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여호와께서 요구하는 것(신명기10:1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3. 29. 00:49

 

여호와께서 요구하는 것 (신명기10:12-)


우리는 2016년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보다 더 잘살고 보다 더 행복해 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글쎄요, 그 복이란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 뭐고 복이 뭐지요? 우리에게 복 이러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행복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한국사회는 이상하게도 돈에 대한 욕구가 매우 너무 강합니다. 가령 선진 외국에서는 사회계층을 나눌 때 우리나라하고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합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을 한번 볼까요?

 

빚이 없이 30평대 아파트가 있어야 된다
2000cc급의 중형차가 있어야된다
통장 잔액이 1억 이상 있어야 된다
월수 500이상이 되어야 한다
년1회 이상 해외여행을 다녀야 한다

 

이건 뭐 기준이 죄다 돈입니다. 돈 돈. 혹시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 대저택에 살면 뭡니까? 이 기준으로는 상류층인가요?

그러면 미국의 기준을 한번 볼까요?
이걸 보면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나올 겁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선진국의 힘이란 겁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책상위에 정기적으로 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는 사람.
이게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입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제시한 중산층 기준을 한번 볼까요?
세계최고의 대학이라는 옥스퍼드, 미국인들조차도 가장 선망하는 학교, 오랜 전통과 학풍은 지금도 세계를 움직입니다.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지닐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하게 대처할 것.

 

보셨나요? 미국이나 영국에서 중산층 기준에서는 단한가지도 돈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정도면 미국이나 영국인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천박한 것이 됩니다.
프랑스의 전 대통령인 조루즈 퐁두드 의 중산층 기준을 한번 볼까요?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해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출 것
한가지 분야 이상의 스포츠나 악기를 다룰 것
자신만의 별미를 만들어 손님을 초대할 줄 알 것
일주일에 한번 가족외식을 할 수 있을 것

 

주급을 절약해 매주 이틀간 검소하게 즐길 수 있을 것
사회봉사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할 것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사회정의가 흔들릴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나설 것

 

여기서는 약간 돈냄새가 풍기기는 하지만 역시 공동체에 대한 책임, 사회정의니 봉사니 불의에 대한 신념같은 것들이 공통적으로 포진해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 역시도 다를 것입니다. 사회적 성공의 의미도 다르지요.

 

돈만 추구하지 않고 신념과 정의의 인물로, 공동체에 책임 있는 인물로 키우려고 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돈만을 유일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돈 벌기를 경쟁했는데 누가 승자인지는 명확합니다.
이들을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하고 우리는 아직 개발 도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더 돈돈 거리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이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천박한 돈벌레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됩니다.

 

개화기에 우리는 사람을 일러 ‘이 양반이’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널리 퍼지면서 요즘에는 점점 시비를 거는 나쁜의미의 말로 변질되었습니다.
양반이 아닌 사람에게 양반이라고 하는 것이 시비거리가 된건지, 아니면 가짜 양반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하튼 양반이라는 말을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것이었음이 나타납니다.

 

해방 후에는 모르는 사람들을 일러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불려지면 사람들이 좋아했기 때문에 선생님이라고 불린 겁니다. 선생은 원래 고대 중국의 황제가 주는 명예로운 벼슬이름입니다. 당나라의 전설적인 선인 장과로에게 당나라 황제가 무슨 무슨 선생의 벼슬에 봉했다거나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들이 학식이 높은 서양 선교사에게 ‘교사’의 벼슬에 봉했다는 대목을 보면 원래 선생은 아주 명예로운 존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생은 아주 존귀한 자리입니다. 돈은 별로 못 벌지만 군사부일체라고 해서 임금과 부모와 비견되는 굉장한 명칭이었지요.
그러던 것이 요즘은 모르는 사람을 일러 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나 보고 사장님이랍니다. 저에게도 사장님이라고 불러서 ‘저는 사장이 아니고 목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혈통, 명예나 학식, 품격과 신념있는 삶 같은 것에서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변해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점점 배금주의화 되어 갑니다. 돈이면 행복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로 할 때는 ‘돈이 다가 아니다’는 둥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게 아니다’는 둥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항상 돈을 모든 가치의 지표로 삼습니다.

 

이거 얼마짜리냐?
얼마의 효과를 가지고...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선물을 가지고도 이게 얼마짜리 선물이니까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구나하고 선물을 돈 액수로 평가합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비씬 선물을 받고는 행복해 합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받고 싶은 선물 1위가 돈으로 산 ‘물건’이 아니라 돈 그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참 재미없고 품격 없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뜬금없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드는 비싼 사치품을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황당합니다. 그런건 그냥 사치품이나 고가품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데.

사실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한국인의 기준으로만 따질 수가 없습니다. 아마 서양 사람들의 기준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는 돈도 들어 있겠지만 돈이 안되는 것이라고 해서 복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 이제 행복과 복에 대한 생각을 대강 정의했으니까 다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계약에 관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비결이 뭐냐고 묻기 전에 제일 먼저 우리와 하나님 간에 맺어진 계약조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계약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효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맺은 계약의 조건을 충족해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계약조건에서 우리가 이행해야할 조건이 무엇입니까?
여기 본문에 여호와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명확하게 문장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것.
경외하는 것이나 도를 행하는 것이나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약간은 주관적이며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기준이 애매모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닌지는 객관적으로도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규례가 여기 성경에 법으로 잘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것’ 이 조항이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조건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가 나의 아버지로서 아들의 필요를 들어 주셔야 된다고 요구하려면 먼저 내가 그 계약 조건을 이행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것’입니다. 그가 명령하시면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전적으로 준행하는 것이 그가 나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며 그를 경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라는 서클에서, 사교 클럽의 멤버로서 활동하는 것에 그치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라
사교클럽의 멤버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지도 않고 따라서 아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할 의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1.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경외하다는 말은 두려워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가지라는 말이지요. 참된 두려움이란 말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은 경외하는 것은 단순한 두려움하고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가 크고 장엄하며 절대적이고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의 앞에서 겸손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아버지의 말에 귀기울이며 그의 명령을 준행하기를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거의 세뇌수준으로 하나님에 관해서 듣는 말이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괜찮다, 잘했다, 상관없다고 하시는 분이라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저버리고 헛되이 버리고 나면 아버지께서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벌을 주시는데 그 징계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이며 그 고통이 뼈 속까지 각인이 되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게 되면 그 죄많은 인간은 죽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비로우며 인애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내가 아무리 막 살아도 절대로 나를 벌하시지 않는 그런 분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막 살고 삶이 형편없어서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를 만만하게 보고 그를 만홀히 여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에서 제일 첫 번째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그를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강력한 징계가 따름을 알라는 말입니다.

 

2.그 모든 도를 행하고

 

본문에서 말하는 도는 “도를 아십니까?”할 때의 도가 아닙니다. 단순히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모든 길 안에서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모든 길 안에서 걸어가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의 법안에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규율하는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3.그를 사랑하며

 

세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일러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상을 섬기면 이것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의 사랑을 다른 것들에게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사랑을 다른 물건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우상과 나누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사랑하다는 말에는 ‘즐기다’와 ‘기뻐하다’란 뜻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의 안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품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한다면, 바깥세상은 어떤가 싶어서 바깥을 기웃거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에서는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절에 얼쩡거린다면 그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이 알고 싶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배타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만큼 사랑하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대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4.섬기고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말은 신명기 6:5의 말과 같지만 결론만 다릅니다.

 

신명기 6:5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고 본문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섬기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섬긴다고 할 때 종이 주인을 섬김같이 의무적으로 두려워하며,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이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섬긴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이니까.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를 섬길 때는 진심으로 사랑하여 섬길 것입니다. 벌을 받지 않으려고 의무적으로 억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여 섬기고 아버지이므로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고 자기를 희생하여 나를 굳건히 세우며 나의 행복을 그 무엇보다 중하게 여기시는 분임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여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5.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라

 

자, 이제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사항들이 나열되었지만 결국 이 한가지 조건으로 다 설명이 되어 집니다. 오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더 간단히 말하면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 그래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계약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뭐가 간단하지 않습니까?

 

본문을 잘 보십시오. 13절에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 ,우리가 지켜야 할 규례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명령은 그 하나님의 규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명령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규례를 지키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 지는 길이기 때문에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며 규례를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이 싫어서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려고 바깥세상을 기웃거리고 우상에게 절하며 세상의 쾌락과 죄악에 물들어 가고 있는데 실상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 지기위해서 그 명령을 지켜야 한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해 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 지도록 명령을 지키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힘들고 괴롭히기 위해서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해 지기위해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요구한답니다.

 

우리가 새해에 받기를 소망하는 복은 어떤 것입니까?

가족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
아니면 건강?
참된 사랑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
아이의 대학 합격? 취직?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필요하기는 하지요. 자, 제가 강도사 시절 목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중고등부 주일하교 교사로 있던 한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평일에 교회 사무실에 올 때는 항상 강아지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옵니다. 예배 때는 당연히 개를 데리고 오지 않는데 평일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입에 항상 이런 말을 달고 삽니다.

 

“내가 이렇게 복을 받은 것은 아마 처녀때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는 이분이 주일학교 교사라는 것 말고는 아는게 없기 때문에 ‘무슨 복을 그렇게 받았는데 저렇게 허구 헌날 복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다니지?’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출판사의 사장 부인이랍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제가 어느날 우연히...............(중략) 이 분은 과연 복받은 것입니까? 천만에요. 이 분은 복받은게 아닙니다. 이분은 복 받아야 될 분입니다. 가정의 복, 사랑의 복을 받아야 될 분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복을 너무 돈에만 한정하지 마십시오. 속물적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 정도의 하잘것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위대한 사명을 띤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세상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와 직통으로 통하는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지금 무슨 복을 받았나를 살펴보십시오. 그래도 받지 못한 것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복을 새해에는 받기를 소망하세요.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주실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계약 조건을 이행해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그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며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너무 야속하고 귀찮고 그래서 확 세상으로 나가버리고 싶어집니까?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해야 할 것을 지시하신 것이며 그가 제정하신 규례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랍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죄를 저지르지 않고 법을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은 제한되며 힘들고 귀찮고 그런 것 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규례를 제정하고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는 말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우리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나요?
설마 내가 마음대로 사람들을 죽이지 못해서 그게 불만인 분이 있습니까? 무슨 사이코 패스도 아니고 그런 분은 안계시겠지요?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도둑질을 못해서 불만입니까? 다르게 보면 우리의 재산이 그 계명 때문에 도둑맞지 않을 수 있고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너무 싫습니까? 그것이 우리 가정을 지켜 줄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너무 싫습니까? 그 계명 때문에 내가 나의 자녀들로부터 효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좀 할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죽을 죄인가? 그래요, 그런데 그 계명 때문에 내가 재판에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지 않을 수 있음도 사실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 때문에 너무 귀찮고 너무 힘들고 삶이 무미건조하다고 불평해왔지만 가만 보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면 우리가 모두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규례를 지키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면 하나님 안에서 길을 가는 우리들이 기쁘고 줄거울 수 있습니다. 아니 즐거울 수 있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즐겁고 행복해 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자기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품안에서 행복해 지기를 원하시고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며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을 보기를 즐겨하셔서 행복의 조건들을 제대로 지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례를 제정하셨고 성경에 기록하셨고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좋은 아버지를 두었습니다. 자녀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좋은 법을 만드신 아버지의 ‘명령과 규례’를 잘 지켜서 올 한해도 행복된 한 해가 되며 하나님 아버지의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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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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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고, 오래전에 생각해 보았던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주님, 내가 일생동안 주님을 위해서 힘껏 살아왔으니까, 주님 제게 은혜를 더해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찬송가의 가사를 많이 쓰신 크로스비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맹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면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셨습니다. 재능이 있으면 아낌없이 쓸 때가 행복하다 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이제 이 이야기들을 펼쳐봅니다. 저는 지나치리만큼 인터넷 상에서 인복이 많았습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고맙고 헌신적인 분들을 만나고, 늘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분명 나와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를텐데, 저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먼 길을, 먼 계획을 세워도, 두려워 하지 않고, 힘있게 걸어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게임 식으로 말하자면, 역풍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는 연결되어 있기에, 모진 바람앞에서도 함께 힘껏 맞서서 이겨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어쩌면 기적이라서, 나는 감사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꼭 하고 싶었습니다.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먼저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능을 아낌없이 쓰려면,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겠지요. TV드라마를 보면은 몸짱인 배우가 나와서 여심을 저격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생했겠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충실한 삶을 살아나간다면, 자신의 재능을 열심히 쏟아붓는다면, 거기에서 답을 건져내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매우 부끄럽습니다. 나는 100점 만점에 50점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노력해 보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들 하나 하나에도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이 모든 일들에도, 범사에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어머니가 장기간 아프시고, 이번 주에는 끝내 장애인 3급 판정을 받게 되었지만, 그런 아픔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되고자,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이제는 삶이 더 불편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나부터가 더 힘내면 괜찮아. 어떤 일을 만나든지, 삶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태도. 그 우직함을 올해에는 간절히 원합니다. /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