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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다(예레미야4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27. 04:36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다 (예레미야42:1-)


요즘 우리나라의 형편을 보면 마치 구한말과 같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미중러일의 네나라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 네나라는 하나하나가 능히 세계에 우뚝설 만한 그런 나라입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과 중국은 세계의 2대 강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힘듭니다.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이런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 얼마 있으면 이제 우리는 아예 나라의 독립을 포기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도저히 답이 없으니까. 결혼율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그래서 출산율은 역대 최저, 세계최저치에 근접했습니다. 일본보다 훨씬 일찍 노령화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도 지금 일본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구 1억2800만의 일본은 지금 인구 1억을 유지하려는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말로만 저출산 대책을 세운다고 실제로 하는 일은 없이 헛소리나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 기가막힌 것은 그런 헛소리뿐만 아니라 실제로 저출산대책으로 투입된 돈은 수십조원이 넘었다는 겁니다.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항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정부 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고. 여러분 설마 이 말이 사실은 아닐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일단 우리의 현실을 보면 집값은 너무 비싸고 아이들을 키우는 돈은 엄청나게 많이 듭니다. 뭐 돈이 아니라도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도 잘 없습니다. 일자리라고 있는 것은 전부 계약직이나 비정규직 아니면 공장이나 노동일 정도 밖에 없습니다. 아르바이트 정도로는 현상유지에도 급급한 실정입니다. 혹자는 서비스산업을 발전시켜야 된다고 그러는데 제조업이 없는 서비스 중심의 발전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공무원들은 더 이상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경찰도 마찬가지고 군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기 도입비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군인들을 조롱하고 비웃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웃기고 또 실망스럽게도 북한보다 삼십배 이상의 국방비를 지출한지가 수십년이 넘었는데도 미국없이 북한과 싸우면 질 수도 있다는 군인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그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렇게도 자신이 없으면 옷벗고 내려와야 합니다.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무도 국방부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법체계는 완전히 국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어떤 변호사, 전직 검사인 그 변호사는 보유하고 있는 오피스텔이 무려 140채가 넘는답니다. 기가 찹니다. 누구는 한해 200억을 벌었니 100억을 벌었니 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스폰을 받고 있는 검사는 내부자 정보를 이용해서 무려 140억대의 이익을 거두었답니다. 청와대 무슨 수석이라는 사람의 처가는 1300억대의 땅을 팔았답니다. 굉장합니다. 그 많은 돈들이 그렇게 굴러다니는데 서민들에게 삶이란 정말로 고단하고 힘든 일입니다.

 

청소년도 자살하고 청년도 자살하고 가장도 자살하고 일가족이 자살하고 노인도 자살합니다.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도 있습니다. 곳곳에 자살명소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소액사기는 셀 수도 없을만큼 많아서 경찰에 신고해도 잡기가 어렵답니다. 또 그걸 노리고 사기가 멈추지를 않습니다. 이런 와중에 조선족이니 중국인들이 들어와서 피싱이니 파밍이니 하면서 사기를 칩니다. 검사는 돈을 받고 혐의를 줄였다가 늘였다가 마음대로 하고 심지어 진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억울한 사람들을 17년간 옥살이를 시키는 지경입니다.

 

이 땅에 진정 희망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헬조선이니 개한민국이니 하는 저주와 체념의 말들을 내뱉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왜 잘살게 되었는지 아시죠? 어머니들이 매일같이 수십만번씩 흥해라고 외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애들의 코를 풀어 주면서 “흥해라 흥해라 ”이렇게 말하 쟎아요. 그런데 지금은 ‘망해라 망해라’는 원독에 찬 저주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말들이 하늘 보좌에 까지 상달될까봐 두렵습니다.

 

자, 이제 대충 이까지 합시다. 말할려면 한도 끝도 없어서 저도 끔찍합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의 기도 부탁을 받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민족의 멸망이 일반인들의 눈에도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징조가 너무나 뚜렷해서 아무리 외면하려해도 결코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어 버렸습니다.

 

나라는 이미 망했고 사람들 민족이 없어질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남은 백성들은 단체로 애굽으로 망명을 하려고 합니다. 일부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고 일부는 주위나라로 흩어 졌으면 남은 이들도 이제 가나안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찾아 와서 기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기도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지 하나님의 뜻을 아르켜 달라는 기도부탁입니다.

 

통일 이스라엘왕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북쪽 이스라엘은 옛날에 망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이 12지파를 이루고 있을 때 이들은 걸핏하면 지파별로 싸웠고 서로 경쟁했고 질투했습니다. 그 병폐가 그대로 노출되어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북쪽의 열지파가 이룬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서 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고토에는 이방인들이 몰려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통혼을 하면서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인들이 그들입니다. 일부는 남쪽 유다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쪽 유다마저 망했고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본토는 그다랴의 지휘하에 바벨론의 총독령으로 존속하고 있었는데 이스마엘의 반란으로 총독 그다랴가 죽고 많은 이들이 함께 죽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유대에 주둔했던 바벨론의 군대와 사람들도 죽였습니다. 본문에는 갈대아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바벨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수르나 바벨론을 동일시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이라고 하지 않고 갈대아, 나라이름이 아니라 민족명을 부른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요하난이란 사람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마엘을 공격해서 이스마엘을 패배시키고 그가 끌고 가던 백성들을 도로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하난이나 남은 백성들이 생각할 때 자기들이 미스바로 도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바벨론왕이 자기가 세운 총독을 죽이고 또 바벨론 사람들과 군대를 죽인데에 대해서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의 반란에 대한 책임을 자기들에게 물어서 자기들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마엘이라도 잡았으면 모든 보복은 이스마엘이 당하겠지만 그는 암몬으로 무사히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니 바벨론왕의 보복을 당할 사람들은 자기들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애굽으로 망명을 하는게 더 낫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스바로 돌아가지 않고 베들레헴 인근의 게롯김함에 머물러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다면 유다의 남은 백성들은 지금 어디쪽에 서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그래왔습니다.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유다는 항상 고민해 왔습니다. 사실 유다야 매우 작은 나라입니다. 통일 이스라엘도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의 패자들에 비하면 작은데 이스라엘이 분리되어서 남과 북의 나라로 갈리고 이제 북쪽이 망하고 남은 유다는 정말 나라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입니다. 겨우 예루살렘과 그 인근지역만 남아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한반도가 갈라져서 남과 북으로 나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스라엘이나 유다처럼 약한 나라가 아닙니다. 아주 강하고 많은 국민들이 있습니다. 또 부유합니다. 그러나 아직입니다. 우리는 점점 약해지고 가난해 질 겁니다. 우리의 산업은 성장동력을 잃었고 새로운 아이들은 점점 더 적게 태어납니다. 여기 정관에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하지만 부산의 구도시쪽으로 가면 골목에 뛰노는 아이들을 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유다의 마지막왕인 시드기야왕은 바벨론에 잡혀 갔습니다. 그는 불구의 몸이 되었고 바벨론은 느부사라단이라는 장군이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우고 일부 바벨론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수했는데 철수하면서 그는 왕과 귀족들 제사장들 부자들과 기술자들과 군인들을 대거 잡아가버렸고 남아 있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주로 가난하고 재주없는 사람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게다가 옥토에는 돌을 던져 황무지로 만들었고 우물은 메꾸어 버렸고 포도원은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해서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의 산업기반이 무너진 겁니다.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런데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서 바벨론의 총독과 바벨론의 군대를 죽인겁니다. 우리식으로 쉽게 생각하면 이들은 어쩌면 일종의 독립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군이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총독과 군대를 파하고도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서 암몬으로 망명을 가려고 하는걸 보면 그렇게 독립에의 염망도 강하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이스마엘이 잡은 포로들의 내용을 보면 이들 중에는 왕족의 딸들과 그들을 시중드는 내시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마엘의 암몬망명 시도는 상당부분 실패했습니다. 워낙 소수로 반란을 일으키다 보니까 요하난과 군대가 와서 이스마엘을 패퇴시키고 그가 끌고 가던 포로들을 모두 찾아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스마엘의 포로들도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합니다. 이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데도 정복자들이 두렵기만 합니다. 어차피 망국의 백성들이니까 이스마엘 대신에 자기들을 본보기로 처형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이들이 바벨론의 군대가 얼마나 포악하고 잔악한지를 봤기 때문입니다. 미지막왕인 시드기야는 두눈을 뽑혔고 다른 이들도 끌려갈 때 어떤 치욕을 당하는지를 봤기 때문에 이들은 바벨론을 두려워했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은 이전의 앗수르에 비해서는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편다고 폈지만 지배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같게 느껴진겁니다.

 

그래서 여전히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은 이스라엘에 쳐들어 온 적이없습니다. 그들은 사막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쳐들어 가기도 힘듭니다.

 

이스라엘민족의 처지가 참 가련하지요? 그들은 갈대아에서 나와서 가난안에 거주하다가 애굽으로 가서 400년 이상을 살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간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갈대아와 애굽에 다 연고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항상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는 갈대아와 애굽사이에서 자주독립국가로 번성했다가 이후 너무 오랫동안 약소국으로 살아왔습니다. 결국 그들이 약해진 것은 남북분단과 하나님에 대한 배교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배교에 화가 나서 그들을 약하게, 괴롭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요.

 

이걸 보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나라가 아주 우습게 되어 버렸습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야겠지만 진짜로 통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고는 어려워 보입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이 상황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도 처음에는 자주 싸웠습니다. 그래서 더 서로 미워하게 된 것이기는 합니다.

 

나중에는 남쪽의 선지자가 북쪽에 가서 예언도 하고 남과 북의 왕들이 공동으로 외적을 치러 가기도 하지만 처음에는 정말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막 싸워서 수십만의 생명들이 힘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북쪽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여로보암 2세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이 나와서 멸망 직전에 이스라엘의 최대 전성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남쪽의 경우에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때에 국력이 충실해 진 적이 있었고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음란하고 포악무도한 왕들이 뒤를 이으면서 나라가 멸망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과 북 모두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나라가 망한 다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둘 사이에서 우왕좌왕합니다. 이미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되었지만 이들은 항상 그래왔듯이 애굽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들은 애굽을 전쟁도 없고 모든 것이 풍족하며 자기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낙원으로 여깁니다.

 

문제는 이들이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의 신들을 섬길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이 애굽에 가는 것을 반대하고 약속의 땅에서 계속 거주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지역신 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는 애굽의 신이 바벨론에서는 바벨론의 신이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망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도 애굽이 아니라 바벨론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너희가 애굽을 의지해 봐야 저들은 너희를 절대로 도울 수 없다. 결국 너희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의 역사 후기 내내 친 바벨론파와 친 애굽파가 유다 내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을 보고서도 우상을 믿는 주변의 나라들을 겁내서 이쪽에 붙을까 저쪽에 붙을까만 생각했다는게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누구도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처럼 지켜주지 않습니다. 동맹이니 혈맹이니 해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위해서 그런 식의 수사를 붙이는 것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 같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것과 같지요?

 

그런데 저는 바벨론이 미국인지 애굽이 미국인지 도대체 어느 쪽이 더 미국같은지 어느쪽이 중국같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기사를 잘 살펴보시고 도대체 어느쪽이 애굽인지 어느쪽이 바벨론인지 한번 재미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미래를 알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비슷하기는 하지만 똑 같지는 않으니까 꼭 맞는건 아닙니다만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와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의 알력을 보니 예레미야와 백성들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보는 눈을 주시고 미래를 아는 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눈있는 자는 깨닫게 해 주십시오.

 

요하난과 백성들은 예레미야에게 와서 요청합니다. 기도를 요청합니다. 무슨 기도냐하면 우리가 애굽으로 가야될지 아니면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할지를 묻는 기도를 여호와께 드리고 그 대답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을 일러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 남은 적은 무리”라고 말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다 죽고 우리만 살아 남았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 이 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이제는 너무 지친다는 말입니다. 죽고 죽이고 처음에는 외적이 쳐들어 와서 죽였고 이제는 독립파와 비독립파가 서로 싸웁니다.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 이 사태를 보복한답시고 바벨론에서 군대를 보내올 것 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죽을 사람도 없고 잘못하면 이스라엘이 멸족하겠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전쟁의 나팔소리는 안듣고 그냥 평화스럽게 살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만 남았다고 예레미야에게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좀 보면 순진하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이들의 요청에 뭐라고 답했는고 하니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응답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게 왜 순진하고 바보같은 일이 됩니까?

 

그건 이 사람이 이전에도 한번 이런 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왕 시드기야가 예레미야를 불러서 역시 기도를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애굽을 의지해야 할지 바벨론을 믿어야 할지를 기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레미야는 애굽을 믿으면 안되고 바벨론에게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대답했다가 왕궁 뜰 구덩이에 갇혀서 죽을 뻔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구덩이는 국사범을 가두는 곳입니다. 나라의 민심을 소란케하고 나라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죄목으로 가둔 것입니다. 물론 유다는 당연히 바벨론에게 멸망당했고 시드기야는 끔찍한 모습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런 식의 대답을 하기를 원해서 한게 아닙니다. 예레미야라고 해서 나라를 사랑하지 않은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대답을 전달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하니까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은 겁니다.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예레미야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따져야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도 할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자녀로 생각하시지만 정작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저 먼 낯선 조상들의 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바알이 있지 여호와는 없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예레미야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또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대답을 정확하게 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니 바보같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정확한 응답을 알기를 원하는게 아닙니다. 자기들이 듣기를 원하는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지요. 즉 예레미야의 기도가 자기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자기들 마음속에는 갈 바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면 예레미야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하나님이지 결코 자기들의 하나님은 아니거든요. 백성들은 이야기하는 내내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켜 주어도 들어먹지를 않습니다.

 

백성들과 요하난은 애굽으로 망명할 생각을 이미 정했습니다. 왜냐면 이들에게 애굽은 지상낙원이기 때문입니다. 전쟁도 없고 물과 먹을 것이 풍부하고 평화스러운 곳, 자기의 조상들이 항상 그리워했던 그 곳으로 가려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괜히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은 예레미야의 기도가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다 정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생각과 같으면 순종하는 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무시합니다

 

어떻게요?
예레미야를 거짓선지자로 몰아붙이는 거지요. 그래서 너의 기도는 엉터리이므로 우리는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기가 찬 일이지요. 그런데 요즘도 이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니 일어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이와 똑 같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들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아니고 목사가, 기도하는 자가 엉터리고 신령하지 못하다는 게 됩니다. 자기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뭣 때문에 기도부탁은 합니까?

 

괜히 신앙있는 척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과는 상관없이 행동할거면 그런 가식도 걷어 치워야 합니다. 우리는 나라가 어떻게 하면 보존되고 흥왕하게 될건지를 압니다. 하나님앞으로 모든 백성들이 돌아오고 국민들이 서로 사랑으로 뭉쳐서 정의가 시행되면 저절로 부흥하고 국민들은 나라를 저절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천만이, 팔천만이 이렇게 뭉치면 세상에 어떤 나라도 쳐들어 오기가 어렵습니다. 쳐들어 왔다가도 콧등을 세게 얻어맞고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거는 하기 싫고 기도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백성들이 기도를 부탁한 십일 후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애굽으로 가지말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옛날부터 바벨론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미스바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곳에 돌아가면 바벨론이 너희를 괴롭히지 않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평안하게 살거지만 애굽으로 가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칠 거라고 합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의 세가지를 말씀하셨지만 이건 한가지를 가리킵니다. 바로 전쟁. 칼로 치고 성을 포위하면 먹을게 없어서 또 사람이 농사를 짓지 못해서 기아에 허덕이게 되고 기근이 오고 그리고 전염병이 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도망간 애굽으로 바벨론이 쳐들어 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애굽이 바벨론에 진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의 바램하고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애굽은 해가지지 않는 태양의 제국이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부한 평화의 영원불멸한 제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애굽에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오히려 이 보잘 것 없고 척박하고 위험한 땅에서 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살면 내가 복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모든 성이 훼파되고 우물은 메꾸어지고 포도원과 옥토는 황무지가 된 바로 그곳에서 살라고 하십니다.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거짓 선지자로 몰아 붙이고는 예레미야와 바룩을 애굽으로 잡아 갔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애굽에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아니고 전승입니다. 그래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정확하게 전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듣고 싶은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거짓선지자로 몰리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신도들이 듣고 싶은 것을 이야기해야지 그들이 듣기 싫은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그대로 전한다면 그는 신도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너무 끔찍하고 슬프지 않습니까? 나라가 망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수준이 왕의 수준 못지 않게 저열하고 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한 겁니다.

 

우리는 지금 누란의 위기 속에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나라적으로도 그런 위기 속에 있습니다. 교회의 위기가 뭔지 모르겠다고요? 사람 줄어드는거? 천만에 우리 기독교도는 너무 많습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한번쯤 거를 필요가 있습니다. 정작 우리 기독교의 위기는 신앙의 변질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구도 없고 그냥 물에 물탄 듯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대형교회들은 마치 대기업처럼 모든 일들을 해나갑니다. 이게 정당합니까? 교회의 세습과 세속화는 심각합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싸우고 번연히 진리가 아닌 것도 마구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쪽에서는 수천억짜리 예배당을 앞다투어 짓고 있습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기분입니다. 목사와 장로들은 신문지상에 범죄에 연루되어 오르내립니다. 정녕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게 진정한 위기입니다.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면 신자의 수는 저절로 늘어납니다.

 

또 신자수가 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질적 부흥이라고 신자 개개인이 하나님앞에 바로서서 영향력을 증대시키면 되는 겁니다. 숫자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면 됩니다. 무엇이 중한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 무엇이 교회의 본질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 그게 위기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나라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나라를 제대로 유지하기위한 영적이며 도덕적인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은 평양 대부흥 운동을 일으키시고 백성들이 왜정 35년간을 잘 이길 수 있도록 준비 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한번 신앙으로 하나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항상 민족의 안녕과 보존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왜냐면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드도 결국은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그 옛날 무시무시한 악의 축같아 보이던 그리고 결코 망하지 않을 것 같던 붉은제국 소련도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빼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나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역사의 격랑 속에 직접 들어와 있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선지자라면 일반 신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저도 이런 식의 경고를 하는게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 먼 훗날 아버지께서 물으실 때 떳떳하게 제가 그때 분명히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우리는 한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지만 하늘의 뜻이 백성의 뜻으로 표출되는 것이지 백성의 뜻이 하늘의 뜻으로 표출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구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의 순종이란 말도 많이 하고 듣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을 성경말씀이 꺾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그냥 남에게 보여주기 식의 가식적인 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나라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바로 서야합니다.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이 나라를 보호하실 가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각할 때 이 땅에 내가 보호해야 될 의인들이 많아서 내가 도저히 이 나라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 의인 우리가 하십시다. 그 의인의 숫자를 우리가 채우십시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움직이시며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영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그 영적인 질서를 우리가 세웁시다. 그래서 영적인 강대국이 되어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듬뿍 받으십시다.

 

어때요? 나의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와 신자가 됩시다. 내 하나님의 뜻을 무조건 따르고 순종합시다. 그가 우리를 부흥케 하시고 그가 우리를 보호하시며 그가 우리를 부강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바로 선 나라, 모든 국민들이 예의염치를 알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공경하며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식이 통하는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이면 내가 가진 고집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나는 싫어, 나는 이게 좋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맞추거나 취사선택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뜻과 다르다고 진실된 선지자를 거짓선지자로 몰아버리고 돌을 들어 치고 구덩이에 가두는 일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에 딱 좋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설겁니까 사람들의 입맛에 맞출겁니까?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하나님의 편에 섭니다.

 

그러나 목회현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입맛을 외면하고 그들의 바램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말씀을 사람들의 이성에 맞게 뜯어 고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내 고집대로 성경을 취사선택해서 말하게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지침이 되지도 못하고 나는 더 이상의 인도하심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 땅을 살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비록 세계사의 격랑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지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세상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움직이는 영적인 질서를 우리가 충분히 세울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떳떳한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하나님을 떠나서 영원한 안식을 줄 수 있는 땅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라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득세하는 순간 그곳은 지옥이 됩니다.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을 제어하고 규율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은 결코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자연들은 나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집니다. 그러나 유럽이 그렇게 빛이나는 것은 사람들이 그 위에 세운 인문적 환경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나 중국은 입간판 때문에 도시가 너무 더럽고 소란스러워보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빼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도 중국도 제법 그럴듯합니다. 그러므로 그 자연을 이용하는 인간이 항상 문제인 겁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우리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믿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이끄시는 그곳으로 순종하며 가야 합니다. 그는 나보다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나시고 그는 되어질 일들까지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가 나아가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며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기도의 응답에 순종하기
나의 판단보다 아버지의 판단을 우선하기
나만이 아니라 우리까지 생각하기

 

어때요? 이정도면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 주십시오. 이 나라를 불쌍히 보시고 지켜주십시오. 우리가 참된 성도로서 기능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우리는 말씀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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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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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설교를 들으면서 불편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경고의 설교이고, 각성의 설교이기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지금 이대로 정말 괜찮은거니? 아니야! 우리 기독교인들이 바로 서서 행동하도록 좀 더 노력하고, 좀 더 깨끗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느낌을 매우 강하게 전달 받습니다. 물론 우리는 변명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나름대로 참 열심히 살았답니다 라고요.

 

 그렇지만 주님께서 물어보실 것 같습니다. 아무개야,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았니, 그 사랑을 얼마만큼 나눠주었니? 그러면 우리는 대답하겠지요. 그게 아니라 오 주님, 요즘은 자기 한 몸 챙기기에도 겨우 겨우 힘이 드는 세상인거 아시잖아요.

 

 사실은 그래서 이처럼 어려운 시기라서, 바른 신앙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대로, 흔들리지 않고 주만 바라보는 것이 참 필요하겠지요.

 

 그래요 생각해보면, 사이비 사교집단이 말하는 그런 성도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고 있는 참된 크리스챤이 얼마나 이 땅에 멋지게 남아있느냐가, 숫자보다 훨씬 중요하고 가치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이웃에게, 이 힘든 시기 함께 힘을 내보자고 격려하는 아름다움이 보고 싶습니다. 넘어진 사람도 일으켜 세우려는 기독교. 그런 빛나고 밝은 교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소소한 바람들이, 마치 기도하는 기분이 들어서 새삼 놀랐습니다. / 시북 2016.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