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네 기름그릇을 준비하라(열왕기하4: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2. 5. 17:27

 

네 기름그릇을 준비하라 (열왕기하4:1-)

 

우리는 신년에 연일 증시가 폭락하고 환율이 5년몇개월만에 최고로 올랐다는 조금은 우울한 소식을 접합니다. 서민들은 날씨만큼이나 경제 한파에 떨고 있습니다. 아마 작년말에 많은 이들이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을 것입니다. 각종 물가는 줄줄이 오르고 있거나 오를 예정이지만 젊은이들의 취업률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가까운 시일내에 경제가 좋아질 전망이 전혀 없다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네의 도덕관념이 하락해서 예전이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끔찍한 범죄가 늘어납니다.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존비속살해같은 소식은 이제 전혀 이상한게 아니라 일상화된 것 같이 여겨집니다. 이건 입에 담기도 끔찍하니 대강 넘어 갑시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민계 열풍이 분답니다. 이민가기위해서 돈을 모으는 거지요. 경쟁에 지쳤고 갑질에 지쳤고 암담한 현실에 지쳤답니다. 그래요 그 심정을 제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 가야 합니다. 겨우 아시아의 극동 한반도 남쪽 끝부분만 남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기서 삶을 영위해야만 합니다. 말이 쉽지 남의 나라에 가서 사는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아버지세대는 온전히 희생할 각오를 해야 겨우 2세대부터는 그래도 좀 그 땅에서 발붙이고 있을 수 있는데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곳에 특별한게 있을 수 없습니다. 오십보 백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2016년을 맞이하면서 올해에 이루고 싶은 여러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원을 이루려면 뭔가 필요합니다. 빽, 돈, 인맥, 하다 안되면 천재적인 머리? 그래요, 머리는 좀 안될 것 같기도 합니다. 서울대 경제학부를 나와도 취업률이 반밖에 안된다니!

 

취업하려는 사람들은 쏟아져 나오는데 일자리는 점점 줄어 듭니다. 그래도 나름 연봉얼마에 정규직이 되려고 하면 정말 국회의원 빽이나 장관 빽으로도 어렵습니다. 몇몇 장관하고 국회의원들이 빽을 행사해서 취직을 시켜줬다가 지금 언론에 오르내려서 망신을 당하고 사법처리까지 거론되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경기가 안좋아서 우리나라 경기가 안좋을 수 밖에 없다는데 제가 가서 중국경기를 활성화 시킬 수도 없고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요?

 

지난 연말 무차별적으로 많은 이들을 정리해고를 한 기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날씨만큼이나 체감경기가 한파수준입니다. 그리고도 전망은 불투명입니다. 돈을 수백조씩 쌓아논 기업들은 장래의 불투명한 여건에서 살아 나려면 돈이 있어야 된다면서 사내유보금을 그대로 쌓아놓지 투자를 늘리지 않습니다. 채용규모도 줄이거나 중단합니다. 돈이 돌지 않습니다. 뭐 백몇십만원짜리 비정규직만 점점 늘어납니다. 겨우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습니다. 그러니 경기가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탄식합니다. ‘쓸 돈이 있어야 쓰지!’

1.죽은 선지생도의 아내가 부르짖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의 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의 삶은 정말 처절할 만큼 비참했습니다.
1절에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한 선지생도가 죽었는데 그 사람이 빚이 있었고 그 빚을 갚을 수 없어서 채권자가 이제 선지 생도의 두 아이를 노예로 데리고 가려고 한다고 그 선지생도의 아내가 엘리사에게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아마 이스라엘에는 선지학교가 있어서 선지자를 양성했던 모양인데 벧엘과 길갈과 여리고에 선지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선지자는 여기를 순회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사무엘 시대에 ‘선지자의 무리’라는 기록이 나오다가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 시대에 다시 ‘선지 생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개정판에서는 ‘선지자의 제자’라고 하고 있는데 원문상으로는 ‘선지자들의 아들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는 제잔데 아마 선지자들과는 영적으로 아들이라고 불릴만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명목상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처지다 보니 아마 이들은 선생과 제자로서가 아니라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굳게 결합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어려운 여건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어느 때 보다  더 서로를 신뢰하고 똘똘 뭉치고 도와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 중의 한명이 죽었는데 빚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선지생도의 아내에게는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고 결국은 아들들이 빚 대신 노예가 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굉장한 나라지요? 빚을 갚지 못했다고 선지 생도의 아들들이 노예가 된다니!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하나님의 편이라고 하는 말이 부끄럽습니다.
 
사실 이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그 땅에서 레위족속이 사라졌고 음란과 이기심이 판을 치고 있었으며 서민들의 삶은 보기가 딱할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기근이 툭하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 우상을 섬기면 내가 기근으로 벌을 주겠다’고 하셨고 우상숭배가 맹렬히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기근을 몇 년 걸러 계속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살기가 어려울수록 왕과 관리들은 권세를 이용해서, 부자들은 돈을 이용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짰고 그럼에도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바알과 아세라를 더 의지했습니다. 우상의 복을 받아서 이 상황을 타개하겠다고.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고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하하,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한 선지생도는 죽었고 이제 그 자식들이 노예가 될 판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선지생도는 전혀 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는 일찍 죽어버렸고 가족들은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고 자식들은 노예가 될 판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보호하시지 않는 겁니까? 그냥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선지 생도인데 미래의 선지자가 되려고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자의 말로가 이런 것입니까? 여기의 부르짖음이란 용어는 주로 약자들이 절망의 상황속에서 그들의 통치자나 하나님에게 간절히 탄원하여 부르짖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여자가 사용한 경외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내적 삶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선지생도의 아내의 부르짖음에는 이런 절규가 서려있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다 죽게 생겼는데 내 아들들이 노예가 되고 나의 남편은 죽어 버렸고 앞으로 도저히 어찌할 줄 몰라 앞이 캄캄한데 당신은 지금 어디계십니까?’라는 절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 남편이 얼마나 당신을 경외했는데 겨우 이런 결말이라니요?’ ‘당신은 바알과 아세라보다 전능한 신이 맞습니까? 지금이라도 당신의 그 전능하신 능력과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여 주세요.’라는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돈을 빌리고 빚을 갚지 못할 경우에 채권자가 빚진 자나 그의 자녀를 6년동안 종을 삼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마 빌려준 돈만큼 노동력으로 갚아라는 의미인 것 같지만 노예가 되는, 더구나 자기의 아이들을 노예로 뺏기는 부모의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가슴 아플겁니다.

 

2.네게 이미 있는 것을 극대화하라

 

이러한 과부의 호소에 엘리사는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이 여인의 호소에 돈을 주거나 이 여인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풍부하게 만듭니다.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기름이 한병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이 말은 기름바르다는 말에서 유래하여 ‘기름 부음받을 정도의 적은 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성경에서처럼 기름 한병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기름부을 정도의 아주 적은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이는 이 기름을 이 여자의 장사를 위해서 남겨둔 기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처지가 더 가련합니다. 보통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올리브 기름을 시체에 발랐답니다. 그러니까 장례를 위한 용품인 것이지요.

자, 여기서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자기가 이미 가진 것을 활용하는 방안입니다. 빚을 갚을 수 없어서 자식들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이지요. 돈은 없지만 일은 할 수 있다는 거지요. 물론 그 방안은 고약하게도 6년간 노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여인에게 있는 아주 적은 양의 기름을 활용합니다. 결코 여인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여인에게 없었던 것을 새롭게 주지도 않습니다. 엘리사의 기적을 잘 보면 이미 있던 것을 활용하는 이적이 많이 있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있던 기름과 가루를 계속해서 활용하도록 했지 황금과 다른 먹을 양식을 제공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잘 활용하는데서 시작합니다. 그것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 재능, 재물을 잘 활용하여 나에게 더 큰 복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즐겨하시는 방법입니다.
과부의 경우에는 아주 적은 양의 기름이었습니다. 비록 아주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과부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3.이웃에게 빌리는 것은 쉬울까?

 

엘리사의 말은 이렇습니다.“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지금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이 집에 그릇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사는 밖에 가서 이웃들에게 그릇을 빌리되 많이 빌리라고 합니다.

 

요즘의 우리네 살림살이를 생각하면 안됩니다. 당시에는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 몇 개밖에 없을 때입니다. 가난하고 식구도 적은 이 집에 그릇이 많을 걸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물론 물을 받아 두는 거대한 항아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숫자는 한정적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려오라고 말합니다. 최대한 많이.

 

이것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냥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엘리사가 하늘로부터 곡식을 비오듯이 쏟아지게 하거나 금은 보화를 쏟아지게 한게 아닙니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그냥 엘리사는 자기의 말에 순종할 것만을 요구합니다. 믿음이란 항상 이와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순종하며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의 끝에서야 비로소 실체적인 것을 맛본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에 의존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든든하고 의지가 되니까.
게다가 이 여인에게 요구한 것은 어쩌면 좀 황당하고 그리고 귀찮고 때로는 힘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여인의 믿음의 양과 빌려오는 그릇의 양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으며 사정을 아뢸 때는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선지 생도들과 선지자가 돈을 조금씩 갹출해서 빚을 갚아 주고 생활비를 주는 것을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채권자에게 가서 선지자가 노예로 아이들이 끌려가는 것을 무효로 시키는 일을 상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명성과 영향력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아마도 그릇을 빌려서 기름을 채워서 빚을 갚고 생활을 하라고 하는 해결책은 이 여인의 생각에는 없었던 해결책이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갑자기 이웃에게 가서 그릇을 빌리려면 사람들이 쉽사리 납득할만한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잔치를 벌인다. 그래서 그릇이 많이 필요하다. 좋은 목적이지요. 그런데 남편이 죽고 애들이 노예로 팔려갈 집에서 무슨 잔치겠습니까?
갑자기 음식을 많이 해서 그릇이 많이 필요하다. 좋네요. 그러나 그 집 사정을 빤히 아는데 무슨 음식을 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면서 그릇을 빌릴까요?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설마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고 빌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더 문제는 이 여인에 대한 평판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이웃에게 인심을 얻지 못했다면 이 여인은 그릇을 제대로 빌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릇을 빌려주면 돌려 받을 때 뭔가가 그릇에 담겨 온다는 기대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릇을 빌려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한 거대한 항아리를 빌린다고 한다면 항아리를 끙끙대며 들고 와야 합니다. 토기일 경우에는 깨질 수도 있겠습니다. 이래저래 힘들고 귀찮은 일입니다.

 

더구나 엘리사는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고 하면서 이웃의 범위를 ‘모든 이웃’이라고 합니다. 모든 이웃의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요? 앞뒤 양옆의 집, 아니면 그 거리에 있는 집, 아니면 그 마을 전체?
이웃의 범위를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모든 이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모든 이웃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네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너를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 두 개가 동시에 충족되는 사람들 전부를 모든 이웃이라고 한다는 거지요.
두 번째는 이 과부는 지금 선지 생도의 아내입니다. 아니 아내 였지요. 그래서 아마 다른 선지 생도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말하는 모든 이웃은 이 선지 생도들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여자가 평소에 이웃에게 인심을 얻고 있었다면 아마 많은 그릇을 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딱한 사정이 이웃의 동정을 얻었다면 많은 그릇을 쉽게 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체면치례로 몇 개의 그릇만을 빌릴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평소에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릇을 빌리는 데에 반영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이웃의 눈에 어떻게 비취는지가 중요합니다. 바르고 착하게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살았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얻을 것이요 평소에 구두쇠고 이기적이며 막살았다면 이웃에게 피해도 주고 뻔뻔하게 살았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나로 말미암아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얻기는커녕 ‘아이고 꼬시다’ 이렇게 될 겁니다.

 

4.문을 닫고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의 눈에 이색적인 장면이 보입니다.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따르는 일을 할 때 문을 꼭 닫고 하라고 합니다. 왜 문을 닫아야 합니까? 동네방네 떠들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그렇게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도 그렇고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도 그렇고 문을 꼭 닫고 은밀한 가운데서 행했습니다.

 

그런데 문을 닫고 기적을 행하지 않았을 때도 당연히 많았습니다. 물에 빠진 도끼를 건져낼 때, 적은 음식을 전 선지생도들이 나누어 먹을 때, 독이 든 국의 독을 해독할 때는 기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이 두 경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혜택의 유무입니다.

 

그 사람에게만 혜택이 갈 때는 은밀하게,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갈 때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기적의 현장에 있다면 사실 우리가 그 기적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혜택을 보아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신비를 눈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기적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지체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려다가 지체들을 위하여 나무를 하다가 지체가 함께 먹도록 가져온 양식을 나누려고 할 때 하나님의 기적은 지체들에게 골고루 미칩니다.

 

여기서는 엘리사의 놀라운 기적에 다른 이들이 참예하지는 못합니다. 공동체에서 한 여인의 어려움을 외면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공동체에 속한 지체가 어려움에 처해서 지금 두 아이, 역시 공동체의 지체가 노예로 팔려갈 처지임에도 그들을 외면했다고 책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공부했던 선지 생도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갹출해서 형제의 아픔을 위로한 생각을 못한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들도 다 가난해서 형제의 더한 어려움을 외면한 것일까요?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그 기름의 혜택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그릇을 빌려줌으로 어느 정도는 그 혜택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혜택을 받지는 못합니다. 직접적으로 지체를 도우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뭐 그릇 빌려준걸 직접적인 도움이라고 주장한다면 할말 없네요. 공동체의 사랑이 그 정도니까 그건 엘리사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선지생도들이, 선지 학교의 제자들이 그 정도밖에 안된다면 당연히 공동체를 이끄는 자의 잘못입니다. 여하튼 엘리사는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한 이들에게는 기름을 나누어 주지 못하도록 문을 꼭 닫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기적을 은밀하게 체험하도록 한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면 믿음은 눈으로 보는 것과 나의 이성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내 머리보다 내 눈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한다는 직접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데서도 이 여인은 믿었습니다. 엘리사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북 이스라엘 엘리사시대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2016년 대한민국 정관영암교회에서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아멘, 아멘. 주여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5.그릇을 준비한대로

 

이제 여인은 엘리사의 말대로 그릇을 빌리고 두 문을 꼭 닫고 방안에서 가지고 있던 적은 양의 기름을 늘어논 그릇들에 붓기 시작합니다. 원래대로 하면 한그릇도안되는 적은 기름이 계속해서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 적은양의 기름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기름이 그릇들을 채워나갑니다.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준비된 그릇이 더 없자 기름도 그쳤답니다. 준비한대로 기름이 나온 겁니다. 많이 준비했다면 많이 적게 준비했다면 적게 하나님의 복이 내리는 것입니다.

 

귀찮다고 힘들다고 적게 준비했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그냥 되는대로 적당히 준비했다면
굳이 그럴 것 있나 우리가 가진 그릇만 해도 충분하지라고 생각했다면 그정도에서 그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어느 정도나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두 아들과 생활할 수 있을만큼 많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아마 상당히 많은 그릇을 빌린 모양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그릇을 빌리고 다 쓰고 난 다음에 그릇에 뭔가 채워주는 미풍양속이 있지요. 이 여인에게 그릇을 빌려준 이들은 그래도 기름 한 그릇이라도 아니면 뭔가라도 선물을 받았을 것이고 직접적은 아니라도 간접적으로라도 기적을 맛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릇조차 빌려 주지 않은 이들은 그것도 없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누리려면 그릇을 크게 준비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두가지를 첨가 하려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복은 내가 가진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발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나에게 이미 주어진 재물을 활용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잘 살펴보면 뭔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삶을 산다는 것은 그래도 우리가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을 잘 살펴보세요. 틀림없이 뭔가가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글을 잘 쓰거나 노래를 잘 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거나 뭘 잘 만들거나 말을 잘하거나 상대의 기분을 잘 파악하거나 잘 뛰거나 잘 던지거나 잘 차거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넣어 두신 그 재능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활용하십시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거나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또는 허구헌날 부부싸움이나 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소문이 날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군기를 들고 살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보고 하나님을 평가합니다.

 

만일 그 여인이 이웃이 없었다면, 그릇을 제대로 빌리지 못했다면 절대로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살만큼 풍부한 돈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십시오. 법을 잘지키고 도덕을 잘 준수하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고 도움을 주십시오.

 

좋은 말을 하는 것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뭔가를 줄 수 없다면 덕담이라도 하세요. 미안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 교통신호도 잘 지키고 쓰레기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침도 뱉지 말고 큰소리로 욕하거나 싸우지도 말고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이도록 노력하세요.

 

교회 올 때 택시비를 계산할 때 일이백원은 덤으로 주세요. 버스에서는 노인이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세요. 뭔가를 얻으려고 사람을 사귀지 말고 댓가를 바라고 일을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다 보시고 갚아 주시되 사람이 줄 수 없을만큼 크게 하실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세요. 하나님과 내가 이 한해를 함께 간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세요. 자연적으로 나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눈앞에 드러나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기대하세요. 우리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 하나님의 복이 언제 어느때 어떤 모양으로 부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즐겁게 믿고 소망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그와 동행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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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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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그릇 이야기를 하니까, 대기만성 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큰 그릇은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제 2의 해석도 있습니다.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 즉, 계속해서 분발해 나간다 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분을 봤습니다. 음악의 거장이 죽기 직전까지도, 매우 늦은 나이에도 음악 연습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남은 혹시 눈치 못채고 넘어가 줄 수 있지만, 나는 알기 때문에,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연습한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엄격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뭐, 한 번 뿐인 인생 대충 즐기면서 살지? 삶에 대한 철학이 없는 사람들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삶을 충실하게 채워나가는 사람들을 저는 무척 부러워 합니다. 이른바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충실히 채워나가는 삶을 늘 꿈꿉니다. 현실이 절망적으로 느껴질 때에라도, 힘들어 보일지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함을 이번 설교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노력을 멈추지 않기를. 그런 눈부신 새해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꿈을 포기하지 맙시다. / 2016.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