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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가(마태19:16-2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5. 17. 04:01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가 (마태19:16-22)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거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게 뭐지요?

 

오늘 우리는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제까지는 그냥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자동적으로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은 한 유대인 관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이제껏 너무나 쉽게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의 질문을 봅시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냐’고 묻지 않고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어 봅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냐?
우리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질문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이 너무나 쉽게 여겨지기 때문에 한 번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 되느냐에 대한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질문이 정말 낯섭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꼭 선한 일을 해야 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년은 매우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보고 부자에 대한 주님의 통렬한 비난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나는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보고 하신 말씀은 아니야’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물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말은 이 다음에 나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부자나 빈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재산의 보유상황에 상관없이 구원을 얻으려는 자에게 모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를 보세요. 이 사람은 주님을 ‘선생님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에서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좀 이상하지요? 이 사람은 주님에게 어떤 선한 일을 해야 되는지를 물었지 주님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답이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성경본문을 좀 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병행기사인 마가복음10:17과 누가복음 18:18에는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것으로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여러 사본 중에서 많은 사본에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 이 사람은 왜 주님을 일러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을까요?

 

마태복음에는 약간 부족해서 제가 병행기사들을 참조합니다. 먼저 이 사람은 청년인데 유대의 관원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냥 주님에게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길에서 주님에게로 와 무릎을 꿇고 주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묻습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물어본 것이 아니라 정말 간절히 주님의 가르침을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청년은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의도는 좋았지만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천이라는 문제에 들어가자 그만 나약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주님은 선생을 넘어서는 ‘선한 선생’이기는 하지만 그의 ‘주님’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이 청년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구원을 선행이라는 것과 연계시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로가 있어야 그 포상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고 정반대입니다. 요즘은 아무도 영생과 선행을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 요즘 성도들이 주님에게 질문했다면 ‘주님 저희가 어떻게 믿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렇게 묻지 않았을 까요?

 

그런데 주님의 대답을 봅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나를 믿어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계명을 지켜야 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너무 형식적이고 율법적이고 공로사상에 입각해 있다면 우리는 지금 너무 실천이 없습니다. 뭐든지 너무 자유롭습니다. 이거 오히려 더 나쁜게 아닐까요?

 

형식도 없고 규칙도 없고 그렇다고 실천도 없고 진지한 고려나 잘 믿기 위한 몸부림도 없고 그래서 이게 잘못되어 막 살고도 천국에 문제없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지경까지 와 있습니다. 주님이 율법의 무거운 짐에 억눌린 백성들을 해방시켜주려는 의도가 진정한 율법의 참뜻으로 돌아가자고 한 의도가 완전히 잘못되어 지금은 아무런 규칙도 법도 없는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여하튼 주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자, 주님의 답변이 끝나자 마자 부자 청년이 묻습니다.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여기에 대해서 또 주님이 답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거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의 1에서 4계명까지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신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굳이 언급하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언급한 계명을 보면 아마 사람들이 이 계명들, 십계명에서 인간들 상호간에 지켜야할 것들은 잘 지키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이걸 언급하신 겁니다.

 

게다가 주께서 드신 맨 마지막 계명은 십계명에는 없지만 십계명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말이기도 하고 주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사랑은 아가페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가페라고 하지요. 그렇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자, 이러한 주님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이 부자 청년은 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정말 멋지고 당당한 말입니다.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자신있게 말하다니 정말 굉장한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우리 주님도 항복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으니 기뻐하며 돌아가라’ 이렇게 칭찬할 만합니다.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겸손함과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극상의 예, 게다가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자세, 돈도 많고 관원이고 젊고 세상에서 놀 수 있는 모든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도 허랑방탕하지 않고
게다가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으면서도 더 무엇을 지켜야할 것이 없는가 물어 보는 겸손한 자세,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구도자의 자세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참 뭐라고 이야기할 것이 없는 완벽한 젊은이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맨 마지막에 논리적으로 위 계명들을 잘 지켰다면 전혀 문제없이 실천할 수 있는 실천사항 한가지를 주문하십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걸 히브리어의 문법을 참조하여 새로 번역한다면 “지금 당장 가서 네 소유를 단번에 팔아 다 나누어 주라”는 매우 즉각적이며 단호한 명령이 됩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이 명령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이런 명령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너는 입으로는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이건 절대로 못지킬 걸’ 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이 명령을 한 것일까요?

 

마가복음10:21에 보면 주님은 이 청년을 사랑하사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나 무지막지한 명령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명령을 내린게 청년을 일부러 골탕 먹이려는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이 명령을 너무 과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에게 이 청년에게와 같은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 과정을 겪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니 곧 제자들이 버려두고 주를 좇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에게 이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청년이 원하던 영생이 바로 하늘에서 주어지는 보화입니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 이러이러한 계명들을 모두 지켜라. 그걸 다 지켜왔다고? 그렇다면 잘했다. 지금 당장 가서 네 재물을 흩어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라라그러면 너에게 영생이 주어질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주님의 입장에서 영생은 세상의 재물이나 삿된 명예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위해서 땅위의 것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어야만 그 귀중한 보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귀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 희생해야 할 것들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욕심이 많아서, 적어도 우리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땅에서 우리가 가진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못합니다. 많이 가진 자만 아까워서 포기하지 못하는게 아닙니다. 적게 가진 자도 ‘이거라도 갖고 있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더 악착같이 붙들고 있으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생이 별로 귀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한번 보세요. 그 아이가 양손에 뭔가를 가지고 있다가도 더 좋은 것을 주면 바로 손에 있던 것을 던져 버리고 그대로 놓아 버리고 빈손으로 더 좋은 것을 받으려고 손을 내밉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보다도  못합니다. 손에 뭔가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줄 수 없는데도 이것도 갖고 저것도 놓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겁니다.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미련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합니다.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새롭게 얻지 못합니다. 너에게 더 좋은 것을 줄테니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다 놓아 버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마지막의 실천에서 머뭇거리는 바람에 좋은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조건을 완벽히 이행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물이 많으매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병행기사를 보면 이 청년은 단순히 재물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흩어버리기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는데 병행기사를 살펴보면 그냥 근심이 아니라 ‘심히 근심했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했다’고 합니다.

 

이 부자청년은 매우 큰 부자이면서 관원이기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고 아마 상당한 선행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갈급해 했으며 영혼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단순히 이 지상의 쾌락만을 추구하며 생각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늘의 것과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 하늘의 도를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은 도저히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청년이 나중에 집에 가서 주님의 말씀대로 행했는지는 안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청년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이 청년은 그 재물을 흩어버리지 않고 그냥 멈추어 버린 듯 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리에 의하면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고,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배웠기 때문에 선행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믿음에서 선행을 생각하는 사람도 구원과 선행이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당연히 받는 것이고 선행을 베풀면 상급이 큰 것으로 믿습니다.

 

심지어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 극단적으로 나간 어떤 이단은 이 썩어 빠질 육체로 어떤 죄를 저질러도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으므로 이 땅에서 쾌락을 한껏 누려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까지 주장합니다.

보통 어떤 주장을 펼 때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것에 반대되는 주장을 함으로 그 일에 대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수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정반합의 변증법이 그런 식의 논리 전개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선행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말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식적 율법준수자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구원하고 선행하고 관련짓지 않습니다. 그 막대한 재물을 당장 팔아서 즉시 가난한 이웃에 나누라는 주님의 말씀은 지키려는 흉내도 내지 않아도 상관없는 듯이 행동합니다. 또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까?

 

그 청년이 근심한 이유는 오늘 우리처럼 뻔뻔스럽지 않아서입니다. 그는 결코 거짓으로 주님께 아뢰고 주님을 좇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산은 어떻게 했니?”
“예,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웃에 다 흩어 버리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지않고 그는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재산은 어떻게 했니?”
“예, 아무래도 식구들이 먹고 살 것은 좀 남겨두고 나머지를 이웃에게 적절히 분배했고 아무래도 재산이 많기 때문에 재단을 만들어서 재산을 기증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청년은 그런 변칙이나 거짓이나 눈가리고 아웅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재산을 다 흩어버릴 수가 없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너무 익숙한 우리들에게 주님이 묻습니다. “얘야, 너의 재산을 다 흩어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니?”

 

그러면 우리는 자신있게 “예, 선생님의 말씀을 다 실천하고 제가 여기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씩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으면서 “아직 ... 꼭 다 팔아서 나눠줘야 합니까? 그래도 저희들도 살아야 되니까 어느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할 것입니까?

 

옛날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제대로 안 지키고 율법의 정신을 도외시해서 주님께 욕을 먹었다면 오늘 우리는 너무 사변적이고 머리만 신자가 되어서 전혀 실천이 없다고 주께 욕을 먹을 것입니다. 책망을 심하게 받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들어도 전혀 마음에 찔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는 “주님 굳이 그렇게 요란하게 믿어야 합니까? 적당히 적당히 하시죠.  ” 이러지 않을까요?

 

오늘의 우리 역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 옛날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가주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다만 그것이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기쁨으로 신자의 의무로서, 하늘 백성의 당연한 자격으로서 그런 일을 기쁨으로 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것이 믿는 다는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행해야 할 일입니다.

 

또 한가지, 이러한 주님의 요구는 개인에게만 요구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체로 교회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요? 쓸데없이 보유하고 있는 교회의 부동산을 모두 팔아서 이웃에게 흩으라고 제 말이 농담처럼 들리시겠지만 주님의 요구는 바로 그겁니다.

 

‘너의 모든 재물을 팔아서 이웃에게 흩어버리고 너희는 나를 좇으라. 나를 좇는데는 두벌 옷도 필요없고 전대도 필요 없고 두켤레 신발도 필요가 없다. 무엇을 입으며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마실까 어디에서 잘까하는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군사니 그 모든 필요한 것들은 내가 준비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도 이 청년처럼 그리스도의 요구를 지키지 못함에도 근심하며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정녕 그리스도의 요구를 그 청년은 지키지 못하여 근심하며 돌아갔는데 우리는 전혀 근심하지 않고 실천에 옮길 생각조차 않고도 뻔뻔스럽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그의 군사라고 지금 나서고 있지 않습니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지금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요구는 따르지 않으면서 왜 그가 나에게 이리도 박절히 대하시는지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입니다.

 

백날 성경을 읽고 하루 종일 기도한다고 엎드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가진 재물을 천국의 보화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면 주께서 그 보화를 나에게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요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솔직히 저도 그 말씀대로 다 흩어버리기가 두렵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예수를 믿기가 이렇게도 어렵노? 하실 분이 계실까봐서 제가 제안합니다. 십일조의 삼분의 일로 이웃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시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그때 그때 후회없이 사랑하며 사십시오. 나머지는 우리 아버지께 맡기십시오.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물질보다 가족 간의 사랑이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 금산 은산을 쌓는 것보다 더 소중합니다.
행복의 조건을 물질에만 두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안분지족을 누리시기를 또한 바랍니다. 완전한 솰롬에 들어가는 첩경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솰롬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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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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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자족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사전에 따르면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지내니 이만하면 내 생활도 자족하다. 지금 삶에 있어서 어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자족할 만한 일입니다. 항상 기뻐하면서 살고자 노력할만 합니다.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

 

사는게 어렵기만 한데, 어려움이 지금 닥쳐있는데, 도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저는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혹시 유익이나 교훈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잠에서 깨자마자, 벌떡 일어나 힘든 시절을 기록하며, 성결히 살자고 다짐하게 됩니다. 십일조의 일부를 이웃과 나누며 살자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런 행동을 하면 이상하기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누려는 의지가 진심이라면, 하나님께서 뒤는 알아서 해결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 입니다.

 

자기계발서 같은 이야기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만 항상 한다면, 지금까지 얻어온 성과를 항상 얻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삶, 다른 꿈을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와 다르게 행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분명하게 하자, 열심히 하자,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힘든 시간을 견뎌가면서 꿋꿋하고, 성결하게 살아간다면, 천국 시민처럼 행동한다면, 하나님께서 필히 선하게 갚아주실 것이라 저는 소박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