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천사와 씨름한 야곱(창세기32: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2. 1. 00:51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기32:21-)

 

우리는 큰 걱정거리가 있으면 밤잠을 설칩니다. 근심 걱정 때문에 아예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밤이 영원히 지속되고 새날이 오지 않기를 바리기도 합니다. 아침이 오는게 무섭습니다. 다가오는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얍복 강을 건너야 하고 그러고 조금 가면 형을 만나게 됩니다. 무려 20년 만에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형을 만나서 기대가 돼서 너무 기뻐서 잠이 안오는게 아닙니다. 걱정이 되어서 잠이 안오는 겁니다.

 

형은 지금 무려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에로 마주 오고 있답니다. 이 말은 지금 형이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칫하면 삽시간에 자기와 가족과 가축들이 전멸하거나 재산을 몽땅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가와서 어떻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지금 잠이 오지 않습니다.
왜냐면 야곱이 20년 전에 형에게 갈 축복기도를 가로채고 하란으로 도망을 갔기 때문입니다. 죄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맞지만 어쨌든 지금 야곱은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21절에 보니까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야곱은 형에게 먼저 예물을 보내어 형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합니다. 그것도 예물을 몇 개의 떼로 나누어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물을 가지고 가는 종에게는 야곱 자신을 ‘형의 종’이라고 말하도록 시켰습니다. 형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어서 목숨을 구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최대한 간구해서 자기의 목숨과 재물을 보존하려고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리고도 그는 아직 형이 두려워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강 이쪽 편에서 밤을 지샙니다. 얍복강은 사실 아주 작은 강입니다. 그러나 이 강은 요단 동편의 산악지대를 통과하면서 물살이 세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나 건널 수는 없습니다. 잘못하면 물에 떠내려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형의 군대가 강하다고 해도 강 이편에 있는 한 그는 안전하다는 말도 됩니다.  얍복강을 건널 수 있는 배가 없이 그냥 마구잡이로 말을 탄 채로 강에 뛰어들면 센 물살에 휩쓸려 기진맥진해 지거나 떠내려 가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얍복강 이편에 있는 한 야곱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일단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갔다가 유사시에 되돌아 나올 수가 없다는 말도 됩니다. 일단 한번 강을 건너 버리면 그때는 정말 도망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지금 자기의 인간적인 계책이 효과가 있어서 형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그래서 강 이편에서 미적거리다가 마침내 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밤에 몰래 네명의 아내와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모든 가축과 종과 재물도 몽땅 건너게 합니다. 밤에 이렇게 건너게 한 것은 상대가 모르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여기서 ‘나루’는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을 말합니다. 야곱은 이 여울의 존재를 형에게 비밀로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나루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었나 봅니다. 혹여라도 낮에 강을 건넜다가 에서가 이 여울의 존재를 알게 되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기 때문에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밤에 몰래 건너게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뒤에 혼자 남았답니다. 얍복강 이편에 남은 거지요. 이 사람의 마음심보가 지극히 고약합니다. 식구와 가축들이 모두 죽어도 자기는 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형 에서가 조카들을 살려 두면, 그러면 자기도 안 죽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때서야 건너려고 한 건지도 모릅니다. 만일 자기의 자녀들이 아내들이 에서에게 죽는다면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도망가려고 남아 있는 지도 모릅니다.

 

야곱에게는 돈도 중요하고 아내도 중요하고 자식도 중요하지만 자기 목숨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야곱은 항상 이렇게 일생을 살았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잔머리를 잘 굴리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잡초 같은 생명력의 소유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도덕이니 인간의 도리니 하는건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오늘 설교의 주인공입니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주인공은 항상 선한데 이 사람은 악당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이 악당이 바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야곱은 한밤중에 자기의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다 강을 건너게 하고 혼자 남아서 고뇌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했는지 자기의 머리를 쥐어짜면서 계책을 내고 있었는지 아니면 두려움과 근심으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경에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 씨름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씨름을 야곱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 시작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씨름의 주도권도 ‘어떤 사람’이 쥐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부분에서는 야곱이 주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주어이기 때문이지요.
야곱은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씨름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먼지에 쌓이다’는 말입니다. 즉 땅에서 먼지가 일어나 쌓일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다는 말입니다. 규칙이 있고 간단하게 끝나는 우리나라의 씨름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밤에 도깨비하고 싸웠다는 그런 옛날 얘기를 떠올리면 안됩니다. 재미를 위해서 싸운게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아마 이 싸움은 ‘어떤 사람’이 유리했지만 그래도 쉽게 야곱을 이기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맞으면서도 죽어도 못놓는다는 그런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너무 끈덕지기 때문에 떼어 놓을 수 없는 거머리같은 야곱을 만나서 진절머리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 버립니다. 그러니까 엉덩이의 골반뼈를 쳤다는 말입니다. 물론 본문에는 ‘쳤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원문은 ‘닿다, 만지다’라는 표현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힘을 주어 친게 아니라 손으로 슬쩍 골반뼈를 만졌다는 말입니다. 손이 닿은 것 뿐인데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진 것입니다.

 

이번 성경번역에서는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고 번역되었는데 이전에는 ‘위골되었다’고 번역되었습니다. 원문으로 보면 뼈가 부러진 것이 맞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그래서 뼈가 삐져나와서 탈골되거나 부러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냥 뼈가 어긋나서 뼈를 다시 맞추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가벼운 상태가 아닙니다.
그만큼 야곱과 어떤 사람의 싸움이 격렬했던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 자꾸 우리의 전래동화가 생각납니다. 밤새도록 도깨비하고 씨름했다는. 그런데 여기서 야곱과 싸운 ‘그 사람’은 ‘이제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하라’고 말합니다. ‘제발 좀 보내다오’라고 부탁한 것은 아닙니다. 원문의 뉘앙스는 강력하게 명령한 것입니다. ‘나를 가게해라’ 다리뼈가 부러져서 다리를 절고 무력해진 야곱을 그냥 두고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야곱에게 ‘나를 가게하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야곱의 대답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가게 하지 아나하겠나이다’라는 점잖은 말은 원문상으로는 ‘절대 당신을 보내지 않겠다’는 매우 강력한 뜻입니다.

 

갑자기 야곱이 그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말한 까닭으로 성경학자들은 두 사람이 싸울 때 처음에는 야곱은 자기의 상대가 천사인지 몰랐지만 싸우면서 상대방이 천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고 천사의 축복을 받으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 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야곱은 이미 20년 전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축복을 받았고 그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고 자기의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야곱의 요구를 들은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제 보니 이 사람들은 서로 이름도 모르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의 이름을 물어보는 그 사람에게 “야곱이니이다”라고 자기의 이름을 말합니다.
야곱이 스스로를 야곱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야곱인데 자기를 에서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그냥 자기 이름을 말하면 됩니다. 야곱.

 

그런데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야곱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또는 ‘속이는 자’ 라는 말입니다. ‘속이는 자’ 이 말은 한마디로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야곱은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한 것이 됩니다. 태어날 때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고 이름했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거짓말을 잘해서 야곱이라고 한 줄 알겁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 성격, 속성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란 이름은 그가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실 야곱의 이름은 너무나 그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일생동안 속이며 사기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잔머리 굴려가면서 이기적으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그의 이름이 야곱인데 대해서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내 이름이 야곱인데 네가 뭐 보태준거 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출생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 ‘제 이름이 야곱 인데요’ 라는 말을 듣는다면 ‘아, 이 사람은 정말 거짓말을 잘하는 갑다. 도데체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했으면 이름이 거짓말쟁이가 되었을까?’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축복하기 전에 그의 이름을 물어 본 것은 야곱에게 스스로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고 새사람이 되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아는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고 내가 거짓말쟁이 야곱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이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을 때 ‘예, 하나님 저는 성도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이가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실 때 ‘예, 저는 성도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래요, 우리는 가끔가다 잊기도 하지만 우리의 이름은 성도입니다. 거룩한 무리! 그런데 그 이름대로 우리가 거룩한 무리가 맞습니까?

 

우리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려면 우리의 실체를 냉정하게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이름이 야곱입니다’라고 하는 대답은 실상은 야곱에게 있어 하나의 진실된 회개요 신앙고백입니다.

 

‘아, 내가 정말 인생을 막 살았구나!’
‘내가 지금 이렇게 전전긍긍하게 된 것이 나의 죄 때문이구나!’
‘내가 인생을 돌이켜보니 내가 너무 거짓말을 많이 했구나!’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그렇게 속이다가 결국 탈이 나는구나!’
‘내가 지금 이런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은 내가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야곱의 이름을 들은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그 대상을 소유한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은 야곱이 이제부터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고 해서 ‘이스라엘’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니 말도 안됩니다. 하나님과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신과 겨루어 이겼다면 그가 신이지 인간입니까? 말이 안됩니다.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뭘까요?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적과) 싸운 사람이라는 해석이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서 적과 싸웠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편이 되어 세상과 싸우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하나님이 힘이 모자라서 사람과 한편을 먹고 힘을 합쳤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힘이 없어서 하나님의 힘을 덧입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싸움을 주도하고 내가 보조자가 된다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겼다’는 말은 능력을 보였다는 표현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군사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 앞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 싸움의 대장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싸우고 하나님이 도움을 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위해 싸우시고 그래서 내가 그의 뒤에서 졸졸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분의 지휘를 받아 싸우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잘 까먹습니다. 그걸 잊어버립니다. 생각은 그렇게 하는데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요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우리의 의지와 자부심과 자신감을 그분 앞에 내려놓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따르면 됩니다. 우리 생각대로, 우리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방식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고 말하고는 축복하고 떠났습니다.
야곱은 자기하고 싸운 상대방의 이름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답니다. 왜냐면 야곱은 이미 상대방이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았고 그에게 물어 본 것은 자기의 짐작이 맞는지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합니다. 야곱은 신기한 경험을 한겁니다. 사실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은 죽는다는게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고 살았지요. 그게 신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에서 야곱의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왜 사람이 하나님과 대면하면 죽을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으로 죄악에는 돌진해서 쳐부수려하는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게 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용서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본능적으로 죄악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야곱은 자기처럼 추한 죄인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도 그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은 것에 대해서 위로를 얻은 것입니다.

 

우리를 한번 돌아 볼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지금까지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만을 바라고 전후좌우만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잘 잊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래요, 사람과의 관계만 생각하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일 나중으로 미루고 아니면 아예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막연히 그는 나의 아버지이시므로 내편이겠거니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나의 상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물어 보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거짓말쟁이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도 죄인 죄인 하니까 죄인이 아무런 절차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공로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 짐을 얻은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우리가 그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불러야 할 판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는데도 안죽고 살았네?’
야곱도 자기가 안죽고 산 것을 신기해 했듯이 우리도 역시 신기해 하게 될 겁니다. ‘내가 어떻게 죽지 않을 수가 있었지?’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우리에 대한 처벌을 잠시 유보하신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죄를 지어도 절대로 용서만 하고 복만 내려주는 분이라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물으실 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실 때 ‘성도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은 성공한 삶입니다. 그리고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면 앞으로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하나님과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 하나님의 적과 싸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고,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들을 골라가면서 하고 그러고도 전혀 죄의식도 없고, 하나님 앞에 서있다고 하는 신전의식도 없고 그렇게 사는게 바로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우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고, 세상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에 서 있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감사하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성도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성도들 모두 그러한 삶을 사는 멋진 삶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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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새해의 목표를 성도답게 살기로 정해도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이 성도다운지는 본문에 이미 다 나와 있네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면 됩니다. 나부터가 깨끗한 정신과 따뜻한 마음을 겸비하고, 조금 더 부지런하면 됩니다. 저는 늘 그게 어렵더라고요. 나 먼저 잘하기, 나 먼저 느긋하게 가기. 이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자꾸 더 빨리 가고 싶어지고, 자꾸 남들 보다 뭐 하나라도 잘난 척 하고 싶어하고... 그런 본성을 들여다보면서 새삼 놀라곤 합니다. 아휴, 이 죄인.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그 찬양이 종종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형편을 아시고, 늘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당신을 믿고 의지할 뿐이지요. 찬양을 하는데 보면대가 생기게 되자 너무 좋았습니다. 무슨 글을 써볼까 하는데, 자꾸 영화에 끌리게 되자 또 기뻤습니다. 매주 조금씩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또 한 해가 두근거리고 설레기 시작합니다.

 

 나는 시간을 소홀히 보내는 죄인이라, 여전히 나만 깨끗한 척 하는 위선자라, 오늘도 마음이 무거울 때 물론 있지만, 그런데도, 주님 당신은 언제라도 돌아오라, 내게로 나오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그저 정직한 결과에 만족하도록, 오늘을 살아내겠습니다. 나는 겨우 그 정도의 사람이기에, 작은 돌멩이 밖에 안 될지라도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힘내서 살겠습니다.

 

 목사님 댁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요.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가 길고 긴 강을 헤엄쳐서, 마침내 장엄한 큰 바다를 바라보듯이, 우선은 작은 강이라도 헤엄쳐 나가겠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나는 그래도 열심히 당신 편에 서고 싶어서, 당신이 말하는 것을 지키려고 노력해 나가는, 성도입니다. 라고 고백하렵니다. /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