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을 먼저 잠깐 해볼까요.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에서는, 반민특위와 농지개혁을 했습니다. 개헌으로는 발췌개헌(대통령직선제)과 사사오입개헌(중임제한 철폐)을 했고요. 그리고, 반공체제를 구축하면서 신국가보안법 만들고, 진보당 사건이 있었고, 경향신문이 폐간되었습니다. 하하, 이제 긴 시간도 짧게 정리!

 

 1960년 4.19 혁명에 의해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들어섭니다. 의원 내각제와 양원제로 운영되었습니다. 4차 개헌으로 부정선거 사범들을 처벌하려고 했으며,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제2공화국은 다양한 민주주의의 요구 속에서 사회 혼란이 일어난다는 명분 하에 문을 내리게 됩니다. 글쎄요. 정말로 장면 내각이 이 사안들을 모두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군부가 가진 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문을 닫게 된 것인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요.


 어쨌든 이제 1961년 5.16 군사정변부터 군정 체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를 세워서 이 조직들에 의해서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5차 개헌을 통해서 대통령직선제와 단원제로 바꿉니다. 그리고 공화당을 창당했습니다. 경제 면에서는 화폐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농어촌 부채를 탕감하고 있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격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5차 개헌에 의해서 1963년도에 대선이 치뤄집니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선거에 나섰습니다. 당연히 박정희가 승리하게 되었고, 이제 박 대통령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제3공화국의 출범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 왜 63년도 였냐고 하면, 5.16 군사정변이라는 비상사태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했던 군정이었고, 말 그대로 상식 보다는 비상 상황 이라는 느낌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선거의 시간 개념도 해오던대로 4년 마다 한 번 이라기 보다는 이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인 것이지요! 따라서 63년도부터 새롭게 4년씩 계산하면 됩니다. 다음 대선은 67년도!


 자, 그러면 제3공화국에서 시행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경제 개발이었습니다. 군정 때부터 시도해 봤었지요, 자주적인 경제개발을 위해서 국내의 자본을 총동원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돈이 정말 없고, 못 사는 나라임을 확인했었지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돈을 끌어들여야 되겠다고 판단합니다. 그리하여 제3공화국의 경제 개발은 외국에서 자본을 끌어들이는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방법이냐 하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한일 수교 였습니다. 1965년도 입니다. 한일 수교는 이승만 정부나 장면 정부에서도 수교에 대한 의지가 이미 있었습니다. 또한, 한일 수교에 대해서는 철저한 사과를 받고 배상을 받아내겠다 는 생각이 있었지요. 그랬지만, 정작 박정희 정부에서는 이렇게 배상을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많이 퇴색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천천히 살펴봅시다.


 지금 한 일 수교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세력이 있다면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지금, 냉전 상황이었고, 동북아 지역의 상황을 보니까 중국과 소련, 북한까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주의 세력과 맞서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도 친해질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른바 미국 한국 일본의 삼각 동맹 라인이 형성이 되어야 지금 소련과 중국, 북한을 막을 수 있는 셈법이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미국의 바람과 계산과는 다르게 한국과 일본은 여전히 으르렁 거리고 있단 말이지요. 한 마디로 수교가 안 되는 거에요. 이렇게 되자, 미국은 한 일 양국에 빨리 수교를 하라고 압박을 넣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이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돈이었습니다. 돈으로 경제 개발 계획을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아 정말 돈이 없잖아요. 필요한 것이 이렇게나 부족하다니요! 그렇기 때문에, 돈을 가져올 때 어떠한 명목으로 가져오느냐 이것이 참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한일 수교를 할 때, 과거에는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배상하라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보상하라고 입장이 조금 약해지고, 이 시점에서는 청구권이라는 훨씬 약해진 개념이 등장합니다. 청구권이라고 한다면, 식민지 시기에 우리가 피해를 받았던 것에 대하여 청구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이런! 굉장히 형식적인 느낌이 들고, 배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진 느낌이 듭니다. 자, 그런데 일본은 여기서 이 청구권이라는 것 조차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는 못하겠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래놓고는, 일본은 독립 축하금을 주겠다고 주장합니다.


 정확하게는 독립 축하금에 따른 경제 협력 자금을 주겠다는 건데 어이가 없는 겁니다. 일제 36년간의 만행에 대하여, 일본이 사과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사과는 커녕 너희들 독립했으니 우리가 가난한 대한민국을 위해 돈 좀 줄께... 이렇게 되버린 겁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나마도 배상보다 약해진 청구권으로 돈을 받아내려고 했었는데, 이것도 결렬되었고, 독립 축하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용어를 들고 나왔던 것이 일본의 입장입니다.


 게다가 아니나 다를까 심지어 한일 수교하는 과정에서 망언도 있었습니다. 구보타 라는 인간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차피 일본 아니었어도 중국이나 러시아 식민지 되었을텐데 뭐~" 제가 어지간하면 마음을 매우 착하게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또 뚜껑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미X..XX...XXX...!!! 욕설은 항상 편집. 죄송합니다.


 어쨌건 이 시점에서 수교는 진행되었으니,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이름의 협정문을 만들어 가면서 돈을 건네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청구권, 일본은 독립축하금 말이지요. 이 결과 무상으로 3억불, 유상으로 2억불, 상업차관 1억불 등으로 돈을 받아오지요. 문제는 뭐냐하면, 이 돈의 가치가 되겠지요. 예, 맞습니다. 이 당시로 볼 때도 큰 돈이고, 어마어마한 돈을 받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제 36년간 당했던 인적, 물적, 정신적 수탈과 그 엄청난 피해가 고작 이것 밖에 안 되느냐 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좋아요. 상당한 돈을 받아왔는데요. 또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걸 받아오는 조건으로 일본의 사과를 묻지 않습니다. 일본은 축하금이라고 주고 있었으니 더욱 그렇겠지만, 단 한 마디의 사과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을 빌려오면서 개인의 청구권이 다 함께 들어가 버립니다. 따라서 이제 일본에게 개인적으로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진 거에요. 이제는 개인적으로 일본 국가에 대해서 청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참 한일 수교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고민을 해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사과가 없다 라는 것. 이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요. 이런 사례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일본은 그 후로도 오늘날까지도 명확하게 사과하는 법이 없습니다. 책임 있는 사과는 커녕, 오히려 망언들을 오늘날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돈들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에 있어서 정말 소중한 돈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돈은 가져왔지만,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는 것. 명분이라는 것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던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됩니다.


 자, 그리고 이 당시를 살았던 대학생들은 이 장면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거죠. 어떻게 일본의 사과 없이 수교를 맺을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면서, 대학생들이 정말 거세게 저항합니다. 분명히 기억해둬야 겠지요. 바로 1964년 6.3 시위입니다. 박정희 정부에 대해서,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장례식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약 3년 동안의 군정 기간을 겪으면서 일부 지식인들 중에서는 박정희의 모습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확고하고 튼실한 경제 개발을 위해서는 중심이 확실한 리더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군인이라는 체계 잡힌 엘리트 집단의 통치를 기대하면서 지켜본 지식인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주장하고 생각했던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인데요. 서양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민주주의, 그러니까 많은 요구들이 들어와 있고, 그 속에서 혼란스럽고 했었던 제2공화국 시절의 장면 내각의 민주주의로는 우리 형편에 안 맞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라고 해서, 하나의 중심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중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질서 있는 민주주의를 지향하겠다 라고 주장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아니, 그랬는데! 제3공화국이 들어서고 하는 일인, 한일 수교의 장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돈 받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에 분노하면서 지식인들도 들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거짓이고 허위였다고 선언하였고, 장례라는 거친 표현까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지식인들이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계기가 바로 6.3 시위 였습니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까지, 사태 진압에 나섰고, 결국 이 시위를 군대까지 투입해서 막아버리고 한일 수교 나섰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한일 수교가 되겠습니다. 드디어 일본과 다시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여전히 문제가 많습니다. 오늘날도 일본과 사이가 안 좋고, 협력이 되질 않고 하하... 여전히 일본측에서는 어떤 문제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고, 독도 문제도 이 당시 한일 수교의 연장선상 아니겠어요. 일본이 명백히 이 때 사과했더라면, 독도에 그렇게 자꾸 집적거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가 당시 그토록 가난했고 돈이 없었으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빈국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경제적인 발전과 동력이 될 수 있을만큼의 어마어마한 돈을 제공한 것도 마찬가지로 한일 수교였단 말이지요. 아~ 요즘에 이 문제는 논술 주제로서도 간혹 다루기도 할 겁니다. 어디에 더 가치를 둘 것인가에 따라서 저마다 생각이 달라질테니까요. 한 번쯤은 우리도 각자의 생각을 한 번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경제 개발이 중요했던 것인가, 일본의 사과가 중요했던 것인가, 아무래도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어려웠을테고요.


 우리나라는 계속 해서 돈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일 수교 외에도, 외부에서 돈을 벌고 가져올 수 있는 일이 또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이 전개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었습니다. 이 베트남 전쟁에 우리가 파병하고 그 대가를 받아오는 겁니다. 이것을 토대로 해서도 경제 개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부터는 또 다음 문서에서 또 계속할께요~!

 

 오늘의 영감 - 최선생님이 들려주신 재밌는 이야기! 인생은 B와 D 사이에 있습니다. 바로 탄생과 죽음사이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이에 있는 C 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선택, 초이스 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만큼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았다? 이것을 선택하고 추구하면서 살 것인가, 그래서 묘비명에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이 왔다 갔다 라고 흔적을 남길 것인가?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무의미한 선택보다는, 나에게 의미 있는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례를 직접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고, 음, 또는 멋진 간접 경험이 될 수 있는 책이나 영화 등을 가까이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인생은 그 나이를 불문하고 꽃보다 청춘이기 때문에, 힘을 내어본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슴 아프게도 요즘은 문화 생활도 격차가 생기고 있어서, 당장 생계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힘내어서 꼭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래는 반드시 머지 않아서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선택을 통해서, 보다 치열한 선택을 통해서, 미래를 보다 멋지게 만들어 간다면 좋겠습니다. 아, 이렇게 정리해 놓고보니, 결국 언제나처럼 오늘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네요.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by 시북 2015.01.06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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