해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20년 동안 그렇게나 만나기를 두려워했던 형 에서를 만나러 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상 야곱의 귀향을 막은 것은 외삼촌 라반이 아니라 형 에서입니다. 형이 400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제나 저제나하며 야곱을 기다립니다. 과거에 야곱에게 사기당한 축복권을 도로 빼앗기 위해 , 그때의 억울함을 설욕하기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야곱은 지난 세월동안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 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마하나임의 역사를 보고 난 다음, 형 에서의 손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실 것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손에서 나를 건지신 하나님은 이제 형의 손에서도 나를 건지실 것으로 그가 믿은 것입니다. 그는 20년전 홀로 광야를 건넜지만 이제 수많은 가족과 종들과 가축과 재물을 가지고 다시금 광야를 건너 오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재물과 이룬 부가 아깝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하나임에서 만난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움직이는 군대진영은 그에게 그런 확신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나는 결코 멸망치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곳, 벧엘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뵈올 것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의 가는 길 옆으로 나를 둘러 진치고 에워싼 하나님의 군대진영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하나님은 나를 둘러서 진치고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의 눈에 보이는 표상, 내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나는 너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하나님이 주신 징표를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본다는 것은 비 정상적입니다. 그래서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어때요, 우리가 평소에 기적을 매일같이 만나지 않아도 사실 우리의 삶자체가 바로 기적입니다.

 

이 어려운 삶에서 지금껏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세상은 나를 위협합니다. 세상은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리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우짜꼬? 우야꼬? 어떻게 하지?

 

나로 하여금 전전긍긍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의 불안과 근심 염려 때문에 스스로 좌절하고 낙망하여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나는 이길 것입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마침내 나의 행보에 두손을 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마하나임의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임할 것을 제가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너무 기쁘고 감격하여 자기도 모르게 ‘마하나임이라 하리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9월 1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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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사야서 41장 10절이던가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오던 구절이, 하도 자주 들어서 곧장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있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등등. 이 모든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심을 인정하고, 믿고, 용감하게 나아가라가 아닐까, 그런 강한 확신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 앞서 가시며, 또 우리를 마치 음향의 서라운드 시스템처럼, 전후좌우를 지켜주시면서 인도하신다면, 우리에게는 두려울 것이 이미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어려움이 아예 없는 삶은 아닙니다. 어렵고 속상한 일은 여전하더라도, 적어도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이길 "잠재력"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지금껏 우리의 삶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주실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라면, 조금 더 겸허하게, 그리고 조금 더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쁜 일을 맞이하면 웃을 수 있어서 좋고, 슬픈 일 앞에서도 인내함을 배워나갈 수 있어서 좋은 것. 그래서 지금까지 2천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성경책은 "나의 사랑하는 책"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내 주님 같은 분 없네" 같은 찬양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리뷰어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