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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버려라(베드로전서2: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 17. 21:08

 

그러므로 버려라 (베드로전서2:1-5)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은 결코 밝지 못합니다. 천주교의 약진과 불교도의 꾸준한 성장에 비해 개신교는 홀로 쇠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뭐 천주교나 불교도 스스로 정체되었다느니 침체위기라느니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기독교에 비하면 양호한 편입니다.

 

왜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교회 본연의 자세에서 어긋나 있기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존재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교회는 산 돌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죽은 돌로 이루어 진 것이고 , 적어도 이 집의 많은 부분이 죽었거나 썩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악독이요 궤휼이며, 외식이고 시기요 비방하는 말입니다.

 

1.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베드로는 거듭난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말씀 사모에 대한 권면을 합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버리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먼저 구악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무얼버려야 합니까?

 

옛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어두움의 일들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마치 헌옷을 벗어 버리듯이 사정없이 벗어버리란 말입니다.

즉 모든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입니다.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육적인 요소를 벗어버리라는 말입니다.

 

먼저 ‘악독’은 단순한 악의와는 달리 마음속에서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악을 말합니다.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독기를 품고 달려든다면 이건 엄청나게 나쁜 것입니다. 사실 이건 교인들이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우라나라 사람들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궤휼’은 미끼, 덫, 올가미 같은 모든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상황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이 속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속여서 올무에 집어넣기‘위하여 미끼를 놓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덫을 치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상대방이 덫에 걸리도록 술수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정말 악질적인 것입니다. 요즘 폰파라치나 교파라치들이 이런식의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한다는데 글쎄요....

 

보통의 세상 사람들도 이와 같이 하지는 않습니다.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에서도 이런 행위는 비겁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믿음의 형제라고 주장하면서 , 그 형제들 사이에서 이런 비겁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는 믿음 안에 속한 형제가 아니라 우리의 원수 마귀에 속한 자일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깨기 위해 교회 속으로 들어온 것이 될 것입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르게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한 믿음 안에서 형제요 자매인 것처럼 웃는 얼굴과 좋은 말로 상대방에게 다가가지만 그 웃음뒤에는 악독에 가득찬 비수를 갈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그 이중적인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웃으며 전혀 무방비의 상태로 다가오면 기습적으로 비수를 꽂아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외식하고는 다르지요? 마치 궤휼하고 비슷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이들이 참 많이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무장해야 이런 외식에 속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기’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타인이 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딱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시기는 단순히 마음 속으로만 상대방을 저주하며 원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되는 것을 방해하는 적극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시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인간 세상에는 존재하는 현상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형제이며 운명공동체이며 식탁공동체이며 사랑의 공동체 ‘코이노니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거나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비방하는 말’은 온갖 종류의 중상모략이나 악담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엄청나게 잘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할 일이없으면 항상 이거 합니다. 누구는 어떻고 아무개가 어떻고 참 재미있습니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아무리 씹어도 질리지도 않습니다. 씹다가 씹다가 씹을 사람이 없으면 텔렌트나 가수나 아무개 유명한 사람의 일까지 씹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제대로된 뉴스는 안보고 가십거리 같은 거만 봐서 시사상식도 없고 의식도 없답니다.

 

사실 이러한 비방하는 말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상대방의 반론을 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떤 사람도 결국에는 그 비방하는 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은 정말이지 교회 안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불결하고 더럽고 무가치한 것이고 냄새나는 배설물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이가 이러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는 바로 배설물과 같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 역시 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은 ‘악의’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베드로는 성도들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악들을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조금 과남한 무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든 악은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 명칭 상 거룩한 성도라고 하면서도 이러한 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교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거룩한 무리라는 칭호를 받고는 있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지르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라고 칭해진다면 우리는 연약함에서 나와서 거룩해져야 할 것이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거룩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거룩해 지기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실로 성도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베드로는 애끓는 심정으로 우리들에게 구악을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땅의 교회는 지금 심각한 기로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로는 반드시 나쁘게 상황을 변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롭게 상황을 개선시켜서 우리의 체질을 변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2.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베드로는 앞에서 악독을 버리라고 이야기하고는 바로 이어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는 갖난 아이가 젖을 사모하듯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갖난 아이가 젖을 얼마나 사모합니까?
갖난 아이에게 젖은 생명줄입니다. 배가 고파서 칭얼거리며 울다가도 엄마의 젖을 물게 되면 아이는 만족한 듯이 울음을 그치고는 쪽 쪽 젖을 빨아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 ‘순전하고’란 말은 원문상으로는 앞에서 쓰인 ‘궤휼’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가 붙어서 된 말로서 ‘정직한, 진짜의, 섞인 것이 없는’ 이란 뜻입니다.
성경의 말로 하면 ‘궤휼이 전혀 없는’ 이정도의 뜻입니다.

 

그러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조금도 가감하지 않은 진짜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순도100%의 신령한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에 공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고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지극히 잘 지키지 못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사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머리를 이용하여 자꾸 우리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우리를 객관적으로 비추어서 냉정하게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록 내 자신이 억울하게 여겨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말씀에 우리의 행위를 비추어 보고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판결하고 채찍질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에 취약해서 주기적으로 악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고 그 악에서 떠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3.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그런데 왜 우리가 악독을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되느냐하면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갖난 아기로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면 이제 우리가 가진 구태, 구악들을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야 합니다.

 

어디까지요?
구원에 이를때 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리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불평할 거리, 근심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 생각지 않고 지나간 것들 중에서 말입니다.

 

4.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이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예수에게 나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형용사가 너무 깁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오랍니다.

 

사람은 버리고 하나님은 택하고
그런데 이 버리고 택하고 란 말을 원문으로 살펴본다면 약간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버린바가 되었으나’ 라는 말은 원문 상으로는 ‘허가받지 않은’ 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실로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이스라엘 땅에 오셨지만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처형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형되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부활하심으로 산 돌로서 우리에게 서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배척받는 것으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그러하셨습니다.
그는 부당한 교권과 잘못된 인습에 저항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사랑이란 한가지 대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에서...

 

모든 이들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반대했습니다.
침 뱉고 돌을 던지고 , 채찍질하며 , 창으로 찌르고 가시관을 씌우고, 옷을 벗겼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지만 죽음 앞에서 누구도 그를 위해 변호하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를 살리시고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산 돌’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죽었으나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산 돌입니다.

 

돌 자체는 무생물입니다. 그런데 그 무생물인 돌이 살아 있답니다.
역설입니다. 모순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시각으론 모순덩어리인 것 같아도 체험적으로는 진리입니다.

 

2:5절에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산 돌은 예수님을 가르킵니다.
그런데 이 산돌은 복수형으로 쓰여졌습니다. 즉 ‘산 돌들’이란 말입니다. 우리 각자가 모두 ‘산 돌’이신 예수와 같이 되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산 돌 들’이 모여서 신령한 집, 즉 교회를 세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의 모든 구악을 버리고 ‘산 돌’이신 예수를 본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산 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그 산돌들이 모여서 신령한 집, 즉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산 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악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구악을 벗어버림으로서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배척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네 삶의 노정이 피곤하고 어려워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 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는 택함을 입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진정한 주인으로부터 택함을 받는 다는 것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진짜로 어리석은 이는 우리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름만 교회라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라고 이름붙이고서도 1절의 말씀처럼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들이 판을 치는 곳이라면 그것은 사단의 회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룬다면 그 회 역시 썩은 회이며 아무러한 능력도 나타내지 못하는 썩어 냄새나는 부끄러운 단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 각자는 모두 각자가 산 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산 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집이야 말로 오늘 같은 난세를 맞아 세상을 구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찬란하게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며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그런 악이 아직도 남아있습니까? 그러면 과감하게 구악을 벗어버립시다. 그래서 신령한 젖으로 양육받읍시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중 단 하나의 죽은 돌이라도 끼여있다면 이미 그 집은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 집은 산 돌로 지어진 살아있는 집이기 때문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 돌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산 돌이어야 하며 우리가 이루는 공동체, 신령한 집을 위해서도 우리는 산 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운데 악을 버립시다.
비록 모양이라도 버립시다.

 

그래서 우리가 모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요
우리가 지은 집은 살아있는 신령한 집이 되게 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살고, 교회가 살고, 나아가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일 것입니다.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립시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산 돌이 됩시다
아니 산 돌이신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그래서 산 돌들이 모여서 살아있는 신령한 집을 만듭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정된 교회를 만듭시다.
세상사람들에게 교회란 원래 이런 곳이라는 것을 우리가 한번 보여줍시다.
그래서 이 신령한 집에 들어온 이들에게는 신령한 것들이 공급되고 안식을 얻으며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게되는 놀라운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는 산 돌이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악하지 않기에 버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져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산 돌이 되게하시고 신령한 집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은 신령한 집이 세상사람들에게 진정한 진리와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고 , 이 집에 들어오는 이마다 신령한 것을 공급받고 , 새로운 희망과 꿈으로 충만해서 세상을 살아가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모두 각자 각자 구악을 벋어버리고 산 돌이신 예수를 본 받읍시다.
그렇게 살아갈 일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5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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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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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남과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 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꼬마시절의 약간의 자기자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픈 고백을 쓰고 싶은 밤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았습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습니다. 학교는 가고 싶었고, 다리는 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중학교 선생님이 사연을 알고, 저를 매우 아껴주시기 까지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예쁜 음악 선생님이었습니다. 나는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음악 감상을 참 좋아하고, 피아노 건반 누르는 그 감촉을 매우 좋아합니다. 뭐... 피아노를 칠 줄은 모릅니다.

 

음악 선생님의 등에 업혀서 학교에 등교하자, 그 즉시 아이들의 부러움과 미움을 같이 사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몸이 아파서 학교를 갈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국민학교 (초등학교) 시절에, 반에서 남학생 1등을 하던 실력은 있어서, 중학교 1학년 과정은 제법 독학으로 버텨나갔습니다. 쉬운 도덕 과목 쯤은 수업 없어도 거의 안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공부를 싫어하는 일부 아이들은 교과서를 아예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도덕 선생님이 제 이름을 호명하면서,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이 녀석들아 ㅇㅇ만큼은 공부 좀 하자. 그 때 부터, 저는 일부 아이들의 블랙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어느 친구들은 아픈 저를 매우 잘 챙겨주었고, 어떤 친구들은 저를 매우 미워했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친구가 다가와 저를 쳤습니다. 네 글자로 학교폭력. 뭐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얼마 안 가, 저는 중학교 과정을 미련없이 접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고보니, 그 친구를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저것 나름대로(?) 잘하고, 담임 선생님에게 특별히 예쁨 받는 저를 부러워 했나 봅니다. 하하.

 

이른바 "작은 믿음"이 생기게 되면서, 저는 "내가 받은 은혜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한다" 라는 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들만큼 튼튼하고 쌩쌩하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에 무엇인가를 읽고 흡수하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10대 후반, 대안학교라 하겠죠? 야학을 다니던 무렵에는 유럽 영화가 멋있어 보여서, 비오는 날 우산도 없이 길을 다녀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창가에 앉아서 사색에 잠겨서,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를 아껴주시고 귀여워 해주시는 부산 B 대학교의 멋쟁이 야학 선생님들, 하하. 야학에서까지 얼마나 많이 예쁨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때의 추억만으로도 저는 감사한 사건들을 쓰고, 또 써내려갈 자신이 아직도 거뜬히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사람냄새가 느껴지는 온정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돌아보니까, 지나치리만큼 복 받은 10대 시절이었습니다. 사람 복은 정말이지 누구보다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복은 20대에도 어김없이 이어져서, 거대 동호회의 수장으로 행복하게 활동하였습니다. 블로그 생활도 이른바 몇 번씩 대박(?)이 나는 바람에, 100명만 와도 좋은 블로그에, 수백명씩 다녀가니까 일단은 감사부터 할 일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날 사회는 온정이 잘 보이지 않고, 나만 즐기면 되지 라는 이기적인 향기가 느껴질 때가 솔직히 있습니다. 세상이 유비쿼터스 라는 어려운 말로, 전자화 되면서 편리가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뭐 어때, 조금은 불편해도 괜찮아를 외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때로는 통장을 넣어서 돈을 빼가기도 해봅니다, 어르신들의 가치관을 이해해 보려고도 노력해봅니다. 지금은 아예 아무도 안 쓸 것 같은 공중전화카드를 지갑에 넣어다니며, 비상시에는 지하철 역에 가서 좋은 연락수단이 될 수 있음을 배워도 봅니다. 비상시 전화 번호는 머리에 저장하는 것을 훈련하는거죠. 뭐, 잘 저장되지는 않습니다. 하하.

 

결론입니다. 어쩌면, 세상이 이토록 어두워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기독교인이 더욱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씁니다. 저는 지하철을 타고, 부산 중심가 서면 방향으로 편히 앉아 가다가 나이 드신 분이 오시길래 잽싸게 그냥 자리를 양보한 적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몇 분이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양보 라는 미덕이 많이 사라졌나 봅니다. 하기야, 다들 자기 스마트폰으로 더 재밌는 것을 찾아나서기 바쁘기 때문일까요? 하하.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내가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타인을 챙기고 배려하는, 이름 없는 기독교인이 되자. 그렇게 묵묵하게 걸어가자. 2016년도의 저의 과한 바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노력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 손에는 배려를, 한 손에는 도전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힘내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었는데, 딱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는 만큼 글을 쓸 수 있다. 할 수 있는데까지 끝까지 노력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좋은 설교에, 아픈 과거를 고백하는 것은, 누구나 단점은 있지만, 누구나 노력할 수 있음을 꼭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또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배려라는 말 잊지 않기를, 자신에 대해서는 추상 같이 엄격할 수 있기를. 그런 근사한 모습의 당당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를. / 2016. 01. 17.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