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시편71:1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 24. 22:3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시편71:14-)

 

이제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가 한해 한해 지나면서 항상 감탄하는 거지만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쏘아진 화살 같습니다. 빠르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기세좋게 날아 가다가 점점 느려지고 그러다가 마침내 멈추면 그 화살은 땅에 떨어집니다. 세월이 쏜살같이 빨리 지나가지만 그 화살이 멈추면 땅에 떨어지는 것이고 그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다사다난했던 00년도를 마치고 희망찬 새해를 맞았습니다.’
매해 마다 우리의 삶은 다사 다난했습니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좋고 나쁜 일들이 무수히 섞여 있었지만 좋은날만 있었던 해가 있었나를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행복했던 해라도 몇 가지는 좋지 못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고 무슨 일이 그렇게나 많은지,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겪기도 하고 희한한 일을 보기도 하고 그렇게 우리네 삶이 흘러갑니다. 그런데요 세월이 흐르면 어김없이 새해가 다가 옵니다.

우리는 지난 해를 잊으려고 망년회를 합니다. 골치 아픈 일은 다 잊고 이제 새로운, 희망찬 새해에는 즐겁고 기쁜 일 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긋지긋했던 고난과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을 잊고 싶고 새해에는 그런 일들이 되풀이 되지 않고 우리의 여행이 즐겁기만을 바랍니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면서 드는 생각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역시 빠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방식,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전혀 모순적인 이 두 가지 생각은 그러나 정확하게 우리네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잘 나타내 줍니다. 자연도 환경도 제도도 바뀌지만 사람의 본성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성에 기인한 삶의 태도 역시 바뀌기가 어렵습니다. 어른들이 항상 하는 말입니다. “사람사는게 다 똑같지 별게 있나.”

 

여전히 우리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하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때로 협동하고 때로 다투며 그렇게 살아 갑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이것은 죄의 댓가이며 주어진 숙명이랄 수 있습니다. 죽어서야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항상 새해에 대한 소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년말이 되면 가는 해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로 애잔해 집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새해에는 경기가 더 나빠질 것이라고 합니다. 국내외의 환경이 더 나빠질 건 확실합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네가 천지를 개벽할 만큼의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전망은 맑음이 아니라 흐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새해를 맞이 하면서 저도 역시 소망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먼저 ‘나는’ 이란 말이 쓰여 있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란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수들, 나의 대적들, 다른 사람들은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지요?
본문에는 어떤 소망인지에 대해선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라는 말로 보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현재의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찬양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하여 덧붙일 말은 지금 비록 환난 중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찬양 위에 또 찬양을 더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합니다. 불평 불만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회를 뛰쳐나가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무슨 찬양까지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시편 기자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찬양에다 또 다른 찬양을 더하겠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굳건하게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결코 이대로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나를 땅속 깊이까지 내리게 하셨지만 머지않아 드셔서 나로 하여금 왕의 위엄을 회복하게 하실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현실에 대해서 불평하고 좌절하지 않고 찬양하고 더 찬양할거라는 겁니다.

 

지난해 취직에 실패하셨나요? 새해에는 반드시 취직을 할 것입니다.
지난해 시험에 떨어졌나요? 새해에는 반드시 합격할 것입니다.
지난해는 건강이 좋지 못했나요? 새해에는 건강해 질 것입니다.
지난해는 사랑하지 못했나요? 새해에는 사랑이 찾아올 것입니다.
지난해는 장사가 안 되었나요? 새해에는 장사가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되고 행복할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뭔가 잘 안되고 환난 중에서라도 찬양해야 합니다.

 

그는, 그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은 나에게 일시적인 어려움은 묵인하실지언정 결단코 나를 오래 이대로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원수의 목전에서 높이 세우셔서 정오의 해같이 빛나게 하실 것을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나의 원수와 대적까지도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며 감탄하며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전하리이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전한답니다. ‘공의’하고 ‘구원’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의 즉 ‘주의 의’는 ‘선한 자들을 자유하게 하고 변호해 주며 보상하는 의’ 즉 주의 ‘구원’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한다’는 말은 여기서 ‘기록하다, 열거하다, 선포하다, 과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기록하고 열거하며 이것을 선포하여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자랑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우리도 잘 살펴보십시다.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나의 삶에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었으면 그의 공의가 아니었으면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내린 적이 없다고요?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나의 힘으로 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나에게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나요?
내가 목숨이 위험하고 재산을 손해 볼 뻔 하고 큰 어려움에 처할 뻔하고 그랬는데 여전히 내가 이렇게 건재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연히, 재수가 좋아서, 운이 좋아서 ,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정말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우연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고난 중에 있을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그의 자비와 긍휼을 그동안 우리네 삶에서 많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세어보니까 다시금 열거해보니까 한두개가 아니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도저히 잊을 수 없어서 단지 지금의 상황 때문에 그를 욕하며 불평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고 그들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나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셨기에 나는 그의 자비와 긍휼이 다시금 나에게 미칠 것을 소망하고 그를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때요?
여러분도 그럴 수 있지요. 그래요, 우리 성도들은 충분히 그렇게 살기를, 그렇게 소망하기를, 그렇게 찬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다음으로 기자는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우리는 이 말을 ‘내가 주 여호와의 위대한 일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우리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 , 그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시겠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주의 공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꼭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더라도 책에 기록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 그것을 전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묵상해보면 오늘날도 그는 다시금 역사를 이루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지금은 사라지신게 아닙니다. 그가 돌아가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은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위대한 성경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위대하신 전능의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하나님의 공의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 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때문에 소망을 가지며 주의 공의와 구원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는 책에 기록된, 내가 실제로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역사를 묵상함으로 지금도 그때와 같은 아니 그때보다 더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임을 믿기에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3.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마지막으로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기에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내가 하나님의 교훈을 받았답니다. 여기서 ‘교훈을 받다’는 말은 원래 ‘뾰족한 막대기로 찌르다’는 의미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보다 뾰족한 막대기로 찌르면 당연히 찔린 사람은 매우 아플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교훈을 잊기가 어렵습니다. 아픔을 동반하기에 몸에 잘 새겨질 것입니다. 그래요 그래서 ‘가르치다, 교훈하다, 훈련시키다’는 뜻을 동시에 가지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에는 지적으로 무엇을 배우는 것 뿐 만 아니라 지켜 행하도록 하는 실천적 의미가 있고 또 숙달이 되도록 연습하는 것, 그리고 배우고 익힘으로 익숙해진 상태까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교훈을 받고 또 그 교훈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매로 징계받고 그래서 내 몸에 습득이 된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 몸에 익숙한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시편 기자는 그런 교훈을 이후에도 영원히 전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금 장성해 있지만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의 교훈들 하나님의 명령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내 몸에 깊이 하나님의 교훈들이 새겨져 있나요? 그러한 교훈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 뾰족한 막대기로 찔렸고 종아리로 초달을 당했나요?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했답니다. 주의 기이한 일이 뭡니까? 기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 이런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나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전해왔다는 겁니다.

 

이 본문을 보고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뭔고 하니 믿음의 일세대는 고난을 겪을 수 있지만 믿음의 이세대 부터는 일이 잘 풀린다는 말들을 옛날 어른들이 많이 했습니다. 아마 어려서부터 믿음의 부모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믿기 시작한 믿음의 일세대분들은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복을 주시고 안주시고는 오로지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고 그의 일을 우리가 어떻게 예단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세가지일을 예로 들면서 시편 기자는 자기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품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내가 체험하고 그리고 성경과 각종 문서에 기록된 거대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원수의 핍박이 심해도 나는 결코 좌절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겠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시편 기자의 구체적인 소망이 나옵니다. 앞에서는 그가 어떤 소망을 가졌는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소망을 가진다고만 나왔는데 이제부터 그는 그 구체적인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늙어 백발이 되어도 하나님이 결코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소망을 말합니다. 그냥 버리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능과 힘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수 있도록’ 버리지 말아달라고 말합니다.

 

내가 늙어서 노쇠했나요? 그러함에도 하나님이 나를 들어 서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망은 나의 노쇠와 함께 쇠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할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결코 내가 소망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산 증인이요 선포자일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주의 능력’과 ‘주의 힘’은 각각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서 주의 능력은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로운 구원과 축복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주의 힘’은 ‘주의 팔’을 말하지요. 이 말은 ‘당신께서 팔을 펴사 이루신 일, 그 힘을’ 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말도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누가 우리를 다시 살립니까?
하나님이요.
어떤 하나님이지요?
“우리에게 심한 고난을 보이신”

 

이 본문 시편의 기자는 이제까지 심한 고난 중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에게 여전히 소망을 품고 그를 더욱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지만 우리에게 항상 기쁨과 평안만을 주시는 분은 아니시네요. 여러 가지 심한 고난도 주시네요. 그럼에도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고난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하는 말 있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다.’

이어서 시편 기자는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창대하게 하시고’에서 ‘창대’는 ‘나의 위대함’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 또는 왕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창대하게 하시고’는 왕의 위엄까지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말입니다. 아마 그는 왕이었나 봅니다. 그 정도로 높아져야 비로소 ‘창대하다’라는 말을 쓸 수 있나 봅니다.

 

여러분도 창대해 지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미 우리는 창대한자입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질이 따르는 창대한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라는 말은 이제 태도를 변경해서 수고에서 놓여 안심시켜달라는 말입니다. 당신의 진노를 풀어서 안심시켜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당신의 나에 대한 진노를 푸시고 안심시켜 주십시오.
제가 아버지의 목전에서 부족하여 저울에 달아 보니까 모자라서 이런 벌도 받고 저런 벌도 받았는데 이제 그런 벌을 그만두시고 나를 안심시켜주시고 상한 나를 위로해 달라는 소망을 말합니다.

 

초달하기 만하고 위로가 없다면 부자의 관계가 계속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미워서 초달한 것이 아니라 나를 더 잘되게 하려고 하신 것이기에 그는 나에게 적당히 진노하시고 다시 상한 나를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안심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더 나은 모습으로 다시금 주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장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 놀라며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역사의 중심에 내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나를 위해서 고난을 주셨다면 이제는 나를 그 고난에서 놓여나서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미워서 나를 죽이려고 그렇게 하신게 아니라 내가 잘되라고 나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을 내가 아오니 주여 이제 나를 그 고난에서 놓여서 안심하고 평안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도 그가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지만 이제는 그의 보호와 인내가 더욱 더하여져서 창대하고 회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젊었을 때의 나와 같이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 하도록 해 주세요 라고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노쇠해도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허약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그 놀라운 경험을 다른이에게 자랑하고 선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결단코 버리시지 않고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위로하시며 회복시키실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예전에 나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이제 다시 나타날 것임을 내가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그 장엄한 역사가 이제 다시 나타날 것임을 내가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믿습니다. 이땅의 성도들이 믿습니다. 아버지여 그 놀라운 역사를 다시 한번 일으켜 주시옵소서.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성경의 교훈, 내 마음에 새겨지며 내 몸에 각인된 그 성경의 교훈을 내가 믿습니다.

 

아버지 내가 비록 환난 중에 있을지라도 주를 찬양했사오니 이제 부터는 그 환난에서 나를 돌이키게 하시고 주의 뜻을 돌이키시사 나에게 평안과 안심을 주십시오. 저는 약하고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더 자주, 더 잘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새해에 여러분과 가정에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새해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나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고 또 일년 동안 아버지와 더불어 동행하는 자가 되게 하시며 항상 주의 날개아래 거하게 하옵소서.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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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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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새해에는 병상 중에 있는 어머니가 아프시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작년 2015년도에 병간호로 지나치게 에너지를 쏟아붓다가 과로로 입원해 버렸던 스스로를 다시 돌이켜보며, 새해에는 우선 스스로를 잘 지켜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새해에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잘 견뎌내며, 잘 참아내는 스스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픔에 마주 서서, 열심히 싸워나가는 가열찬 인생. 그런 모습들을 꿈꿔봅니다.

 

더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더 알차게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누군가는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오늘 하루인데, 그런 귀중한 시간을 아깝게 낭비하지 않기를, 아낌없이 최선을 다해가면서 차라리 상처입더라도 괜찮아 라며 견뎌보기를 응원합니다. 그래요.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아이콘이 될 수 있기를,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기를. 잘못을 했을 때는 (오늘의 설교처럼) 교훈을 기억해 아파서 되돌아오며, 어려움이 있을 때는 결코 좌절치 않고 기도할 수 있기를, 그렇게 성도답게 멋있고 근사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저는 다만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고난 끝에, 아름다운 축복도 늘 함께 있기 때문에, 끝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그런 겸손한 신앙인이 되기를.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며... / 2016. 01. 24.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