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창세기3: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1. 03:07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창세기3:15)

 

제가 산기도를 참 좋아합니다. 산기도도 그냥 산에 있는 기도원이나 기도 처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숲이 우거진 곳에서 야생의 산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더욱이 낮뿐만 아니라 밤을 새우는 것도 즐겨합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는 한국의 산에 뱀이 별로 없었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산으로 많이 가기 때문에 뱀들이 다 도망을 갔는지 없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산에서 뱀을 본 것도 한번인가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귀국하고 난 다음에는 정말 많은 뱀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멧돼지니 노루니 하는 짐승들도 많아지고. 금정산이나 지리산같은 깊은 산뿐만 아니라 수영강 옆의 작은 공원에서도 임도에서도 심지어는 집뒤의 야산에서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뱀을 만나면 솔직히 좀 끔찍합니다. 징그럽고. 그런데 집뒤의 구월산에서 제가 잘 가는 곳이 있습니다. 임도를 꺾어 들어가서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제가 참 좋아하는 곳인데 그곳의 조용한 숲길에서 뱀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독사라고 알려진 푸른 녹색뱀을 말이지요. 생긴건 귀엽게 생겼는데 이게 독사랍니다. 제가 항상 기도하고 쉬기도 하고 눕기도 하던 곳인데 그 뱀을 만나고부터는 그쪽으로 가기가 꺼려지더라고요.


사람들에게는 극히 예외가 있지만 뱀에 대해서 꺼리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들백교회에는 주일학교 건물 안에 있는 유리 상자에서 상당히 거대한 뱀을 키우기도 하는 것을 봤습니다만.
여기 오늘 본문에 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하와를 꾀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한 데 대한 징벌의 말씀입니다. 뱀의 유혹의 결과로 아담도, 하와도, 마침내 뱀 자신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오늘 본 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뱀은 이미 앞 절에서 모든 짐승보다 더 저주를 받아서 배로 다니고 평생 흙을 먹도록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본 절의 말씀은 뱀의 후손에게 엄청난 저주의 운명을 지우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는 사람인 이상 모두 여자의 몸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인류와 뱀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히브리 원문으로는 ‘내가 증오를 놓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너와 여자의 후손사이에 증오를 놓을 것이다.

 

뱀은 여자를 꾀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금하신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우리가 신들 중의 하나와 같이 똑똑해 질것이라고 하와에게 그 열매를 먹도록 종용했습니다. 우리는 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것입니다. 신이 되어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든지 신의 권능을 가져 어떤 것도 부족함없이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든지 금은보화와 기름진 음식과 아름다운 물건들을 원없이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단지 똑똑해 질 것이라고 그래서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똑똑한 것은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지혜로운 것보단 재물을 더 원합니다. 출세하면 되지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를 신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마치 우리를 신으로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하와의 입장에서는 죽어 본 적이 없어서, 늙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겠지만 지금 우리는 모두 죽음이란 끔찍한 괴물앞에서 전전긍긍합니다. 그 죽음으로 이른다고 생각되어지는 노화를 막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과 인간을 죽는 존재냐 영원히 사느냐로 나눕니다.

 

생로병사의 비밀이라고 하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비밀에 대한 지식은 마치 우리를 신에게로 한걸음 더 다가가게 만들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지혜를 갈구합니다. 그래서 이세상의 기원과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뭔가 비밀한 지식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처음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신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째로 인간은 바벨탑을 쌓음으로 신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늘 높이 신이 사는 곳에 닿으면 신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인간은 그곳으로 가지 못했고 인류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과학이라는 지혜로 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한참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하나 발견하고 나면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느니 이제 겨우 이 신비가 몇%만 남았다느니 하는 말들이 신문 지상에 많이 오르내립니다. 게놈지도를 해독했다, 몇 번 염색체 유전자가 노화에 관여한다느니 하는 저는 잘 모르는 많은 지식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줄기세포에 인간복제에 점점 더 많은 지식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뱀의 말이 맞았습니다. 똑똑해져서 신이 된다는 말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신은 여럿일 수 없고 신은 오직 한분 하나님 뿐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사실 아무리 똑똑해 져도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뱀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사람을 꼬신 것은 사실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에게 맞서도록 하기위한 속임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뱀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단지 하나님, ‘엘로힘’이라고 부름으로써 신이 하나님 한분뿐이 아니라 여러명이며 너도 역시 똑똑해 져서 신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엘로힘’은 엄밀히 말하면 ‘신들’이라는 뜻입니다. ‘엘’이라는 말의 복수형입니다. 엘은 능력자, 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엘로힘’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말하기도 하지만 ‘신들’이란 의미도 가지게 됩니다. 문법적으로야 셈족어의 장엄복수라고 이야기하는데 원뜻은 ‘신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신데 원문은 ‘신들’로 되어 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이미 세상에는 한분의 신이 아니라 여러 신들이 있으므로 너도 그 신들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은 암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은 지금 마치 하와에게 신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로 인간에게는 알려 주지 않은 신이 되는 고대의 주문같은 비법을 알려 주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하와는 뱀이 자기들을 돕는 고마운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와는 자기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될지를 확실히 알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에덴동산을 넘어서 이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뱀이 어둠가운데서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하와는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의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처럼 눈이 밝아지고 똑똑해 지기는 했지만 결국 자기들이 벗었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뱀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신은 되지 않았지만 눈이 밝아지고 더 똑똑해 진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에게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형벌의 문을 여는 멍청한 행위였습니다.

 

결국 뱀은 인류에게 죄를 짓게 만들어 하나님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뱀은 인간의 구세주가 아니라, 인간을 도와주는 고마운 은인이 아니라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도록 만든 원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뱀과 여자의 후손사이에는 영원한 증오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는 나의 원수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너 뿐만이 아니라 너의 후손역시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념상 후손은 수많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뱀과 사람들 사이에 증오가 존재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마치 제가 산에서 뱀을 꺼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후손이란 말에는 수많은 자손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 ‘여자의 후손’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즉 수많은 여자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랍니다.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과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 과연 어느 쪽이 더 치명적인지는 명약관화합니다. 사탄의 세력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하며 상처를 입힐지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힘이 뱀의 머리를 부수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인류의 처음에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채 한세대도 흐르지 않아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됩니다. 인류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죽음을 숙명적으로 안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공명정대하신 분이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죄를 아무 댓가 없이 없는 것으로 해주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너희들이 나의 명령을 어기기는 했지만, 나의 법을 어기기는 했지만 죄가 경미하고 처음이니 내 특별히 용서해 줄께라고 하실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은 그를 죽음에 처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진 것입니다. 생각하면 너무도 참담합니다.

 

우리 인간의 사법체계에는 죄와 형벌이 세분되어 있습니다. 경미한 범죄에는 경미한 벌을 주고 살인과 같은 중범죄는 중한 벌로 다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죄는 무조건 사형이라는 법 하나뿐입니다. 왜냐면 그분은 너무나 거룩하고 깨끗한 분이며 죄를 보며 돌진해서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이, 그것도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것도 아니고 남편으로부터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서 하나님의 명령의 엄중함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수도 있는 여인을 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벌이 너무나 중합니다. 이제부터 인간은 영원히 저주의 굴레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날 때 이미 자기의 구원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창조되자 마자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시고 그 피값으로 우리를 사하실 거대한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인간 육신의 몸으로 오게 하실 것을 말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류구원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입었고 그의 계획속에 있다는 말들을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구약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제일 처음으로 언급한 곳입니다. 단순히 내가, 우리가 여자들이 뱀을 싫어하는 이유를 적어 놓은 곳은 아닙니다.

 

머리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믿습니다. 그러나 뱀 역시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머리를 상하는 것에 비하면 미약하기는 하지만 결코 무시할 정도는 아닙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상하다’는 말은 히브리 원문으로는 ‘집요하게 공격하여 상처를 남긴다’는 말입니다. 즉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여 상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탄은 ‘훼방자’라고 불려집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탄은 ‘옛뱀’입니다. 에덴동산에 하와에게 다가와서 간교한 혀를 놀려 인류를 죄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옛뱀이 사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탄과 원수로 만드셨습니다. 사탄과 우리 사이에 증오가 놓여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과 친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믿습니다. 그가 뱀의 머리를 밟고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는 사탄을 이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것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탄을 이겨야 합니다. 이길것이지만 이기고 또 이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사탄이 세운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않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따름으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사탄의 권세를 이겨야 할 의무가 우리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절에서 인류가 죄를 짓자 마자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거대한 섭리의 처음을 봅니다. 우리는 절망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희망을 봅니다.

우리는 흔히 지금의 세상을 영적인 전쟁 중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운명을 알고있는 사탄이 성도를 넘어뜨리고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전쟁,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더 격렬하며 보다 근원적인 전쟁, 이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의 세력이 발꿈치를 집요하게 노리며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들의 세상의 법칙으로 우리를 재단하며 세상의 문화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만 마치 자기가 주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더 이상 신을 믿는 신자가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자랑과 교만으로 우리에게 유혹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미덕이 아니라 ‘까도남’이 되라고 합니다. 겸손과 희생은 내버리고 자랑하고 어필하며 지배하고 이용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리고 그 세상의 법칙에 따르지않는 착한 이들, 얼굴 가죽이 두껍지 않은 이들은 철저하게 패배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세상을 해할 뜻이 없지만 세상은 자기들과 한가지로 악을 행하지 않는 이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습니다.

 

사탄이 훼방자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사탄의 별명이 또 있습니다. 고소자, 참소자.
사탄은 세상을 다니면서 성도의 행동을 잘 살피다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번개처럼 하나님에게 가서 우리를 고소합니다. “하나님, 성도라고 하는 아무개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그대로 두면 당신의 법에 위배되니 이 사람에게 벌을 줘야 하지 않나요?”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은 성도에게, 죄를 범한 자에게 벌을 안 주실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정확하게 우리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만 고소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사실 참소자입니다. 우리의 적은 잘못도 크게 부풀려서 하나님에게 참소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삶에서 항상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그래서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성도기 때문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더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 어른들이 항상 하시던 말씀 “사탄이 틈탄다” 그래요,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들입니다.

 

하루 하루 세상에서 살 때에 항상 스스로를 자제하며 돌아보며 스스로 경계하며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부족함이 없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발뒷꿈치를 문다는 것은 곧 우리의 허를 노린다는 말입니다. 항상 깨어 자신을 다스리며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구현하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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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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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거룩하게 구별되어 사는 삶. 딱 단순하지만 이렇게 머릿속의 단어들이 차례차례 떠올랐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다른 점이 있어야겠죠? 그래서 우리는 나눔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별되어 있으므로, 나쁜 곳에는 고의적으로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살면 어쩐지 지루하고 재미없을꺼라고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하. 공동체가 있으니까요. 성도들의 모임이 있으니까요. 교회가 있으니까요.

 

어머님이 아프신 관계로, 제법 두꺼운 서적인 정신건강의학사를 보고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제자격인 아들러, 융과 서로 싸우고 대립하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세계란 이렇습니다. 서로가 뛰어난 모습을 보이자, 인정하기 보다는, 비판하거나, 깎아내릴 때도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여기에 개의치 않고 각자가 저마다 갈 길을 열심히 걸어갔기에 정신건강의학사는 한결 더 폭넓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점이 무척 재밌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발견했을 때, 충실하고, 묵묵하게, 열심히 걸어감으로써, 이 사회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생각이 번뜩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맡은 짐이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특히나 안 그래도 잘 하고 있는 사람에게, 괜히 더 많은 짐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힘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더 격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멋진 성도들, 힘내는 성도들, 아름다운 성도들, 빛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말만 하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부족하니까 말이에요. / 시북 2016.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