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디모데후서1: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12. 01:40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딤후1:6-)

 

우리 인간은 참 간사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듯이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한 듯이 굴다가도 아주 자그마한 역경이라도 만나면 그리고 그 역경을 쉽사리 극복하지 못하면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들고 나아가 세상이 두려워지고 그리고 의기소침해 집니다.

 

가끔가다가 이 세상의 물질문명과 돈과 권세와 문화를 보면 참 두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음을 믿고 물질보다 영혼을 더 소중히 여기고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임을 자부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본주의 논리의 냉혹함에 두려워 집니다. 그렇게 무시하던 돈이, 물질이 생각 외로 더 거대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 넓은 세상에서 나를 도울이 없어서 한탄하며 무서워집니다.

 

사기꾼들에게는 이 세상이 어찌 그리 만만한지 이 사람 돈도 내돈 저 사람 돈도 내돈 그리고 내돈도 내돈 그렇게 잘만 사는데 예수 믿는 이들은 사기도 제대로 못칩니다. 태생적으로 안맞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어색해 지고 사기를 치면 부자연스럽습니다. 바보처럼 우직하고 답답할 만큼 융통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제대로 잘 살지도 못합니다.

 

가만 따져보면 별 것 아니기는 한데 온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아들로서 세상의 물질에 초연할 수 있는 신분임에도 그래도 때로 이러한 것들에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인 것을 고백합니다.
신선이 왜 신선입니까? 안먹고 잘 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오래 오래 죽지 않고 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인간입니다. 입과 배가 있는 인간입니다.

 

하루에 세끼는 먹어야 사는 인간입니다. 두끼만 먹어도 살기는 살겠지만 항상 배고픔에 허덕이게 될 겁니다. 우리의 입이 배가 보통 영악한게 아닙니다. 평소에는 모르다가도 일단 들어가는 양이 준다고 생각되면 평소보다 더 껄떡이게 만듭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입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도 결국은 육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우리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필요합니다. 우리라고, 그리스도의 성도라고, 영에 속한 자라고 해서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입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육신의 눈과 입과 배는 늘 부족을 호소합니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보려하고 더 맛있는 것을 먹으려 하고 더 풍족하게 채우기를 원합니다.

 

그런가하면 기가 차게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는 매료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고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조금 나쁘게는 술이 주는 유혹, 담배가 주는 유혹, 나아가 마약이 주는 유혹 이런게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내가 그런 유혹에 견딜 수 있을까?

 

반대로 폭력. 무자비한 폭력에도 내가 주를 부인하지 않고 그를 위해 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을까?
아무리 혼자서 독야청청하려고 해도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있는 한, 이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그런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서 초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사실 두렵습니다. 내가 과연 제대로 살아 갈 수가 있을까를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더불어 이 세상이 되어져가는 것을 보면 정말 두렵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서 그래도 기독교인 다운 삶을 살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서 그래도 처자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세상의 파고가 두렵습니다. 구조조정의 파도니 경기 불황의 파도니 등등의 각종 파도가 두렵습니다.

 

솔직히 경기 불황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이제 지겹습니다. 이제는 그만 듣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별로 길지는 않았지만 살아오면서 경기가 호황이란 소리를 듣던 때가 언젠지 모르겠습니다. 요근래 들어서는 계속해서 나빠진다는 소리뿐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지진을 경험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지진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기는 하고 비록 자그마한 지진이었지만 제가 그걸 겪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원자로가 지진 때문에 혹시 ....’ 그 외에도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엄청나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워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넣어 주신 영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의 속에 들어있는 영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가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런데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가 왜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죄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래요, 이렇게 두려움은 죄를 지은 징표였고 하나님과 인간을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죄의 벽이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면 떳떳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원래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런데 여기서 능력은 복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천년이상을 사는 존재였습니다. 해같이 빛나서 사탄도 질투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정확히 인간이 죽지 않는 상태로 불사의 존재로 창조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면 어쩌면 하나님은 인간을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드신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뱀이 신이 되는 징표로 똑똑한 것을 들지요. 만일 인간이 죽거나 병드는 연약한 존재였다면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늙지 않는 불노불사를 원했겠지요.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교류하며 하나님의 것을 먹고 사는 빛나는 존재였습니다만 죄가 들어오고 수고해야만 먹을 수 있게 되고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되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웃기게도 인간은 한때 신이 되려고 한 고등한 존재였지만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짐승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게끔 되었습니다.
미국 남캘리포니아의 어딘가 동물원에는 인간들이 동물처럼 우리에 들어가서 전시가 되고 있답니다. 가본적은 없고 사진으로 보고는 정말 황당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옷을 다벗고 또는 아주 적게 입고 몇 명의 남녀 지원자들이 우리 안에 들어가서 구경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니고 인간의 행동이 격이 떨어져서 짐승보다 결코 낫지 못하게 된지가 오랩니다. 우리가 때로 ‘짐승보다 못한’이라고 분노하지요. 그러나 원래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을 회복하려면 복음을 소유해야 하고 그럴려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몰아 내야 합니다. 다시금 능력을 회복하려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왜 우리에게 오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다른이에게 전할수록 복음의 능력은 더 커집니다. 줄어드는 게 아닙니다. 수많은 이에게 능력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쉽게 얘기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결코 그냥 방치하시지 않을 것임을 우리가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가끔가다 아이가 위태로울 때 자동차를 번쩍 들어서 아이를 구해낸 엄마의 기사를 우리가 봅니다. 병원도 포기한 환자를 기도함으로 낫게하는 일들을 우리가 압니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기도함으로 막혔던 문제가 풀려지는 놀라운 기적들을 우리가 충분히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우리 속에 능력이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넣어 주셨던 능력이 봉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봉인을 깰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닐까? 어떻습니까? 좀 그럴듯합니까?

 

세상의 파도가 우리를 덮쳐올 때는 하나님의 자비의 날개 아래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창칼이 난무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십니다. 지상으로부터 직각으로 높이 솟아 올라서 도저히 올라 올 수 없는 그런 반석. 온 세상이 도탄에 빠져서 힘들어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스스로를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남에게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받기만 하고 나누어 주지 않으면 결국은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받고 주는 것이지 일방적인 짝사랑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절제를 또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세상에서 초법적인 사람이 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했다고 하는 목사들 가운데서 초법적으로 행동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청년사역을 한다는 ‘스타목사’들 중에 돈문제 여자문제로 방송매체에 오르내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아서 그런 겁니다. 유혹에 진 것이지요. 그럴수록 우리는 더 겸손하며 겸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능력과 사랑과 절제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함으로 디모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 있습니다. 다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좀 시들었나요? 아니면 좀 약해 졌을까요? 이제 그것을 다시 불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예수믿는 이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 믿음의 연륜이 오래 될수록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점점 믿음이 깊어 져서 문자그대로 성도가 되어가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들은 오래 될수록 빤댓돌이 되어서 마음이 빤들빤들해져서 아무런 감동도 감격도 없는 강퍅한 심령이 되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유형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려고 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권세와 화려함과 돈과 향락과 그것이 주는 힘을 보고 두려워하거나 의기소침해하는 것을 보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단지 능력도 있고 뭐도 있고 다 있지만 사랑하고 절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절제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어쩔 수 없이 절제하고 참아야할 때는 애처롭지만 능력이 있음에도 참고 절제한다면 그는 당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마음’은 ‘프뉴마’로 표기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영’으로 바꾸어 보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영이 아닌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영을 주신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이야기할 때도 우리는 역시 ‘프뉴마’라고 씁니다. 이걸 감안해서 제가 조금 다르게 한번 말해 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령인데 능력의 성령, 사랑의 성령, 절제하게 하는 성령이라는 것이지요.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능력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고 희생하는 사랑의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도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아가페 사랑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는데 이것 역시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인간은 에로스적인 사랑을 가장 잘하고 필리아적 사랑도 가끔 하지만 아가페적 사랑은 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없고서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어려운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능력을 주셨고 그것을 가지고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대한 절제까지 요구하십니다. 조금 더 확장해 보십시다. 능력에 대한 절제에서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우쭐해지는 마음을 절제하고 근신하라는 말로도 표현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기도하고 그래서 능력받고 그래서 기도해서 사람들이 낫고 일이 척척 이루어 지고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예언이 이루어 지고 이러면 자칫 잘못하면 우쭐해져서 교만해 져서 자기가 하나님인양 설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 주의 이름을 팔면서 자기가 교주가 되어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교주의 우리나라 사람 교주의 동영상을 보니까 이 사람이 금면류관을 쓰고 임금이나 입을법한 비단용포를 입고 큰 무개차에 타고 가는데 사람들이 그 위에 색종이를 뿌립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손을 흔들어 답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가로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전하는 자가 하나님께 갈 영광을 가로챈다면 그가 바로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와 근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신 능력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신 사랑 때문에 우리가 너무 붕 떠서 교만해지면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추락할 때의 충격은 더 큽니다. 그리고 혼자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던 많은 이들에게도 피해를 주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의기소침한 마음이나 비겁한’ 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디모데가 의기소침해 있었다는 말을 바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처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안수를 받았을 때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이 용기백배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으며 사람들은 우리에게 축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그 감격과 감사가 조금씩 바래면서 우리는 현실에서 닥치는 여러 가지 일에 두려워하고 의기소침해 지고 그래서 때론 현실과 타협하려는 비겁한 마음도 품게 됩니다. 처음의 숭고한 이상은 어디가고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는 세상과 짝하려고 비굴한 웃음을 짓는 나약하고 피곤에 지친 사역자만 남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젊었을 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저를 싫어하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그런 말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고 하니 나는 70까지 목회를 하지 않고 65세까지만 하고 은퇴할거다. 그랬는데 정작 60세가 넘어가니까 그런 말이 쑥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한게 기억이 납니다. “사람은 관 뚜껑 닫을 때 까지는 모른다”

 

그래요, 자기가 힘이 있다고 잘나간다고 자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힘을 주신 분이 그렇게 잘나가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까닭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근신하고 절제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이든 감사하고 무엇이든 좋아 보입니다. 세상만물이 나를 축복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감격이 세월이 흐르면서 빛이 바래듯이 바래지면 조금씩 조금씩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대로 좋은 것일까?’
이런 불행한 사태를 막고 새롭게 힘을 줄려고 바로 이 본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8절에 보면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하지말고”
그러니까 바울은 주를 증언했기 때문에 또 주를 위하여 갇혔다는 말입니다. 다른 파렴치한 범죄 때문에 갇힌게 아닙니다. 아마 디모데는 바울이 투옥되었다는 말에 상당히 의기소침해 했던 모양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 의해서 파송을 받았고 또 바울을 영적인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었으므로 바울의 투옥으로 디모데가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를 증언했고 또 주를 위해서 갇혔다는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갇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곧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리스도의 사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기 않기 위해서는 복음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복음이 바로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리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전혀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에게 멍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성을 넘어서는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족쇄가 될 수도 있고 낙인이 될 수도 있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져서 마치 자기는 예수를 안믿는 듯이 처신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오죽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으면 복음을 받아 들이는 것 자체가 성령받은 표라고까지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래서 주의 복음 때문에 갇히기도 한 바울이 생기는 것입니다.

 

2.적극적으로는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한다.

 

이 말은 원래 ‘학대를 서로 분담하다’란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일에 디모데가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 이러한 고난을 그리스도와 함께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젊은 목회자에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계속해서 함께 고난을 받자고 말하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이건 뭐 같이 감옥에 들어가자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사실 놀랍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란 어구가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는 것을 생각하면 무섭고 두렵습니다. 당장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멀리 멀리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그 고난에 대비할려고 생각하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주시고 이길 수 있도록 힘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난받는 것은 우리와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가 고난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을 한번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채운다고 말합니다.

 

고난이 두렵습니까? 당연히 두렵고 떨리고 걱정됩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잘 감당하고 승리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고난을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말이 있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바로 그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부끄러워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그깟 고난이 뭐가 두렵냐’ ‘나는 고난이 조금도 두렵지 않아’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죽으면 살리라’ 이게 바로 우리 예수쟁이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하나님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복음의 능력과 사랑과 절제입니다. 왜냐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고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충분히 승리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는데 사실 우리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택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게 뽑힌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오고 오는 인류 가운데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뽑힐만한 능력을 가져서 또는 택함 받을 선한 행위를 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뽑힌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감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더 헌신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뽑힐만한 행위를 해서 포상의 개념으로 선택되었다면 또는 복음을 전할 능력을 가져서 선택되었다면 우리의 감사와 감격이 덜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지만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10절에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들을 드러내신지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 사망을 이기셨기에 우리는 고난을 있을지언정 결단코 생명을 얻고 영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게 ‘죽으면 죽으리라’고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대의에 뛰어들면  ‘죽으면 살리라’가 되는 이치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입은 이로서
그리스도의 성도로서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어떤 고난도 결코 두렵지 않다는 마음으로
‘죽으면 살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며 사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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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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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언젠가 교회 수련회 때 있었던 일입니다. 없애고 싶은 것을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마음에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하얀 종이에 커다랗게 세 글자로 두려움 이라고 썼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한 기독교인으로 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하얀 종이는 찢겨서 없어졌고, 내 안의 두려움도 그렇게 조금은 극복되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오늘의 추억담입니다 :)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삶, 굉장히 근사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힘있게 외칠 수도 있겠지요. 그런 두려움 없는 인생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그런 삶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생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적극적인 인생이길 원합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