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민족운동 7부 - 이념보다 항일이다

시북(허지수) 2014. 11. 21. 20:21


 잠깐 서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념으로 서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상처주는 모습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하나 되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면 슬픈 미래겠지요. 그렇습니다.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 것인지 다양한 생각을 제공해 주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문서에서는 좌우의 이념이 하나의 목표로 합쳐지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스스로 경계할 수 있으면, 우리의 저항하는 정신, 싸워나가는 정신이 계속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우선 1920년대 넓게 민족주의진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모호한 개념일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자본주의를 지향하고, 민족을 우선시 하는 세력이다 라고 정리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한편, 사회주의의 정반대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로 연결하는게 맞습니다. 경제 시스템의 지향점 차이니까요. 예컨대, 북한은 사회주의를 지향하잖아요.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고 체제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 두시면 됩니다.)

 

 민족주의 운동의 형태로는, 1920년대 실력양성운동이 있습니다. 구한말에 있었던 애국계몽운동에서 흐름이 연결되어 오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 해방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모습이 있긴 합니다. 즉, 우리만의 경제를 끌어올리고, 식산흥업시키고, 교육하고, 언론운동 하고, 이런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실력을 키워야한다 라는 것, 이 형태를 기억해두면 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실력양성운동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었는지 출발을 해봅시다.

 

 경제파트에 중요한 운동이 있습니다. 천천히 배경부터 살펴보자고요. 1920년대 일제의 지배정책 중에서 산미증식계획과 회사령의 폐지 및 관세 철폐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분위기 속에 민족자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점입니다. 1920년대 민족자본도 어느 정도 숨통을 틀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경성방직 주식회사, 평양 메리야쓰 공장 같은 자본들이 나름대로 이 때의 환경을 이용하면서 발전을 보이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게 기회이자 위기일 수 있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회사령의 폐지 및 관세 철폐로 인해서, 쟁쟁한 일본 자본과 기업들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경쟁하게 된다는 거지요. FTA를 연이어 하는 오늘날과 참 유사하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당시에도 이 점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일제 회사에게 유리해 지고, 조선 회사에는 압도적으로 위기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 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이 뭐냐, 우리는 이걸 배우는 거에요. 바로 물산장려운동 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쉬운말로 쓰면, 좋다! 우리 국산품 쓰자! 라는 것. 배경은 복잡하지만, 풀어쓰니 간단해서 좋네요. 하하.

 

 물산장려운동은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시험에도 출제빈도가 높고요. 인물로는 조만식, 장소로는 평양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세요. (*이와 비교해서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라는 점이 시험의 단골소재) 관련단체로는 자작회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지화 한다면 스스로 만들어 쓴다는 것. 조선 사람들은 조선 사람의 것을 쓰는 모임, 이런 느낌이지요.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물산 장려운동이 잘 나가는 듯 했단 말이지요. 언론의 도움도 많이 받곤 했으니까요.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민족지 같은 신문도 1920년대 있었고요.

 

 그런데, 사회주의 세력의 비판으로 물산장려운동은 위기가 옵니다. 결국 물산장려운동은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 사회주의 세력들이 이 운동을 비판했을까요? 왜 같은 조선 사람들이 비판을 했을까요? 자, 천천히 살펴보아요. 1920년대 라고 하면, 일단 사회주의의 유행이잖아요. 사회주의 세력들은 물산장려운동을 자본가들을 위한 운동일 뿐이다 라고 본 것입니다. 또한, 사회주의에서는 상대적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다음 모습이고, 따라서 (민족보다는) 노동자들의 입장을 더 중요하게 바라본 것입니다.

 

 각자의 입장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써볼께요. 자본가들의 타도가 중요한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민족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본가들은 지금 물산장려운동 하면서 기층 민중들의 호주머니들을 다 털어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그것을 콕 집어서 아픈 곳을 비판한 것입니다. 진짜로 민족을 위한 것인가? 알고보면 자본가들의 이익을 창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세요. 물산장려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적 감정을 호소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구호라서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사는데, 정작 국산 물품 공급이 제대로 안 되었어요. 경제에서 이러면 어떻게 되나요, 수요가 많다라면, 가격은 올라갈 수 밖에 없고, 실제로도 만드는 사람만 이득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에서 이런 장면들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참 놀랍습니다.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대 평양에서 전개되었으며, 사회주의 세력에게 비판받았다가 한 줄 정리 요약입니다.

 

 어쩌면 사회주의 세력이 볼 때, 노동자들은 원래 우리나라 제품들을 사용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지금도 고민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에요. 오늘날에도 우리나라가 만든 것을 사주세요 하면 먹힐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한 축이다 라는 점. 예나 지금이나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겠지요. 휴대폰에서 자동차까지 국산품을 쓰자가 언제까지 통할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세계화로 인해 점차 선택의 폭이 다양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로 돌아와, 민족주의 운동, 다음으로 교육을 볼께요. 교육의 배경으로 1920년대에는 제2차 조선교육령이 등장합니다. 일본과 조선의 학제(수업연한)를 동일시 한다는 거에요. 이제 조선사람들도 대학을 세울 수 있게 문이 열린 겁니다. 어, 그래? 우리한테는 아직까진 대학이 없었어요. 중등교육하면 중,고등학교까지만 있었는데 말이에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등장합니다. 이상재, 서울에서 출발합니다. 모금운동도 전개가 됩니다. 금주, 단연 등의 방법으로 모금을 하는거에요. 그런데 이 운동이 성공하지 못합니다.

 

 교육이 확산되는 것을 일제가 두려워 한 거에요. 따라서, 우리 주도의 대학이 아닌, 일본이 대학을 세웁니다. 그 대학으로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이 됩니다. 민립대학은 이제 무력화 되고 말았고요.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왜 일어나는지 배경, 그리고 그 결과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한 번 머릿속에 정리해두면 됩니다.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진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네요.

 

 언론을 볼께요. 지금까지 1920년대를 다룬 내용이지만, 이번 문단만큼은 1930년대를 같이 볼께요. 민족주의 진영에서 언론은 문맹퇴치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동아일보의 브나로드(1931~) 운동이 있습니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 라는 뜻이에요. 그들의 문맹을 깨우쳐주자! 지금으로 생각해본다면 자원봉사활동 같은 느낌이에요. 1920년대를 묶어서 살펴보고 있지만, 브나로드운동은 1931년도부터 시작되었고, 심훈의 소설 상록수 배경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도하는 운동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색칠된 곳 중요하니까 체크해두시면 좋을꺼에요.

 

 이제 반대편도 살펴봐야 하니까, 끊지 않고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또 다른 진영 사회주의 세력의 싸움방식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이 쪽 노선에서는, 쟁의 투쟁 (파업) 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왜 파업일까 라는 배경을 볼께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세계에 정말로 등장하지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맨 마지막 문구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라고 써 있어요. 중요한 것은 단결이란 말이지요. 가령 노동자 한 명 한 명이 따로 있으면 어떠한 힘도 쓸 수 없고, 단지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한 개체거든요. 그런데 노동자들이 뭉쳐버리면 어마어마한 타격을 자본에게 줄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운수노동자들이 모여서 한 날 한 시에 파업을 선언하면? 한 명의 운수 노동자가 파업한 거와는 비교할 수가 없어요. 한 명이 파업했을 때는, 뭐야 하고 고용주가 짜르면 그만이라지만, 다른 노동자가 도저히 대체할 수 없을 만큼 단결해서 총파업해 버리면, 그 때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 거에요. 이를 배경으로 이해해 두고서, 1920년대가 되면 이러한 방법, 쟁의와 조합운동이 유행하는 것입니다. 농민들이 쟁의를 하면 소작 쟁의라고 부르고요.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인하해달라 하면서 쟁의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보면, 추수를 할 때, 그 타이밍에 맞춰서 농민들이 일시에 추수를 멈추는거에요. 원래는 벼가 익으면 제 때에 베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파업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파업이 성공하려면, 단결이 중요하고, 혹시라도 다른 마을에서 지주를 도와줘버리면 말이 안 되는거겠지만요, 그러면 소작 쟁의가 일어나면 둘 중 하나겠지요. 농민의 요구를 들어주든가, 추수하는게 다 썩든가 라는거지요. 대표적으로는 암태도 소작쟁의 (전라도, 1923년) 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노동쟁의가 있겠지요. 임금을 인상해달라 입니다. 원산부두노동자 총파업 (1929년) 이 있습니다. 아, 1920년대 특히 많았던 이유가 뭐였냐 하면, 유행뿐 아니라 일제의 정책과도 연결이 됩니다. 내부적으로 1910년대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다 빼앗아 간단 말이지요. 1920년대가 되면 산미증식계획으로 열심히 뼈빠지게 일해서 일제 좋은일 시키고, 쌀도 못 먹어서 만주에서 잡곡이 들어오고 말이지요. 이런 형태가 계속되면서 소작쟁의가 증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1920년대 회사령이 철폐가 되면서 이제 공장들이 많이 생깁니다. 이러면서 노동자들이 쉽게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더라. 라는 것을 같이 이해해 두시면 편합니다.

 

 그런데, 1920년대는 어디까지나 생존권 투쟁이라는 흐름이 주를 이루었다면, 1930년대에는 이런 모습들이 더욱 확산되어 나갑니다. 자본과의 대결, 지주와의 대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일 투쟁과도 연결되는 겁니다. 일제 타도, 정치 투쟁으로도 나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1920년대에는 소작료, 임금이 쟁의를 하는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위에서부터 자꾸 막는 존재가 바로 일제며, 근본적으로 일제라는 배후를 없애야 한다는 것을 자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1930년대 정치 투쟁으로 가면서는 비합법, 혁명지하조직화 되면서 일제와 싸워나가고 있습니다. 20년대와 30년대가 분위기 자체가 많이 다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사회주의 운동 - 쟁의 투쟁을 살펴보았습니다.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파업하고 싸워나가더라 라는 이미지.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이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절반도 안 되는 현실에 힘을 합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지요.

 

 여기까지를 되짚어보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서로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가, 사회주의 세력들이 민족주의 세력들을 공격하고 있는 형태이기도 하고, 살짝 대립적인 구도로도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하나로 뭉쳐지는 모습들이 등장한다는 거에요. 그 계기가 무엇인가 보니, 실력양성운동(민족주의 진영)에서 우선 제대로 성과가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자치론이 등장합니다. 이 점 중요합니다. 자치론이 뭔가하니, 일제 식민지 지배 인정하자, 그 안에서 우리의 자치를 얻어내자. 이광수 나쁜XX 민족적 경륜 이런 글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때, 실력을 키우자더니, 이게 뭐냐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민족주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자치론이라니 이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고 완전히 분리되어 나옵니다.

 

 사회주의 세력도 마찬가지라서 1920년대 중반이 되자 치안유지법이 일제에 의해 등장합니다. 노동운동을 더 거세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를 계속해서 압박해 들어옵니다.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거에요. 이러다보니까 사회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의 합법적인 공간이 필요합니다. 결국 비타협주의자들 + 사회주의자들은 만나게 됩니다. 조선민흥회에서 두 세력이 만나보니까 생각보다 괜찮아 라고 하면서 한 번 해보자 라는 분위기가 일어났고, 사회주의계에서도 정우회 선언을 합니다. 어, 드디어 좌우 합작 단체가 등장하는 분위기군요. 네, 신간회 이야기 입니다만, 또 길어질테니 다음 문서에서 신간회는 계속 이어서...

 

 덧붙여, 이처럼 서로가 손을 잡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북경에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촉성회(안창호)가 있었고요, 코민테른에서 사회주의가 가지는 앞으로의 전략에서 손을 잡는게 괜찮다고 지시가 있었고, 또 중국에서는 1차 국공합작(국민당+공산당)이 성공합니다. 살펴보니 대립만 있는게 아니라, 합쳐서 되는 일도 있구나 라는 점을 1920년대의 역사의 장면들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영감 - 노골적으로 한 쪽 편을 들지 않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의 큰 문제라면 빈부격차가 뚜렷해 지고, 복지사회로 가는 재원부족이 심각하다는 점에 있겠지요. 한 칼럼에서, 오늘날을 비극으로 묘사했는데 - “격차사회”의 바닥에 놓인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승자독식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은 “절벽사회”의 벼랑에 서게 된다. ‘승자’를 더 챙기고 ‘격차’를 더 벌리고 ‘절벽’을 더 가파르게 하는 정권을 보며 국가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세금은 누가 얼마나 왜 내야 하는가 등 원론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문서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쓸께요. 어려운 시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내시길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