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태복음18: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5. 12. 02:25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태복음18:1-)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불행을 느끼는 이유의 많은 부분이 남과의 비교에서 발생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만 보지 않고 남과 나를 비교하기 때문에 불행하게 느끼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입니다. 우리는 사실 천국에서 누가 큰가에는 관심이 덜하고 여기 이 땅에서 누가 큰가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불행한 겁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가를 가지고 서로 경쟁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불행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그 때에 제자들이


오늘 본문은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이렇게 묻습니다. 이 땅에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라고 묻는 제자들은 그래도 다행입니까?
여하튼 ‘그 때’라는 부분을 살펴봅시다. 이때가 언제였을까요? 성경학자들은 그 때가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약 한달 전쯤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기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수난을 당하여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지금 그런 것 보다 누가 큰가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약 한달 후에 죽을 날짜를 받아 놓은 입장에서 제자들의 이런 논쟁은 정말 기가 찬 일입니다. 누구도 선생님의 죽음과 수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라는 말로 부정하려는 게 답니다.

 

전혀 내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제자들이 지금 이 땅에서 누가 큰 사람이 될지가 아니라 천국에서 누가 큰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렇게 꼴통 짓을 하며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이제 드디어 성숙을 했네요. 참 이런 신앙의 초보들을 성숙시킨다고 주님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지.

 

2)천국에서

 

그런데 본문을 조금 더 깊이 보면 약간 다른 뜻이 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말은 원문 상으로는 ‘그렇다면 누가 하늘의 왕국에서 더 위대합니까?’라는 말입니다. 천국이나 하늘왕국이나 거기서 거기지 뭐 어떻다고?

 

예 맞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한번 들어가 보면 또 다릅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천국, 하늘 왕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 아니라 이 지상에 예수님이 만드실 나라의 명칭입니다. 그러니까 ‘다윗 왕국’ 대신에 ‘하늘 왕국’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명칭은 또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지금 누가 예수님이 만드실 나라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냐고 묻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누가 그 나라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지금 한 달 있으면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셔야 하는 주님에게 여전히 제자들은 주님이 만드실 나라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를 놓고 물어본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렇게나 틈틈이 말해도 제자들은 끝까지 알아 듣지 못합니다.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을 삼년을 따라다녔으면 이제 나도 한자리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천국의 일을 말한다는 건 우이독경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죄인들을 대속한다는 소리는 황당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내가 그 말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니 들어도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리지 마음에 새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말은 곧 ‘당신이 만들 나라에서 누가 큽니까’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변화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갔다 왔기 때문에 뭔가 제자들 중에서 더 총애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주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도 생각이 나고 이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주님이 왕이 되실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한자리를 확보하려고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3)한 어린아이를 불러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주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무슨 말일까요? 이어진 주님의 말씀을 보면 그 뜻이 더 명확해 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뜻보다 오히려 ‘권력이 없는, 순종하는’ 이란 뜻이 있습니다. 즉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의지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자행자지하며 누가 큰 자 인지 서로 경쟁하는 자는 천국에서 오히려 낮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오히려 천국에서는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더 나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3절 말씀은 좀 위험합니다.
왜냐면 단순히 누가 큰 지를 말하는 것에서 나아가 천국에 못 들어 간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돌이켜’ 라는 말에서 ‘돌이켜’는 단순히 ‘얼굴을 돌리다, 몸을 돌이키다 ’라는 뜻뿐만 아니라 ‘마음의 변화’나 ‘행동양식의 변화’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지금 하고 있는 교만한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재어 볼 수도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누가 큰지 비교를 할 수 있지 천국에 아예 들어가지를 못했는데 무슨 비교를 합니까?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어린아이들과 같이 변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사실 어린아이들에 대한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어린아이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의존적이고 가르침을 단순하게 잘 받아들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라고 한 말씀은 ‘나의 가르침을 잘 받아 들이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내 생각대로 변개시키고 다르게 풀이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행동에 대한 그럴듯한 뒷받침할 것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지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누가 큰지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지 않습니까?

 

4)어린아이를 영접하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그러면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못 들어 갈 수도 있다가 아닙니다.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답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들같이 겸손하게 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고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내가 결코 천국에 받아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이고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고 예수 믿는 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어리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큰 자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겸손하면 사람들은 강제로 짓밟아 버립니다.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몫을 빼앗아 갈라 가집니다.

 

자기 것을 위해 싸우지 않고 스스로 있어 보이려 꾸미지 않고 소박하고 겸손하면 세상은 그를 아주 물로 보고 무시하며 그의 권리를 빼앗으며 사람을 막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경쟁사회에서 스스로 겸손한 것은 아주 나를 죽여 주십시오 하는 말과 같습니다.

 

옛날에 동양에서는 왕의 자리에 나아갈 때 세 번 고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러면 아마 왕 자리에 절대로 못 앉을 겁니다. ‘굳이 싫다는 사람 시키지 말고 내가 한번 해보께’ 이렇게 나올 겁니다.

세상에서  어린아이처럼 살아서는 무시당하고 자기 것도 빼앗기고 정당한 자기 몫을 주장하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것입니다.

 

옛날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요즘은 법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어린아이처럼 사는 사람들이 힘들까봐 도저히 목숨과 재산을 부지하지 못할까봐 주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자, 여기서 말하는 ‘이런 어린아이’는 진짜 어린아이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어린아이를 세워두고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진짜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다음은 이제까지 주께서 하셨던 의미로 ‘이런 어린아이’를 사용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주님께 의지하고 겸손히 주의 명령에 따르는 자들을 일러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로 약한 존재들입니다. 어린 아이가 된 자들도 약하게 보입니다. 그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 대해서 주님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저들을 내 이름으로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과 같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을 영접할 것을 명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잘난 사람들, 있는 사람들, 뭔가 도움이 될 사람들에게 집중하며 그들을 영접하지 그렇지 못한 이들 즉 못난 사람들이나 없는 사람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쓸모없는 이들에게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대접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주님의 말씀은 인간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혁명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에게 쓰는 돈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이에게 쓰는 돈은 복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지에 쓰이는 돈은 버리는 돈으로 여깁니다. 그런데요 이건 틀린 말 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쓴 돈은 사실상 우리사회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투자입니다. 그 돈을 받아서 먹을 것 사고 제품들 사고 서비스에 지불하고 그래서 소비가 살아나고 경제가 활성화되는 귀중한 투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이가 되갚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영접하지 않지만 그들이 직접적으로 갚을 수 없다면 주께서 대신 갚아 준다는 말입니다. 주께서는 인간들의 사악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내가 대신 갚아 줄게’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부지중에 아말렉의 길잡이를 대접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접받을 이들이 누군지를 가려서 대접한 게 아닙니다. 대접받는 이가 누군지를 알아서 대접한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나 롯이나 다윗이나 평소에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평소의 습관대로 손님을 대접하다가 큰 복을 받는 것입니다.

 

5)주께서 갚으신다

 

우리도 잘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이 가진 고정관념을 탈피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를 원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뿌리면 돌아 오는게 없을 것 같지요? 부자에게 잘하면 뭔가 돌아올 것 같지요? 부자에게 잘해서 뭔가 돌아올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에게 잘하면 확실하게 돌아 옵니다.
‘에이, 그 사람들이 무슨 능력으로 되갚는단 말이야?’

 

천만에요, 가난한 이들에게 뿌려서 그들이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다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대신 갚아 주십니다. 그가 대신 갚아 주실 때는 30배 60배 백배의 이자를 덧붙여서 되갚아 주십니다. 그러니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싶은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십일조하고 이웃을 구제하십시오.
어린아이를 영접함이 곧 예수님을 영접함과 같다고 하쟎아요. 소자에게 물한잔을 대접해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쟎아요.

 

천국은 경쟁과 효율의 사회가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사회입니다. 처음 이 둘을 비교하면 비교자체가 아예 안됩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의 역사가 어느 것이 더 올바른 방법이었는지를 몸소 보여줍니다.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살았던 초대 교회는 점점 성장해서 로마를 정복했지만 대접받고 군림하던 중세 교회는 점점 줄어 들었으며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외면받아서 마침내 오늘날 유럽교회당이 텅 빈 상태에 까지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각 교회들이 쓸데없이 각종 재물을 쌓아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돈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 이 말을 지금이라도 실천한다면 우리 기독교회는 다음 세기에도 세상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교회만을 생각하고 재산은 많을수록 좋다고 쌓아놓기만 하고 각종 건물들을 계속해서 건축한다면 다음 세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 자명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대안이 바로 가정교회입니다. 미국에서는 가정교회의 교인숫자가 벌써 200만명을 넘어 섰다고 합니다. 솔직히 교인들은 건축헌금을 낳는 거위가 아닙니다.

 

이제 건축은 정말 그만하고 사람을 먼저 챙깁시다. 내 교회 안에 가난한 이가 있다면 그를 돌보는데 먼저 집중합시다. 아픈 이가 있다면 그를 위해 먼저 기도합시다.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가 돈이 없어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다면 장학금을 주고 생활비를 주고 그를 키웁시다. 모자만 남아서 힘든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폅시다. 노인들만 남아서 힘든 가정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눕시다.

 

그리고 남는 돈이 있다면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도록 사역의 폭을 넓힙시다. 안 믿는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게 제일 큰 구제라는 이상한 소리는 그만하고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교회는 실체적인 물질로 돕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헌금을 쓰지 않고 쌓아 놓지 말고 마구 마구 세상에 뿌립시다. 그 물질이 세상에 뿌려지는 복음의 씨앗입니다.


게다가 교회만 이런 일을 할 것이 아니라 교인 각자도 십일조의 삼분의 일은 자기가 있는 이웃에 구제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의 말씀처럼 십일조의 삼분의 일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지역에 저장해 두고 레위인과 가난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도우라는 그 말씀을 한번 실천해 봅시다.

 

이걸 우리 교인들이 꾸준히 한 십년만 실천하면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도할 필요도 없이 수많은 불신자들이 두 손 들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난하고 억울하며 눈물짓는 이들이 확 줄어들고 이 지상이 천국으로 화할 것입니다. 옛날 웅변같은거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연사 ~하자고 강력하게 외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이 목사 그런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실천하자고 강력하게 강력하게 외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물질을 올바르게 사용하자는 이야기가 마음을 울립니다. 사람은 넉넉하게 채워넣어야 만족하는 이상한 생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커다란 냉장고에 한가득 음식을 넣어놓고, 저장합니다. 때로는 위안 가득 배부르게 음식을 채워넣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설 어린왕자에 보면, 타인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등불을 켜고 끄는 사람인데, 어린 왕자가 여행을 하면서 마침내 친구로 삼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점, 이것 하나가 오늘날에는 좋은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주변의 이웃을 생각한다는 것, 내가 아끼는 사람과 함께 하려는 점, 이런 귀한 시간들이 있을 때, 비로소 기독교의 깨끗함이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나 혼자 재밌게 잘 지내려는 마음들이 도시의 스타일이라고 광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나만 가꾸는 삶은 이미 많이 있습니다. 이 별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하기 바쁜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입니다. 잘난 사람 곁에 있기를 소망하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와 반대로 행동할 멋진 근거가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설교를 사랑합니다. 어린 아이, 약자를 돌보라는 말씀과, 천국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가 힘이 넘칩니다. 결단코 이웃과 함께 하는 좋은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그런 사람이길 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