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벧엘로 올라가라2(창세기35:9-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2. 2. 17:23

 

벧엘로 올라가라 2 (창세기35:9-15)

 

벧엘로 올라가라!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에게는 가장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세속화 되었고 우리는 더러워졌으며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때때로 우리는 그 옛날 하나님을 만났던 바로 그곳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초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사이에 죄악을 제하고 악을 제하고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지는 벌써 십년이 넘었습니다. 에서도 만났고 세겜 사건도 있었고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아직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기는 했습니다. 얍복강을 넘어 오기는 했습니다. 에서를 만나서 화해하기는 했습니다. 그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중간에 하나님의 군대 진영을 만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하기도 하고 죽고 죽이는 온갖 일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야곱은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술한 것입니다.
 
야곱의 귀향여정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은 그곳에서 네가 이곳으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얍복강을 건너올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벧엘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지켜 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야곱은 아직까지 여전히 귀향 중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갈 때 까지, 아니 적어도 벧엘로 올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이 드디어 벧엘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셨고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야곱의 밧단 아람으로의 여행은 그래서 20년 만에 끝난 것이 아니라 무려 30년이나 걸리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고 가나안으로 들어왔지만 벧엘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이방 하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하나님의 군대진영을 보았음에도 그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낯선 신입니다. 아버지의 신이요 할아버지의 신이지 여전히 자기의 신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가나안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비로소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생각났고 그가 그 옛날 30년 전에 했던 벧엘에서의 서원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는 당면한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비로소 먹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평안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이가 드뭅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렵고 기도거리가 생기면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기도하고 눈물 흘리며 애타게 부르짖습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이를 바라보시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너희는 꼭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그렇게 나를 찾니?’ 하시며 씁쓸해 하실 겁니다.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에, 평소에 잘 하십시다.

 

때로 우리는 죄악 중에 헤매이며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까맣게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세상에서 정신없이 살아 갈 때가 있습니다. 내 머리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망각하고 그가 나를 주시하고 계심을 망각하고 내가 하나님의 앞에 있음을 망각하고 앞뒤양옆만을 바라보고 정신없이 인간의 방법을 사용하며 촤충우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가 어려움이 닥친다면, 세상일이 너무 막막해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하나님을 생각하고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 옛날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나를 만나서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때요?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그 옛날 가졌던 초심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까?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인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약속과 서원을 기억하고 계시며 여전히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을 끊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벧엘에서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제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데 복의 내용이 여기 본문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라
왕들의 조상이 되리라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리라

 

이렇게 네가지의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가짓수는 많지만 가만히 보면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복에다가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신 것 하나 정도가 야곱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얍복 강가에서 이미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건 재탕 삼탕의 복입니까?

 

그런데 이런 약속이 다시금 주어진 것은 사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하신 약속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벧엘에서 하신 약속과 자기가 서원한 내용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금 벧엘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잊지 않도록 확인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종종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약속도 잊고 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복의 내용도 잊고 자기가 어떻게 하겠다고 맹세한 서원의 내용도 잊고 그냥 세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 갑니다.
그래놓고는 이렇게 핑계합니다.
“사는게 뭔지...산다고 바빠서....”

 

웃기지 않습니까?
삶의 원천이신 분이 여기 계신데 다른데 가서 정신없이 설치다가 이제 와서야 사는게 바빠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렸다고 한다면 얼마나 웃깁니까?
우리가 자나깨나 그렇게나 받고 싶어하는 복을 주실 복의 원천이 여기 계신데 엉뚱한데서 복을 받으려고 심력을 소모하다가 이제야 그동안 너무 바빠서...같은 소리를 하면서 뒷통수를 긁어봐야 지나온 세월만 아까운 겁니다.

 

우리가 본문을 잘 보면 하나님은 이방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십니다. 9절에 보면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고”
그러나 야곱이 가나안에 들어온 것은 지금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도 훨씬 전, 무려 10년 전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야곱이 완전한 귀향을 한 것으로는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약속의 장소인 벧엘을 찾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될 수 있으면 벧엘로 가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자기 멋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성도라고 이름하고 교회안에 들어와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그의 명령대로 살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무늬만 성도지 결코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은게 아닙니다.

 

남들은 성도라고 부를지 몰라도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눈에는 성도가 아니라 세상사람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나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복주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에서의 삶이 너무 바빠서 그 약속과 그 감격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힘들면 먼저 생각해야 될 곳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 벧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나에게 힘든 일이 생기기 전에는 벧엘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눈에 보이는 비옥한 곳을 따라 가고 자기에게 유리한 곳에 서고 이익을 따라서 행동할 뿐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살이에 힘들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고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을 때 드렸던 서원대로 행하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약속대로 살지 못했기에 우리가 드린 서원대로 행하지 못했기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올라갈 벧엘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복의 내용을 우리가 하나 하나씩 살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그래요,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거짓말쟁이 였습니다. ‘주님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한 약속의 맹세를 정말로 쉽게 어깁니다.

 

그것도 그냥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약속 중에서 제일 쉽게 어기고 까먹는 겁니다. 나에게 힘이 있어 보이고 돈이 있어 보이고 그래서 나에게 뭔가 이득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힘있는 자와의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저버립니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내 형편을 아시고 용서해 주실거야!’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면 그도 역시 나를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면 그도 역시 나를 중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나 받고 싶은 모든 근원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데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그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한다면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과 더불어 한편이 되어서 세상과 싸워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파고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다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관이 있습니다. 족보도 있습니다. 이걸 우리는 잘 못느끼지만 외국 사람들은 엄청나게 부러워합니다.

 

수백년이 넘어가는 족보는 그 자체로 귀족의 혈통을 자랑하는 것이므로 미국 사람들의 입장에선 너무나 부러운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자기 소개 시간에 이 족보를 자랑했는데 교수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의 부러움이 굉장했습니다. 제 족보 자랑을 듣고 있던 교수는 자기는 아일랜드 후손인데 자기집안도 족보가 있었는데 남북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아마 부러워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보통은 성씨의 시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씨족의 조상이 된 시조가 아니라도 중간에 아주 잘난 사람이 나오면 족보에서는 그런 사람을 중시조라고 추켜세웁니다.
심지어 더 잘난 사람이 나오면 새로운 본관을 가지고 한 개의 씨족을 만들기도 합니다.

 

보세요, 우리는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유대인들과 아랍 여러 족속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아버지도 있습니다. 데라. 그런데도 아무도 데라를 자기네의 조상으로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모두 아브라함만 이야기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브라함이 너무 훌륭했기에 그는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그 조상이 된 것입니다.

 

본문의 야곱도 비록 아브라함만큼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조상이 됩니다. 그의 이름을 딴 새로운 족속이 생긴 겁니다. 그건 그의 후손들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자랑스러워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그런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 집안 사람들이 우리 집안에서 제일 잘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만 해도 굉장한 것일 텐데 우리의 자손 중에 왕들이 나온답니다. 그건 왕가가 된다는 말이지요. 모든 집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집안이 왕의 가문이겠지요.

 

하나님은 벧엘을 찾은 야곱에게 바로 그런 복을 허락하신 겁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은 어떻습니까?
생육하라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작정 아이만 많이 낳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손들을 열매처럼 소중히 여기며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번성하라는 말은 ‘증가하라’ 또는 ‘크게 되라’는 뜻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멸망기인 7세기에 인구는 약2000만 정도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각각 600-700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나라의 삼국, 우리나라 말고 중국의 삼국시대 인구는 그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지금의 중국땅 곳곳에 이민족들이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나라 민족들도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는 남북한하고 해외 동포들까지 해서 약 8000만인데 중국은 인구가 거의 14억에서 20억에 달합니다.
 
한때 하나만 낳아 잘기르자고 하던 때도 있었지만 인구의 번성이야 말로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이제는 모두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가 안되고 일본이 쇠퇴하는 것도 모두 아이를 안낳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 일본이나 중국까지도 더 많은 아이를 낳도록 하기위해서 묘책을 짜내고 있습니다. 물론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이 단순해 보이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은 경제적 번영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안전과 패권까지 약속하는 복인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복을 하나님은 야곱에게 주신 것입니다. 밧단 아람에서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우리도 국가적으로 벧엘로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 언약한 땅을 야곱에게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에게도 그 땅을 물려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땅을 유업으로 얻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우리네 강토는 한때 만주와 북부 중국까지 이르는 광활한 것이었고 백제의 근초고왕은 남중국의 여러 지역과 일본을 아우르는 강대한 해상제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거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겨우 한반도에 웅크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것도 언제 중국과 일본에 빼앗길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중한 땅, 약속의 땅을 너에게 줄뿐만 아니라 너의 후손에게까지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영적인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속된 것을 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음란과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우상의 가증한 것들과 포악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사가 교회돈으로 수억대의 도박을 하고 목사가 중간에 개입해서 치매노인의 재산을 갈취하고 목사가 어쩌고 저쩌고....저는 솔직히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납니다. 차마 그 기사의 말미에 달려있는 댓글을 보기가 겁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 기사는 제목만 보고 넘어가는데 그래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이게 바로 야곱이 제하여 버렸던 땅에 묻었던 우상을 섬기는 드라빔과 점치는 도구인 귀거리입니다.

 

영적으로 추악한 우리는 돈은 세상에서 제일로 밝힙니다. 게다가 음란함과 거짓과 사기와 잔인함으로 억울한 이들을 마구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이 땅을 헬조선이라고 부를까요?

 

이제 우리들 사이에 이러한 음란함과 죄악된 것들을 모두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깨끗해 져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억울함을 밝히고 죄악을 일소하며 성결하여 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라도 보존하고 국민들의 삶도 보존하고 이 어려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안팎에서 부단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기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 땅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자 하는 의인들이 있습니다. 아직 이 땅이 완전히 기울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그 땅, 우리가 가장 어려웠을 때 나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시고 복주셨던 약속의 땅 벧엘로 올라갑시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성결을 회복합시다. 우리 가운데 정의를 회복합시다. 우리가운데서 우상의 음란함과 광포를 제합시다.

 

사람들보고 제하라고 할게 없고요 우리 믿는 성도부터 먼저 하나님의 법을 회복합시다. 우리 가운데 믿음을 회복합시다. 그래서 영적인 벧엘에서 그 옛날 야곱이 받았던 그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이 땅이 복을 받고 이 땅이 보다 더 좋은 사회가 되도록 합시다.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올 한해 2016년에도 승리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깨끗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와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의 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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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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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남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라는 말이 콕 가슴을 교훈처럼 찔러옵니다. 남들이 바뀌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 교만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성경 말씀처럼, 먼저 자신이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가를 살피기만 하면 됩니다. 내 안에 정직하지 못한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내 안에 정말로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고 있는가를 되물어 보면 좋겠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자는 2016년 우리 교회의 표어이기도 합니다. 즉 이 표어의 뜻은, 처음 교회를 세울 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헌신하며, 그렇게 나아가면 좋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그 마음을 되찾아 나간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를 회복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초연한 마음을 회복하며, 또한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복까지 받아 누린다면, 그런 인생. 너무나 눈부시지 않나요. 나는 그런 꿈을 꿉니다. 그런 인생이 되기 위하여, 가슴 설레하며 한 해를 보낸다면 좋겠습니다. 힘내시길 응원합니다. / 2016. 02.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