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개정판,야고보서1:12-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5. 00:55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개정판) (야고보서1:12-18)


우리가 너무 너무 잘 아는 말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는 것 그게 바로 시험입니다. 이것도 잘 압니다.

오늘 야고보는 본문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무슨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악마의 유혹, 달콤하면서도 극도의 쾌락으로 주어지는 강렬한 유혹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하게 나의 신앙상태와 하나님에 대한 충성도를 평가하는 시험을 말할까요?
아니면 극도의 인내를 요구하는 어려운 시련을 뜻할까요?

 

이번 여름 기도기간에는 제가 산으로 가지 않고 좌광천을 걸었습니다. 물론 옆에 있는 작은 산도 갔다 오기는 했지만 좌광천을 걷는게 저의 주목적이었습니다. 제가 좌광천 끝까지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단단히 작정하고 조금씩 조금씩 강도를 높여 나갔습니다.

 

그런데 좌광천을 다 걷고 난 다음에 느끼는 것은 두 번은 못걷겠다는 겁니다. 덥고 중간에 냄새도 안좋고 공단의 화공약품냄새 그리고 물에도 그 냄새가 나고 결정적으로 너무 멀어요. 저의 집에서 내려와서 좌광천에 당도하면 약 500m정도 그리고 좌광천 총 11km이상, 해수욕장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 약 2km.

 

얼마 전에 제 여동생과 조카가 북부 스페인의 야고보길, 순례자의 길을 40일동안 걷다 왔는데 저는 좌광천길을 순례자의 길로 여기고 갔다 왔습니다. 4일 동안, 구간을 정해놓고 계속 갔다 왔다 하는 거지요. 오늘은 여기서 여기까지 뭐 이런 식으로 . 제가 원래는 산을 주로 가는데 요즘 산에 멧돼지도 많고 뱀도 많고 모기도 많고 생각만 해도 아찔해서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좌광천을 따라 결국 바다까지.

 

제가 그 길을 걸으면서 도보로 걷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가끔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몇 명씩 만났는데 도보는 없었습니다. 폭염경보가 내려진 상황에서 1.8리터짜리 물 한병을 들고 걷다가 때로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명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일단 너무 신기하게도 기도 첫날 바로 응답을 받았기에 나머지는 기도응답에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너무 덥고 힘들어서 중간에서 포기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바로 ‘시험’인 겁니다. 시련이면서도 유혹이기도 한. 제가 가장 큰 유혹을 느낀게 바로 콜라, 시원한 콜라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날 좌광천길에서 올라와서 동네 마트를 찾아서 캔 콜라 한잔을 마셨는데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는지...그게 바로 유혹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보다는 ‘시련’입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의 구조상 ‘시험을 참는 자’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시련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됩니다.
‘참는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아래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고통아래에서 그 고통이 주는 아픔과 괴로움을 묵묵히 이겨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가 주를 믿기에 받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주님 때문에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진 짐이 너무 무겁고 고통스럽다고 내가 진 짐을 벗어 던지고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붕을 떠받치는 데에는 적어도 세 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물론 아주 작은 지붕일 경우에는 한 개의 기둥이나 두 개의 기둥도 있지만 집의 구조를 갖추어서 안정감을 주려고 한다면 적어도 세 개의 기둥은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나 네 개나 다섯 개 또는 더 많은 기둥들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기둥들이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둥이 많으면 많을수록 각 기둥들이 받는 무게가 더 적어지고 집은 더 튼튼하며 안정적일 것입니다.

 

다만 기둥이 많으면 기둥의 길이가 모두 맞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가령 세 개의 기둥이면 길이가 약간 달라도 모두 바닥에 닿여서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기둥이 네 개가 되면서부터는 기둥의 길이가 다르면 한 개는 바닥에 닿지 않고 끄떡이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는 거지요.

 

이제는 반대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기둥의 역할을 포기하고 이탈한다면 남아있는 기둥들은 내가 떠넘긴 무게까지 함께 떠안아야 합니다. 당연히 더 힘들고 무리가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남아 있는 기둥들도 그 역할을 견디지 못하고 벗어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도 한두개의 기둥이 끝까지 무게를 지탱하려고하면 최악의 경우에 기둥이 중간에 부러지면서 집도 함께 무너지는 겁니다.

 

바로 본문에서 ‘시험을 참는다’고 하는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내 역할을 다 하는 것은 시험을 참는 것일뿐더러 이웃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살자고 시련을 견디지 못하면 형제를 그만큼 더 힘들게 하는 것이고 잘못하면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 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이렇게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이 복은 또 무슨 뜻입니까?
사실상 이 ‘복’은 예수님의 팔복에 나오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팔복에서 말하는 복은 표현하는 말은 달라도 결국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복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 복은 세상의 황금과 권력과 명예가 아니라 영적 의미의 복입니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 딱 그 정도의 복입니다. 미안하게도 돈과 출세같은 그런 물질적인 확 와 닿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을 성경은 동일한 구절에서 다른 표현으로 다시 한번 되풀이 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이 실망할까 두려워서 뭔가 자세히 설명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우리는 ‘시험을 참는자’가 ‘시련을 견디어 내는 자’라는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복이 있나니’와 같은 장소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표현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잘 참은 것에 대한 상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답니다.

 

생명의 면류관!
면류관이라고 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싯누런 황금에 색색깔의 보석과 진주로 장식된 군왕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이렇듯 떠올리는 모든 것들은 현실적인 복입니다. 번쩍번쩍하는 금은보화와 같은 물질입니다.

 

그런데 원문에 사용된 ‘면류관’이란 말은 왕이 쓰는 월계수 모양의 금관이나 올림픽 경주에서 승리한 자에게 명예로 씌워주는 월계수, 진짜 월계수 잎으로 만든 화관을 의미합니다. 만일 왕이 쓰는 금관이 아니고 진짜 월계수 이파리로 만든 화관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명예가 있고 흠모의 대상이 된다고 해도 물질만능의 현대인들에게는 별로입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현실의 삶을 사는 것은 너무 힘든데 그걸 이겨낸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겨우 그 정도라면 .............

자, 이래놓고 성경은 갑자가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는 거지요.

 

여기서‘시험’은 시련의 뜻으로 쓰인게 아니라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시련은 주어도 유혹은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유혹은 악마가 주는 것이지요. 언제가 커피광고에 유혹이 있었는데 악마 복장을 한 겉에는 검고 안에는 붉은 망토를 입은 여인이 나와서 하는 선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시험하신다는 성경상의 표현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연단하시기 위한 시험, 즉 성숙을 위한 연단이란 뜻이지 결코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시험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련을 견디면 마치 풀무 속에서 불순물들은 다 녹아서 없어지고 정금이 되어서 나오는 그런 시험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은 사탄이 주는 것이지요.

 

왜냐면 우리 인간의 깊은 본능 속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 욕심같은 것들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황금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 세상 모든 그럴듯한 것들에 우리의 탐욕이 뻗칩니다. 헌것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우리는 더 이상 생각지 않습니다. 새것에 대한 동경, 번쩍이는 것에 대한 탐닉, 유명한 로고나 상표에 대한 집착 이런것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이걸 너무나 잘 아는 사탄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건드리는 유혹과 하나님이 하시는 우리를 성숙케 하려는 시험과는 전혀 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욕심이란 말은 ‘~을 향하여’란 말과 ‘열망, 또는 뜨거운 감정’이란 말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갈망, 열망’이란 아주 강한 뜻을 가진 말이 된 것입니다.
일단 이 욕망에 휩싸이게 되면 사람의 연약한 성정으로 이걸 이겨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죽이고 죽고 울고 웃는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바로 이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도 인간들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 정신없이 설치고 다닙니다.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걸 아는 사탄이 우리를 가지고 놀 때 바로 이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지요.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해서 시험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하나님 탓을 한다면 웃기는 일이지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것은 하나님이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라고 하셔서가 아니라 자기의 돈에 대한 욕심에 끌리고 욕심에 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말하는 시험은 결국 사탄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깊은 원초적 욕망이 사탄에 의해서 건드려진 것입일뿐입니다. 사탄은 건드렸을뿐 우리의 속 깊은곳에 도저히 메꿀수 없는 욕망이 존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14절에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끌려’라는 표현은 마치 사냥감이 덤불에서 잡혀서 끌려 나오는 모습을 상기시키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욕심에 그 정도로 무력하게 이끌린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미혹됨이니’라는 말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낚시와 사냥에서 물고기나 사냥감을 낚시 바늘이나 덫을 사용하여 현혹시켜 걸리게 하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의 덫에 걸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술과 마약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4학년 때 집안 제사 후에 남은 술을 마셨는데 입에 짝짝 달라붙는게 결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됫병에 술이 들었었는데 일단 제사주를 따르니까 약간 비어있는데 이걸 제가 한잔 따라 마셔도 별로 표시가 안 나서 한잔 그리고 또 한잔 계속 이렇게 마시다가 술을 한 석되 정도 마신 모양입니다. 어느 순간에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부모님이 저를 걱정스럽게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4학년 때 금주를 결심하고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도 겁이 났거든요. 너무 술이 맛이있어서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다가는 정말 일나겠다 싶어서 금주를 결심한 것이지요. 이처럼 유혹이란 것은 우리가 어떻게 될지를 결과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리는것과 같고 짐승이 올무에 걸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먹이가 주는 유혹, 미끼에의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사람입니다. 생각도 하고 영도 있는 사람. 그러므로 짐승과는 분명이 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미련하게 미끼를 외면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끌려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원문은 별다른 저항 없이 무력하게 미혹된다는 점을 분명히 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지르는 범죄의 원인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남탓, 사탄의 탓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문제인 것이지요. 우리속에 들어 있는 죄성이 문제인 것이지요.

 

드디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예수를 믿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들었던 말입니다.

 

그런데 욕심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욕심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이러면 무골호인입니까? 아니면 호갱입니까 아니면 좀 모자란 사람입니까? 여하튼 정상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람의 욕심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인간 본능의 욕심이 끼치는 결과는 너무 엄중합니다. 우리의 단순한 욕심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말은 너무나 엄청납니다. 그 엄청난 결과 앞에 할 말을 잃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이 사실 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에 지배당했을 때는 죽음을 도외시하고
뻔히 결과가 예상됨에도 애써서 결과를 외면하며
욕심에 지배당해서 행동합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우리네의 삶은 파괴되고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사망으로의 거대한 진군을 하는 셈입니다. 무저갱으로 이어지는 낭떠러지로 추락할 걸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나가는 인간군상을 보는 듯합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본다면 욕심이 잉태한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 밭에 마치 수태하듯이 욕망의 씨앗이 뿌려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욕심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 밭에 뿌려지면 그 씨앗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라서 마침내 뚜렷한 형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욕망의 씨앗은 누가 뿌립니까? 사탄이? 우리의 눈이 뿌립니다. 우리의 눈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우리의 눈이 예쁘고 빛이나는 것을 보고, 우리의 눈이 세상의 가치가 들어간 물건들을 보고 욕망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막 자라서 우리의 마음을 온통 장악하도록.

 

임신한 여자가 기한이 차서 아이를 출산하듯이 욕심이란 씨앗은 자라서 마침내 죄라고 하는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 속에 있는 , 그래서 아직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진 않은 마음속의 죄악이 이제는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서 더 이상 마음속의 죄악처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로 드러나서 알게끔 되고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우리의 마음 밭에 씨 뿌려지는 것은 이미 우리의 파멸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운카드로 외제차를 구매하려다가 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분실신고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걸 사용하면 절도라는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데도 불빛아래 번쩍이는 차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까마득히 날아가 버립니다. 그걸 알지만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한번 타보지도 못하고 절도범으로 인생을 망치게 된 겁니다. 유혹에 굴복한 결과입니다.

 

저는 차를 좋아하지 않는데 제가 작정하고 차들의 뒷모습을 한번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국산차가 안좋고 외제차가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차 뒤에 붙어 있는 표시를 안 보인다고 생각하고 본적이 있는데 분간이 안됩디다. 사람들은 차모양만 보고서도 이게 무슨차인지를 안다고 하는데 저는 차에붙어 있는 글자를 보고서야 무슨 차인지를 압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독일제의 뭐시기 뭐시기 차나 우리나라 차나 비슷해서 저는 분간이 안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목사님만 그렇지 다른 사람들은 다 구별합니다” 이렇게 말하던데 정말 그럴까요?

 

제가 해외뉴스에서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벤츠를 사서 앞부분을 잘라내고 롤스로이스 앞부분을 붙여서 롤스로이스처럼 만들었어요. 그 여자가 서 있는 특유의 부분하고 그런 부분을 붙인거지요. 여러분, 어때요? 저는 이걸 보고 외제차를 사면 더 좋은 외제차를 사고 싶어 하는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하는 걸 느꼈는데 어떻습니까? 제가 이걸 보면서 ‘참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차에 욕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걸로는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저는 예전에는 컴퓨터에 관심을 가졌고 그 다음에는 만년필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오디오에 그리고 지금은 글쎄요. 여하튼 이런 식으로 저도 정신이 빠질만큼 좋아하는 것이 있기는 했는데 그래도 항상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뭐 안가진다고 해도 목사가 그런 식으로 흥청망청 돈을 쓸 수가 없다는 현실적인 제약이 저의 제어장치가 되어서 막아 주기는 합니다만.

 

욕심이 우리마음에 뿌려지는 것은 이미 우리가 죄에 체포된다는 예고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참한 결과가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 애써서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우리의 욕심에 휘둘려서 행동하고 맙니다.
뒤늦게 후회해도 이미 늦고 맙니다.

 

제가 젊을 때 어떤 분이 기독교인의 경제관에 대해서 강연을 하고 다닌 분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분이기는 한데 그분이 한 말 중에 지금도 생각나는 말은 “카드를 가지고 뭔가를 사려고 할 때는 먼저 사고 싶은 것의 이름을 적어 두어라. 그리고 눈 딱 감고 한달을 기다렸다가 그때 다시 명단을 끄집어 내어보고 그래도 사고 싶다면 사라”

 

이게 그래도 물건에 대한 욕망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장치가 될 것입니다. 물론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싶어 하는 욕망을 ‘지름신’이라고까지 말하겠습니까?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그러나 죄는 출산초기에는 갓난아기와 같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제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점점 자라납니다. 힘이 세지고 마침내 완전히 자라납니다.

 

죄가 완전히 자랄 때까지 방치한 결과 죽음이 눈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코 제어할 수 없게 되거든요. 우리는 그를 일러 중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알콜 중독에 관한 미국영화 혹시 보셨습니까?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임 알콜릭, 아임 파워리스. 나는 알콜 중독자입니다. 나는 무기력합니다. 그래서 결국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무서운 점이 육신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까지도 의미합니다. 육신의 죽음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엄중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가 죄를 저지를 때는 마음이 두근거리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고, 밥맛이 없고 놀라고 이러다가 죄를 저지르는 횟수가 많아지면 그만 둔감해져 버립니다. 그리고 쾌락이란게 내성이 생기니까 점점 더 강한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는게 우리 인간입니다.

 

약물에 쩔어서 일생을 사는 일도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술도 약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이성을 마비시키고 중추신경계도 마비시켜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독약.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하는 그 와중에 나쁜 짓도 하게 하는 독약.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 보셨나요?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무거울 때 담배 한대를 피우면 머리가 맑아진다.

 

그거요, 사실은 담배가 머리를 맑게 하는게 아니라 뇌세포를 죽이기 때문에 머리가 단순해 지는 것입니다. 담배 한 대를 피우면 뇌세포 1억 5천만개가 죽는다는데 이건 옛날 고등학교 때 생물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명확한 결과가 너무나 확연하기 때문에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어도 그냥 나둬 버릴 겁니다. 그냥 냅두는 거지요. 죽든 말든 알아서 해라!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이기 때문에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오히려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들이 내려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결코 사탄으로부터는 좋은 것이 올 수 없다는 말이며 또한 사탄이 우리의 마음속에 뿌린 욕심대로 행동한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내면이 요구하는 욕심과 욕망은 단순한 찰나의 쾌락과 만족을 줄지언정 영원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표피적 만족이 아니라 내면의 온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만족감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일시적인 만족감이 끝나면 이번에는 더 강한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기위해 점점 더 노력하게 되고 최후에는 더 이상 회생불가능으로 망가진 인간의 모습만이 남아서 사망으로의 전진을 멈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생각합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눈에 보이는 반짝이는 숯덩이와 노란 금속쪼가리보다 훨씬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욕심을 완전히 버리는게 어렵다고요? 그래요,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욕심의 양을 조금씩 줄여 봅시다. 이미 잉태해서 죄가 되었다고요? 그렇다면 그 죄악의 싹을 잘라버리십시다. 죄가 제멋대로 장성해 지도록 탐욕을 제멋대로 저질러서 우리를 포로로 잡기 전에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눈을 뻔히 뜨고도 죽음에 이르게 되기 전에 그 죄악의 길에서 돌이킵시다.

 

완전히 끊어라, 완전히 돌이키라고 하면 너무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수치적으로 한번에 1/10씩만 줄여 나갑시다. 그래서 죄와 욕망에 내어준 우리의 몸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고 점점 이겨나가면 결국에는 우리 몸에서 죄악된 욕망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욕망에 물든 눈을 감고 마음을 추스르고 난 다음 형제의 곤궁과 딱한 사정을 조금은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봅시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각종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가득히 들어차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급한지를 생각해 보세요. 현실이 어려울수록 사탄이 준 욕심을 버리고 시험을 참고 이겨 낸다면 경주를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월계수 이파리로 만든 화관이라고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 월계수 이파리 관이 사실은 명예의 근원입니다. 모든 이들을 자랑스럽게 하는 명예를 주는 관입니다. 우리가 너무 돈돈 거리니까 하나님이 돈도 주시겠지만 일단 그게 충족되면 사람들이 찾는 것이 바로 명예지요. 크게 보면 그 안에 권위와 권세도 그래서 권력도 들어가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면류관은 죽음 이후에 영멸이 아니라 영생을 약속하는 것이요 영원한 만족과 평안을 또한 보장하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현실의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방법은 여기 나와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욕망의 눈을 거두고 사랑과 하나님의 법의 눈으로 형제와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갑시다. 빛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적인 능력으로 세상을 가득 채웁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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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것은 제 마음 속의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 그러나 꼭 남겨놓아야 하는 이야기 입니다. 저는 비디오게임을 참 좋아했고, 한 때 손꼽히는 비디오게임 인터넷 카페의 주인장이기도 했습니다. 돈을 모아서는 비디오게임기를 장만하는데 힘썼고, 매달 한 번씩, 즐거운 마음으로 비디오게임 하나 두개씩을 수집하고, 즐기며, 즐거워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정신을 못 차릴 수준이 되었습니다. 게임을 정작 할 시간도 없고, 할 이유도 없으면서, 계속 모아나갔습니다. 저는 영안 같은 것은 없고,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주님 보시기에 영 꽝이었는가 봅니다.

 

어느 날, 어머님이 무척 아프게 되었고, 저는 모든 게임기를 처분하고, 게임CD를 처분하게 되었습니다. 시쳇말로 한 방에 훅 가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던지 모릅니다. 원래 사람은 있다가 없으면 더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야 조금씩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게임은 없어도 괜찮아, 그런 생각이 마침내 확신으로 일어섰고, 남는 시간에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게임 백시간씩 할 그 주어진 시간을 다른 열정으로 조금씩 채우니까, 이것이 삶에 대한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게임에 대한 유혹이 올 때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제일 경계해야 되는 대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말에 유혹은 인간에게 가장 취약한 곳을 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쾌락적으로, 습관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의미를 담아서 새롭게 좋아하는 쪽으로 취미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독을 끊어도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재기할 것을 찾아나갈 수 있다는 말을 꼭 남기고 싶습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