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부르신 주님 (마태4:18-)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주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사막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의 금식기도를 마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역은 처음에는 실패를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처음 유대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소식을 듣고는 갈릴리로 본거지를 옮깁니다.

 

물론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나거나 아니면 유대가 싫어졌다거나 해서 갈릴리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간상으로 요한이 체포된 후에 갈릴리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의 기록은 이제 세례요한의 시대가 물러가고 새롭게 예수의 시대가 온다는 그런 의미로 보면 됩니다.

 

우리 주님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새롭게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의 고향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전파한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말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늘에 있던 천국이 내려온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아무런 시련도 없이 도전도 없이 이 세상이 마치 자기 것 인양 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님에게 자기에게 절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너에게 주겠다고 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이 통치권을 내게 위임하셨으므로 이것은 내거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질서는 마귀의 법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신음하며 고통 합니다. 영원한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불쌍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주께서 오신 것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을 마귀에게 맡겨 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압제에 신음하는 영혼들이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결심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온 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고통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임하게 하실 계획입니다. 그 첫 시작점이 바로 주님의 나심이었습니다.

 

1.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심
주님이 갈릴리로 옮기신 후에 주님은 갈릴리 해변에 다시시다가 시몬과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랬더니 그들이 곧 , 두말도 하지 않고 예수를 따랐답니다.

 

여러분, 마태가 이렇게 기록했다고 해서 정말 이 말처럼 두말도 없이 즉시로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주를 따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태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중간과정은 전부 생략하고 결과만을 보기 좋게 기록한 것입니다.
대개 중국 사람들이나 유대인들은 이런 식의 기록을 좋아합니다. 뭔가 있어 보이쟎아요.

 

만일 이런 식으로 제자 만들기가 쉽다면
만일 이런 식으로 전도하기가 쉽다면 이 세상은 벌써 예전에 예수왕국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를 해보아서 압니다. 전도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아니 전도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들 중의 하나 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신념을 바꾸는 일이쟎아요.

 

사람은 먹는 것, 입는 것은 쉽게 바뀌도 생각은 가장 나중에 바뀝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 생각 중에서도 가장 강한 종교체계, 나를 지배하는 신관념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 어찌 그렇게 쉽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도 이런 식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밀하고 정확한 것으로 특징 있는 누가는 이 단순한 문장사이에 일어난 엄청난 일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누가복음보다 더, 정말 정확한 기술이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베드로와 바울을 따라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직접 자기가 예수를 따르던 때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겪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보다 더 자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제일 처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시몬이 아닙니다. 제일 처음으로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은 두 명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를 따르게 됩니다.
바로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이고 요한은 예수님하고는 친척입니다.

 

본문에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것은 시몬과 안드레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참,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시몬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시몬 베드로. 그래서 마태의 얘기는 틀린건 없지만 생략된게 많습니다.
제일 처음 세례 요한 스승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은 두 사람은 주님을 만나보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형제들에게 주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야고보와 시몬이지요.

 

그런데 시몬은 주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주님을 곧 떠난 것 같습니다. 시몬이 주님과 만났다가 다시 세상으로 갔기 때문에 주님은 시몬의 집으로 심방을 간 것입니다. 아마 다시 시몬을 부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이때 시몬의 집에는 장모가 열병이 걸려 누워있습니다. 단순한 열병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이 병은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손이 한번 임하기만 하면 열병이 낫겠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떠난게 미안해서 주님에게 간청할 수 없습니다. 염치가 없쟎아요.
그때 다른 이들이 주님에게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실 것을 청했고 주께서는 흔쾌히 그들의 요구를 들으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것입니다.

 

열병이 나은 장모가 주님을 대접합니다. 베드로가 대접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마 이 집은 시몬의 집이라기 보다는 장모의 집이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때도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제 주님은 베드로의 집으로 찾아간게 효과가 없자 다시 베드로의 일터로 찾아 가신 것입니다.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베드로도 참 굉장히 고집이 센 사람이지요.

 

베드로의 일터가 바로 갈릴리 바닷가(게네사렛 호수)입니다. 그곳에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호숫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보상으로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려 엄청난 물고기,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시자 비로소 베드로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나게 긴 이야기를 마태는 단 한줄로 요약합니다.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고 나를 따르라 하니 따랐다고 한 것입니다.

 

틀린 말은 전혀 아닌데 속사정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는 자기가 직접 본 것이나 체험한 것이 아닌 들은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베드로를 전도하기위해서 들인 노력은 엄청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권위있는 말씀 한마디로 바로 베드로가 꼬리를 내리고 주를 따른게 아니란 것입니다.

 

2.사람을 낚는 어부
주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입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사람들을 그물로 잡는 어부’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그물로 고기를 잡아왔습니다. 이제 주님의 명령대로 그물을 던져서 두배가 가득 잠기는 엄청난 이적을 행했지만 주님은 그 그물에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잡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되는 것이아니라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겠답니다. 어떻게 하면요?

 

‘너희가 나를 따르면’
너희가 나를 따라오면 내가 너희로 하여금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단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물고기를 잡아서 파는 것보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 당연히 가치 있고 이익이 많이 남는 일입니다.
우선 몇푼의 물질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굉장히 큰 일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의 숫자는 곧 권력입니다. 인기가 있어서 표를 많이 얻으면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표에서 나옵니다.

 

이것만 봐도 고기 잡는 것보다 사람을 잡는 것이 더 굉장한 일임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사람들을 그물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물로 잡게 되면 사람을 한둘 낚는 것이 아니라 무데기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요?

 

우리 힘으로는 그럴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네요.
나를 따라와라, 그러면 내가 너희로 하여금 그물로 사람을 잡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지금 그물로 물고기를 무더기로 잡아서 너무 굉장한 이적의 그분 앞에 엎드려 ‘주님 나를 떠나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베드로는 주님이 자기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굉장히 크고 위대한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과 생각을 넘어선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나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물고기를 그분은 전혀 힘들이지 않게 무더기로 잡게 하십니다.
그런 그분이 이제는 나를 사람을 그물로 잡는 어부로 만들어 주시겠답니다. 자기를 따라가기만 한다면.

 

그래요, 우리는 그냥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물로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도 않지만 여러 가지 문제도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신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일을 할 능력을 나에게 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조건은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3.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다
본문에서는 21절에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고 되어서 한번 불렀을 뿐인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심지어 자기의 생업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주를 따른 걸로 나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물론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입니다. 그러나 친척이라고 해서 주를 따랐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요한은 사실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이전에 이미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의 이상과 꿈에 공감했을 뿐 주님이 바다도 순종시키는,
물고기도 순종시키는 신적 권능을 행하는 구주이심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친척이기때문이지요.

 

‘내가 그 어머니 마리아를 잘 알고 어릴 때부터 어떻게 컸는지도 아는데 무슨 소리?’ 이렇게 생각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안드레가 작업하는 배가 고기를 잡았는데 너무 많아지자 고기 때문에 배가 가라앉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작업하던 요한과 야고보의 배에다가 좀 도와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과 야고보는 베드로에게 일어난 기적을 직접 겪고 체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신적인 권능을 보고는 그가 세례 요한 같은 단순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고 신의 말씀을 대언하는 랍비요 선지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놀랍고 더 큰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면 주님은 베드로에게만 ‘나를 따르라 그러면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지 다른 이들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불렀다고만 합니다. 그렇지요.
이들은 이미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른 것이지 여기서 특별히 사명을 새롭게 하고 따르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인 세배대는 예수님을 잘아는 친척이기 때문에 자기의 두 아들이 주를 따라서 큰일을 하기를 원해서 따르게 한 것입니다. 어부가 아니라 이제는 출세해서 높은 벼슬자리에 앉을 것을 소원해서 주를 따라 보낸 것입니다.

 

이정도의 기적을 행하는 이라면 뭔가 되어도 크게 되겠거든요.
이들은 이전부터 주를 따르기는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자기가 따르는 주님에 대한 생각이 바뀐것입니다. 단순한 랍비가 아니라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렇게 기술한 것입니다.

 

4.내가 아니라 주께서 하신다
여기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것을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얼마나 수고하고 힘들었는지가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오늘 설교의 가장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되게 하리라”
‘내가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너희가 되어라’가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주겠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줄테니까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고 따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이성적으로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오히려 이끌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건 이렇게 하면 안되고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요, 그러니 이렇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한다면 이게 바로 내가 하나님을 이끌려고 하는게 아니고 뭡니까?

 

그분의 지혜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근시안적이고 단편적이라서 전체적인 것을 볼 줄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에게 강요하려고 합니다.
‘안되면 되게하라’는 군사독재시절의 구호지 결코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호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쉽습니다. 말도 안되는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가 이끄시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나는 어느순간 그물로 사람을 무더기로 잡는 어부가 된답니다.
왜냐면 나를 만드신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만드실때에 나의 능력과 나의 생각을 일치하게 주신 것입니다.

 

뜻만 높고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나의 생각과 내 육체적 능력을 맞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주를 따르는 것을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왜냐면 내가 생각할 때 내가 주님보다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건 나의 사정이고 내일이니까.

 

내 생각에는 저렇게 하면 안되고 이렇게 해야되고... 하는게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덮어 놓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말씀에 잠자코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들을 이것저것 모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항상 하는 일이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아 왔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적혀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그 말씀은 나하고 너무 멉니다. 시간상으로도 2000년이나 떨어져 있고 거리상으로도 이스라엘과 한국은 너무 멉니다. 사람들의 생각도 다르지만 문화적 여건과 지리적 여건도 다릅니다. 역사가 다르고 종족이 다릅니다. 우리는 사막의 유목민이 아니라 물과 숲이 풍부한 지역에서 농부로 살았고 이제는 빌딩숲에서 현대화된 최고의 시설과 장비속에서 살아 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전체적인 교훈이나 상징이지 뭘 내 삶의 선생처럼 나를 이리저리 시시콜콜하게 따지면서 이끌려고 합니까?
이것저것 간섭하려고 합니까?
시대가 바뀌었답니다. 사람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답니다.

 

그래서 자꾸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순종만을 요구하는게 거슬립니다. 그래도 내가 대학까지 나왔는데 자꾸 나를 무시하는게 황당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냥 주님은 내가 요구하는대로만 들어 주면 되는데 그가 자꾸 나를 이끌려고 하고 나를 따르라는 소리만 해댑니다. 답답합니다.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럼 어떻게 해야 주를 따르는게 됩니까?

 

5.나를 따르라
나를 따른다는 말을 보다 자세하게 쓴다면 이런 말이 됩니다.
‘내 뒤에 오라’
거기 있지 말고 내가 서있는 쪽으로 와서 내 뒤에 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방법대로 내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오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어두워서 한치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미망 속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불안한 삶의 진실을 훤히 꿰어서 우리의 앞장 서셔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괜히 눈도 어둡고 지혜도 부족하면서 경험도 없으면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앞장서지 말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업이나 부모를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본문은 이 세상에 속한 삶을 예수 중심의 삶으로 바꾸라는 이야기입니다.
주가 어떻게 사셨는지
그가 어떤 길을 가는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고 나가는 겁니다.

 

참 또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 주를 따른다고 해서 모든걸 팽개치고 하루종일 교회당에만 있는 분이 있다면 그는 예수의 뒤를 따르는게 아니라 자기만의 맹신을 따르는겁니다.
주님은 변화산위에서 초막 셋을 짓고 주와 함께 살고자한 제자들을 야단치시고 산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물로 사람많이 잡아다가 자기 지지세력을 만들라고 하신게 아니고
그 사람들을 모아다가 사교집단이나 정당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법대로 살도록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고 그건 바로 하나님의 법대로 이 나라와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지고 그 세상에 속한 우리 역시 훨씬 살기 좋아집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기여했기 때문에 우리 주께서 상급도 두둑하게 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주와 더불어 이 세상에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주님 중심의 삶을 한번 살아 봅시다. 아니 그건 좀 심합니까? 그러면 세상에 속한 관심을 조금 더 주님 쪽으로 옮겨 봅시다. 하루 종일 교회에만 있으라고 말하는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자는 겁니다.
조금 더 세상의 가난한자와 약한자와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봅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아도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근신하여 죄를 저지르지 말고 살아 봅시다.

 

미친 듯이 정신없이 효율과 경쟁력이란 이름으로
주위에 대한 배려없이 혼자서만 달려가지 말고
남의 사정을 생각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들들볶지 말고
조금 천천히 가지만 함께 가는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빽빽한 빌딩숲 속에서도 한그루 푸른 나무에 눈길도 한번 주고
조금은 호흡을 길게하고 쉬어 보기도 합시다.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공기가 얼마나 감사한지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황금빛 햇살이 나를 쬐는 것으로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햇살을 주신 하나님을 떠올려 보세요.

 

또 맑고 깨끗한 물은 어떻습니까?
내 이름으로 된 땅 한평 없습니까?
조금 걸어서 뒷산에 올라 보세요. 세상의 그 어떤 부자의 정원보다 크고 넓으며 아름다운 자연정원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정원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저는 유럽의 뒷골목은 가본적이 없는데 사진으로 보면 그쪽 뒷골목도 별거 없습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테라스에 예쁜 화분에다 꽃들을 심어서 길쪽으로 내어 놓은게 보입니다. 이게 선진국입니다. 자기만 보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겁니다. 나라에서 시켜서 하든 자기가 자원해서 하든 배려가 생활화 되어 있는 것이 오랜 기독교전통에서 나온건 확실합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도 이제 유교전통이 무너진 이땅에 새로운 기독교 전통을 만들어서 온세상을 이롭게 만들자는 겁니다.
제가 포도원교회를 가봤는데요 주변에 주차장을 엄청 많이 확보하고 있습디다. 그런데 그 주자장을 모두 쇠사슬로 입구를 막아놨습디다. 이건 아닙니다. 그들은 주일날 수많은 차량으로 동네 주민들을 힘들게 하면서 동네주민이 평일에 댈 수 있는 주차장도 개방하지 않는다면 이건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겁니다.

 

물론 주차장을 개방하지 못하는 사정도 제가 압니다. 그러나 효율성, 경제성보다 더 중요한게 사람입니다. 사람의 영혼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신 주님에게 효율성을 따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교회라면 어느 정도의 불리함은 무릅쓰고라도 주차장을 개방해서 주민들에게 혜택도 줘야 합니다. 피해만 주고 혜택은 없으니까 맨날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쟎아요.

 

우리가 십자가를 세웠다면 우리가 그 십자가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이름입니다. 십자가를 욕되게 하지 맙시다. 내가 효율적으로 사는 게 중요 한게 아니지요. 세상사람은 효율성과 경제성을 따지고 효과를 중시하지만 주를 따른다는 것은 그걸 어느 정도 양보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사실 주를 따른다는 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처럼 단호하게 세상을 버리고 주만 좇으라고는 못하겠네요.

 

그러나 새해에는 조금은 주님의 가신 발자취를 더 좇아 봅시다. 조금씩 조금씩 나의 삶의 중심을 주님 쪽으로 한번 바꾸어 봅시다. 혼자서만 살려고 설치면 같이 죽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봅시다.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그 세상과 이웃속에 있는 나를 살리는 길임도 명심합시다.
주는 갈릴리 해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1월 1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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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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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내 뒤에 서라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시편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하여 자주 언급되고 있고요. 우리가 앞서나가기 보다는, 때로는 기다릴 줄 아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어보고, 기도해보고, 그런 여유가 있다면, 삶이 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짧은 코멘트는 여기까지. / 2015. 시북.

by 시북 2015.01.1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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