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여리고 성이 무너지다(여호수아6:1-2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1. 02:34

 

여리고 성이 무너지다 (여호수아6:1-20)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우리는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장면을 묘사하는 많은 표현들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는 가끔 이런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 정말 성이 무너질까?’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는 조금 다른 방면으로 생각이 바뀝니다. 성벽이 무너진게 진짜냐 가짜냐 하는 의심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순히 소리만 치게 하셨을까? 하는 궁금증.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함으로 복을 받는다는 많은 성경기사 중에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단지 성벽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고 마지막 날에 소리를 지름으로 무너뜨렸다면 정말 너무 허무합니다. 이건 너무 쉽쟎아요? 그 정도로 허술한 성이었다면 굳이 정탐꾼을 보내서 정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여리고성을 함락하기 위한 전투 기사에 정탐꾼의 이야기, 기생 라합이 나오는 이야기 말고도 중요한 기사가 있지요. 바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오는 기사.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는 그렇게나 가슴 졸이며 준비에 만전을 기했는데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너무 어이없게 그리고 싱겁게 끝이 납니다.

 

물론 성벽이 무너졌다고 해서 전투가 필요 없어진 건 아닙니다. 당연히 성안에 있는 군대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수성전 때 군대가 성벽위에 대부분 몰려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성벽이 무너지면서 거의 대부분의 여리고 병사들이 죽거나 다쳐서 아마 손쉽게 처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걸 본다면 그 거룩하고 장엄한 준비기간에 비하면 결과는 너무 허무할 정도로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거의 공짜다 시피 쉽게 어떤 일을 이루어 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것들이 요구되어 지는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기 위해 무려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양을 치며 기다렸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서야 겨우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았습니다. 요셉도 아브라함도 다윗도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너무나도 쉽습니다.

자,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정말 그것밖에 없었는지, 과연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명하셨는지를 자세히 살펴 봅시다.

 

1.여리고 성은

 

사실 여리고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거대한 성읍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이 성은 두 개의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는데 외성은 자연적인 암석의 기초위에 1.8m 두께의 성벽이었고 내성은 외성벽과 3.5~4.5m정도의 간격을 두고 세워진 두께 3.5m의 성입니다. 높이는 9m입니다.

 

기생 라합의 기사에서 보듯 그 이중성벽위에 널빤지를 걸쳐서 집을 짓고 그곳에서 창녀들이 살았습니다. 아마 다른 가난한 이들도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려나무 성읍이라 물도 풍부하고 나무도 많고 교통의 시작점이라서 상업도 발달하고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았고 자연적으로 땅값은 비쌌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 도시를 보호하는 성벽은 겨우 건물 삼층 정도의 높이입니다. 별로 높지 않다고요?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이 여리고성은 평지의 중심부에 있는 바위 언덕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가나안은 남북으로 뻗어있는 산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가 위치한 곳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동영상으로 이 곳을 보면 옆쪽으로 산맥이 줄지어 있고 한쪽은 요단강에 면한 평지인데 이 평지 중간에 거대한 암석으로 된 언덕이 있고 이 언덕 꼭대기에 성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니 사실 엄청나게 높은 셈입니다.

 

게다가 이 성의 양옆으로 난 길을 지켜보다가 유사시에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여리고를 점령하게 되면 가나안을 남북으로 이분해서 이들이 연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가나안은 전체가 통일된 하나의 왕국이 아니라 도시국가로 흩어져 있습니다. 살렘왕이니 소돔왕이니 하고 작은 도시국가연합으로 나뉘어 있고 그들은 스스로 왕이라 칭합니다. 그렇지만 유사시에는 동맹을 맺어서 외적에게 대항했는데 이 여리고를 장악하게 되면 남북의 교류를 차단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여리고는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여리고의 남쪽에는 아모리 족속이 있고 남서쪽에는 헷 족속이 있고 서쪽에는 히위 족속이 북쪽에는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이 있습니다. 북서쪽에는 브리스 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간의 연합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성읍입니다. 그래서 이 길의 중앙 바위언덕위에 성을 짓고 교통로를 차단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평지에서 바위언덕위에 세워진 여리고성이 더 높아 보이고 웅장해 보이는 겁니다.

 

2.여리고 전투의 중요성

 

이 여리고 전투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고 난 뒤 첫 전투입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몇 살이었을까요? 놀라지 마세요. 후계자가 되었을 때 여호수아는 이미 나이가 무려 94세였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부름을 받았을때보다 더 많습니다.

 

여호수아는 55세 때에 가나안땅을 정탐하는 12정탐꾼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굉장하지요? 모세가 살아 있을 때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명령대로 싸우는 장군이었다면 이제 여호수아는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므로 만일 이 싸움에서 패하거나 피해를 많이 입게 되면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을 것이고 그동안의 행동을 보면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불평은 늘어놓고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래서 더 여호수아가 긴장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밑에서 일할 때 허구헌날 백성들이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아 잘알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우지 않고 성을 7일간 빙빙 돌고 마지막 날 소리를 질러서 성을 무너뜨렸지만 처음부터 이것을 기대하고 이스라엘이 무턱대고 여리고로 쳐들어 간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을 보내서 성안을 정탐했고 전투 전에 홀로 적정을 살피다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기도 하고 여하튼 이스라엘측도 만전을 기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 이전에는 광야에서 태어나서 할례를 받지 못했던 백성들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그들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이제 여리고성 침공을 앞두고 있는 순간입니다. 전쟁의 정석대로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준비하면서 여리고를 향하여 점점 가고 있는 겁니다. 정신무장 ,종교적인 정화, 육체적인 컨디션의 회복, 내부 결속, 적정에 대한 정탐같은 전술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차근차근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방식을 대입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승리할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지만 우리는 인간의 일을 또한 해야 합니다. 어쩌면 여호수아가 자기들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했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인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하시는 일만 구경한다는 자세는 있어서 안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즐겨 하십니다.

 

성경에서 여리고 공략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이유는 성이 거대하고 군대가 강해서가 아니라 이 전쟁이 가나안 정복전쟁의 첫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첫 전투에서 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도로 건너서 요단동쪽으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가나안의 동맹군들에게 포위되어 고사할 수 밖에 없기에 여호수아가 그렇게나 신경을 쓰는 겁니다. 여리고와 요단강은 약 17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의 요단강과는 달리 당시의 요단강은 물이 넘실대는 매우 크고 깊은 강이었습니다. 걸어서 마음대로 건너기가 어렵습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리고 침공 소식을 들은 가나안의 도시들은 모두 성문을 닫아 걸고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여리고가 과연 이스라엘의 침공을 막아 내고 이길 것인가? 아니면 여리고가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무력에 굴복할 것인가?

 

만일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공략하지 못하고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쪽에서 지금은 웅크리고 있는 여리고의 동맹군들 가나안의 도시연합군들에게 갈가리 찢길 겁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도시 연합군이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싸움이 되는 겁니다.


가나안의 도시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지 않고 성에 웅크리고 농성만 한 이유는 소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고 게다가 요단강까지 건넜으며 요단 건너 아모리의 두 왕 시혼과 옥이 이끄는 나라들을 전멸시켰다는 무시무시한 소문 때문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신의 군대와 싸워야 한다는데 부담을 느낀 것입니다. ‘여기에 맞섰다가는 신벌을 받아서 전멸한다’

 

3.성을 돌아라 조용하게

 

그런데 여호와의 작전지시가 심히 이상합니다. 모든 군대가 성을 엿새동안 매일 한번씩 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칠일 째는 일곱 번을 돌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백성들이 소리를 질러야 한답니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질 것인데 백성들이 각기 앞으로만 가면서 적들을 섬멸하면 된답니다.

 

성경학자들은 여기에 약 20만의 군대가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20만이 공격에 참가한다면 당연히 성을 함락시키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많은 백성들이 죽을 것이고 어쩌면 노예의 피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직 노예들은 도망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또 이렇게 이상한 전투가 있을까요? 여호와의 명령치고는 너무 쉽습니다. 모세에게는 그렇게나 엄격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여호수아에게는 너무 쉬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나이가 더 들었다고, 죄가 없다고 봐 주는 겁니까? 도대체 왜 일까요?

 

자, 어쨌든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여기에 따라서 나팔을 부는 제사장과 언약궤를 호위해서 열과 오를 맞추어 성을 한바퀴 돕니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약간 특이한 명령이 있습니다.

10절에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러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그러니까 6일동안 조용하게 성만 돌아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말도 하지 말고 침묵으로 성을 돌라고 하는 겁니다. 이를 지켜보는 여리고 성민들은 기괴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성만 조용하게 대형을 유지하고 한바퀴 돌고 그만 돌아가니 이상할 겁니다. 멀리 길갈에서 여리고성을 한바퀴 돌려고 그 많은 군대와 법궤가 행차를 한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행렬입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겠습니까?
명령이니 따르기는 하겠는데 입이 근질거립니다. 하루 이틀 이런 상태가 계속되니 정말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때론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불평도 나올만 합니다. 지도자가 너무 신중하다느니 혹시 저 높은 이중성벽을 보고 싸울 맘이 없어질 정도로 겁장이라느니 하는 불평과 선동들이 터져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태평하고 편안한 맘으로 여리고성을 돈게 아닙니다. 비록 싸우지는 않아도 언제 적이 문을 열고 쳐들어 나올지 몰라서 긴장한 상태로 중무장을 하고 뙤약볕 아래를 대열을 지어서 조용하게 돕니다. 제사장들은 그 무거운 언약궤를 짊어지고 돕니다. 불평이 나올 만 합니다. 때론 긴장이 풀려서 서로 잡담도 하고 싶을 겁니다. 하루 이틀은 긴장했겠지만 몇일동안 돌아도 적이 성 밖으로 튀어 나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벽을 향해서 공격해가지도 않고 완전히 긴장이 풀릴만 합니다.

 

이때 여호수아의 명령이 절묘합니다. 내가 명령을 내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명령은 정말 절묘합니다. 만일 이런 명령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스라엘은 적전 분열이 일어나서 자멸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군대는 수십만입니다. 모든 성인 남자가 칼을 뽑는다는 가정하에 총 60만의 군대를 보유한 이스라엘은 강 저편에 남겨둔 두지파 반의 병력 얼마를 제외해도 성을 돌 필요도 없이 에워쌀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은 군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열이 꼬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악한 마음을 품는다면 후미에 있던 자가 성을 한바퀴 도는게 싫어서 슬쩍 선두의 대열에 묻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어디가 선두고 어디가 후미인지 정확하게 떨어질 만큼 거리가 나올지도 의문입니다.

 

물론 성벽 바로 아래 즉 언덕아래에서 돌지는 않았겠지요. 그랬다가는 화살이나 돌멩이 같은 게 날아오면 피해가 커질 테니까요.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 앞에 진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길갈에 진쳤고  아침에 길갈에서 여리고에 왔다가 한바퀴를 돌고서는 다시 길갈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다시 여리고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게 사실은 매우 귀찮고 힘든 일입니다. 제사장들의 입장에서 언약궤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 언약궤는 내용물은 돌판하고 항아리 하고 지팡이 하나가 전부지만 나무로 된 언약궤를 금으로 뒤덮었기에 무게가 상당합니다. 아마 나팔을 불며 가는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언약궤를 매고 가는 제사장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언약궤를 메고 가는 것은 매우 위험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수만명의 중무장한 부대를 언약궤앞에 세워서 언약궤를 보호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루 이틀 사흘 긴장이 풀리고 불평이 일어난 백성들이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칠 수 있습니다. ‘내가 딱 보니 여호수아가 적에게 겁을 먹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다른 지도자를 뽑아서 새로 대열을 정비하자’ 이런 말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럴거면 뭐하려고 여리고에 왔냐. 차라리 요단강을 도로 건너서 돌아가자’ 또는 ‘굳이 여리고성을 점령해야 돼? 차라리 성을 우회해서 다른 곳으로 가자’ 이런 이야기가 얼마 던지 나올 수 있습니다.

 

10절의 명령에서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라는 말은 옛날 번역본에서는 “들레지말며”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의 원뜻은 마음이 들떠 잡담을 하거나 소란피우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파당을 지어서 쑤군쑤군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대열을 짓지 않고 대열을 흩트리고 군심을 어지럽힌다면 틀림없이 기회만 옅보던 여리고군이 성을 나와 언덕을 내려와서 쳐들어 올 겁니다. 그랬다면 오합지졸인 이스라엘의 노예들이야 걸음아 나살려라 하면서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할 겁니다.

 

그러다가 이곳 저곳의 성에서 추이만 살피던 가나안 군대들이 결국 성문을 열고 추격할 것이고 도망가다 도망가다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가나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적군에게 죽겠지요. 왜냐면 그들의 신이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불행한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는 명령이 바로 10절에 나온 침묵의 명령입니다.

 

“모두 입을 다물라. 외치라고 말할 때까지”

사실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 역사에 동참하고 찬동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처한 처지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기 때문에 모든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보면 욕심입니다.


지나고 보니 그게 굉장한 역사가 된 거지 그 당시에는 이게 잘하고 있는 일인지 아닌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결과를 모르고 과정 중에 있을 때에 이런 저런 잡음이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침묵의 명령이 주효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열을 지어 성을 돌 때 일곱 제사장들은 각각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들고 있는 양각 나팔은 전쟁의 신호용으로만 쓰이는 나팔이 아닙니다. 이 나팔은 희년을 선포할 때도 사용되는 나팔입니다. 기쁨과 축제의 나팔인 것입니다.

 

전쟁을 하면서 이 나팔을 사용하는 것은 이 전쟁이 이스라엘에게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축제를 열고 있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들고 있는 제사장들은 전쟁의 지휘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령관의 지휘를 듣고 나팔로 신호를 해야 하는데 사령관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마침내 긴 기다림의 시간은 끝이나고 제 칠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이 소리를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소리가 그 함성이 얼마나 컸을까요? 얼마나 속시원하게 소리를 질렀을까요?
만일 여리고 성민을 겁준다고 매일 같이 소리를 질렀다면 제 칠일의 소리 역시 별 영향이 없었을 것이고 매일 매일 소리를 질렀기에 소리를 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여상하게 보통으로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일곱 번이나 소리를 지르라고 했기 때문에 목이 아파서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그 말하고 싶은 것은 말하지 못하게 억눌렀으니 그간의 억눌림이 봇물 터지듯이 터지며 소리를 질렀을 것 아닙니까? 그 소리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다가 이를 지켜보던 여리고 성민들은 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수십만의 군사가 일제히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른다면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여리고성으로서는 그들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 다시 여리고성의 함락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돌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게 아닙니다. 그 돈다는 단순한 과정 속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복잡한 일들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불만을 내뱉지 못하고 , 개인들이 가진 불만도 안으로 억누르고, 누구는 행진부대에 속해서 매일 같이 삽질을 해야 하고 누구는 편안하게 진지를 지키고 이런 골치 아픈 일들이 막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막아 치워야 하는 것이지요. 여호와의 법궤를 운반하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들고 함께 돌고 게다가 군대가 완전 무장하고 열과 오를 지어 한 바퀴씩 돌 때 대열이 서로 섞여서도 안되고 ... 후세의 누군가는 여리고성을 한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겨우 삼십분 남짓이랍니다.

 

자,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하나님은 지금 여리고를 정복하러 나선 여호수아에게 너무 편한 전투를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군대의 앞부분에 위치하고 양각 나팔을 잡은 제사장들을 거느리고 나가는 모습은 마치 이 싸움의 사령관이 여호와 하나님인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난 다음 이스라엘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통째 하나님에게 감사의 제물로 드립니다.

 

이정도면 우리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는데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차지하시기위해 자기가 직접 움직이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여호와께 바친 것은 마치 수확의 첫열매를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가나안 첫성을 하나님께 바친겁니다. 이를 헤렘이라고 합니다. 이 헤렘이 되면 모두 진멸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여리고에서 라합의 집안외에는 살아난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금은동철의 보물들은 여호와의 곳간에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기를 즐겨하시지만 그래도 헤렘을 드리기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자녀들이 피흘리는 것을 원치않으셨기에 더 많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장면을 세밀히 분석했습니다. 이제껏 우리는 여리고성을 그냥 돌고 소리 한번 질렀는데 성벽이 무너진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에 들인 정성이 만만치 않습니다.


적을 앞에 두고 그냥 돌기만 하라니, 저 튼튼한 이중 성벽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 무너진다니 얼마나 황당하고 웃겼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여호수아는 한술 더 떠서 제 칠일에 소리쳐라고 할때까지 결코 들레지 말라고 합니다. 불평불만하며 시끄럽게 소란피우거나 하지 못하도록 아예 어떤 소리든 입밖에 내지를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엄연히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방관자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일을 하시지만 인간은 또 인간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믿고 순종하기에는 때로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한마디로 황당한 때도 있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보냐 하고 팔짱끼고 삐딱한 자세로 구경하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역사는 보일 것이지만 우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사역에 국외자이거나 방관자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순히 꽃놀이처럼 장난처럼 운동처럼 여리고성을 돈게 아닙니다. 그들은 축제의 나팔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임재를 체험했지만 그들의 침묵속의 성 돌기는 여호와께 헤렘을 드리는 엄숙하고 장엄한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명령이 있을때까지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속에 의심과 불평을 쏟아내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만 묵묵히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을 감당하며 때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참고 인내합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맙시다. 그 전능하심을 이 나의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때가 불원간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중에 믿고 인내하며 믿음의 용사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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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목사님이 종종 강조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국정파트너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손과 발을 맞추어 하나님과 영교하면서 지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무척이나 영감 가득한 이야기라서 들을 때 마다 이 표현이 좋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과의 소통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머님과 함께 언젠가 새벽기도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설교가 참 단순했습니다. 하나님한테 먼저 물어보고 움직여라는 것입니다. 자꾸 먼저 앞서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고 살 만큼의 힘과 재능을 주셨다면,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루를 맞이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주 감사를 잊고 지내니까 말이에요.

 

감사함으로 맞이하는 하루와, 불평과 짜증으로 맞이하는 하루는 분명 그 격이 다를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 중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 불평 보다는 성숙 하기를 바라는 것일테지요. 사실은 개인적으로는, 어머니가 아프신 이후로, 힘이 드는 시간이 많습니다. 뜻대로 뭔가를 해나가고 싶을 때도, 부담이 걸릴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무엇인가 배울 게 있는 건 아닌지, 서서히 되묻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뿐인 삶을 체험의 기회로 생각하는 태도 입니다. 그리고 공감할 수도 있습니다. 제 친구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로 아프다고 하니까, 그런 아픔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는 거울뉴런이 있어서 모방하고, 공감한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를 보면서, 불평이 얼마나 쉽게 전염될 수 있느냐를 걱정했는데, 하나님께서 승리를 위해서 침묵을 강조하는 태도를 보면서 매우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나도 고난 중인 시간이 있다면, 더 열심히 인생을 살아감으로서, 위기를 이겨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하나님께서도 함께 더 살만한 곳으로 세상을 바꾸어가자고, 이야기 해주실 것이라고 작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 시북 2016.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