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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에 나타난 정의(여호수아7: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7. 04:06

 

아이성에 나타난 정의 (여호수아7:1-)

 

여리고성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승리를 맛본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를 위해 정탐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은 아이성을 무시해서 모든 군대가 다 올라갈 필요도 없고 한 이천명이나 삼천명만 올라가도 이길 수 있다고 말했고 여호수아는 삼천명의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여호수아도 아이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소문을 듣고 있겠지만 정탐꾼들이 아이성을 쉽게 이길 수 있을 걸로 말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삼천명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 성의 이름이 ‘아이’라서 우리는 자꾸 ‘어른과 아이’할 때의 아이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아이성이 별 볼일 없는 적은 성읍이라고 여깁니다. 아이성이 적은 성읍인 것은 맞지만 고지대에 살고 있는 그들은 그래도 12000명 정도의 성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험준한 산익지대에 따로 성을 쌓아서 독립적으로 살고 있는 성읍을 공략하면서 너무 방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은 패배했고 36명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산비탈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 36명이 죽은 것은 비교적 경미한 피해입니다.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서 빼앗으려는 마당에 단 한명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됩니다. 여리고성 전투가 특별했던 거지 아이성 전투같은 것이 사실은 일반적입니다.

 

문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가나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들리는 소문만큼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기도 낙하되었고 전직 노예출신들이라서 싸우는 기술은 형편없습니다. 노예가 싸울일이 뭐있습니까?

 

하루종일 노동하고 주인이 주는 밥먹고 그게 일이었지 체계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술을 익히고 훈련을 하고 이런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운 것은 겨우 40년밖에 안됩니다. 출애굽하면서 광야에서 몇몇 유목부족들과 싸운 것, 요단강 동편의 두 왕과 싸운 것 정도지 아직도 어리버리한 노예의 후손들일 따름입니다.

 

그동안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보호와 인도하에 싸웠기 때문에 승리를 맛본 것이지 하나님의 보호라는 우산이 거두어 지자 이스라엘의 허점들이 마구 드러납니다.

그럼 왜 하나님의 보호가 사라진 것입니까? 왜 이스라엘은 패배했을까요?

 

오늘 본문 7:1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서 범죄 하였답니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여서 범죄하였고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셨기 때문에 보호의 우산이 거두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서를 읽으면서 항상 궁금해 하는게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전쟁에 이기면 상대방을 남김없이 도륙해야 하지? 이 사람들은 포로들을 너무 무자비하게 다룬다. 사무엘 때 아말렉을 도륙해서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건 나름대로 자기들 딴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는 특별히 더 잘못한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 죽여 버립니다. 딱 한집 라합의 집, 범죄의 소굴인 창녀집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싹 다 죽여 버립니다. 심지어 짐승까지도 씨몰살을 시켜버리고 성을 훼파하고 도데체 왜 그런겁니까?

 

여리고가 그렇게 나쁜 나라일까요? 하나님의 징벌로 망한 소돔과 고모라라도 됩니까? 여리고 사람들 그 종자들이 악마의 종자들이라서? 아니면 이스라엘에 특별히 범죄하여서 그렇게 학살을 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번에 처음으로 여리고 사람들과 접한 겁니다. 무슨 원한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여리고를 가나안에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을 향한 헤렘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오고 첫 성이 바로 여리고니까 하나님에게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 그래서 여리고성과 여리고 거민과 가축들과 재물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헤렘이 되면 살려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로 몽땅 다 드립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짐승과 성읍자체를 몰살을 시킨 겁니다. 불에 태워버립니다. 제물을 드릴 때 번제로 드릴 때 제물을 불에 태워서 향기와 연기가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이건 마치 우리나라의 제사의식과 비슷하네요. 지방과 향의 연기가 하늘로 날아가면 신이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고 여기는 우리네 제사의식과 비슷합니다.

 

심지어 금은동철과 보석도 불에 그을려서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나머지는 불에 사르고 불에 살라지지 않는 것도 불을 통과해서 남은 것은 하나님의 곳간에 드리는 겁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으므로 아간이 숨긴 금은도 당연히 하나님의 곳간에 넣어야 됩니다. 모든게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여리고성전투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 군대를 지휘하고 앞장을 선 겁니다.

 

당시의 백성들은 반 강도떼들입니다. 유목민들은 평소에는 유목에 종사하지만 전쟁이 나면 전쟁에 참여해서 전리품을 얻는데 이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전쟁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산업활동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전투에서는 전리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헤렘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리고는 아주 부유한 도시이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말고도 금은과 귀한 재물들이 넘쳐 납니다. 그 아까운 것을 모두 불에 태우고 안타는 것은 하나님께 드립니다.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눈에는 이게 엄청나게 아까운 것입니다.

 

아간이 보니까 금과 은과 시날산 외투가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그는 눈이 뒤집혀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해서 자기가 가진겁니다. 땅에 몰래 숨겨두었습니다. 아간이 볼 때는 아무도 자기의 범죄행위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남들은 재물에 눈이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금은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오죽 했으면 최영장군님이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이게 요물입니다. 그 번쩍이는 빛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합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헤렘규정을 어긴 사람은 아간 딱 한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아시면서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하였다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를 퍼부었답니다. 너무 한 것 같지요?

그 진노의 결과가 바로 아이성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타난 겁니다. 아이성을 뺏지 못하고 36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패퇴한 겁니다.

 

아주 경미한 피해라면 피해랄 수도 있습니다. 전쟁에서 어떻게 그정도도 죽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패했다는게 문제였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첫 번째 패배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공포에 짓눌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이런 자세로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다시금 겁많고 어리버리의 노예로 돌아온 겁니다. 여호수아 개인적으로도 큰 위기입니다. 모세의 때에 이스라엘은 항상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계승한 이후에 겨우 두 번째 전투부터 이스라엘은 고전합니다. 사람들은 그것가지고도 여호수아에 대해서 불평을 할겁니다. 옛날이 좋았다느니 여호수아 가지고는 안된다느니 이제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느니 하는 말로 군중이 소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이때 이 패전을 수습하기위해 여호수아가 한 제일 첫 번 조치는 스스로 재에 앉아 기도한 것입니다. 이게 누구의 잘못이냐, 이번 전투의 책임자가 누구냐, 정탐꾼의 잘못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런 식의 논란 이전에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옷을 찢고 티끌을 무릎 쓰고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이 전투의 직접 사령관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탐꾼의 말만을 믿고 삼천명의 군대를 파견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진노이전에 이스라엘은 싸우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주 평범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을 공격하는 측은 지키는 측보다 세배 이상의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기본 상식을 무시했습니다. 만이천명의 거민 중에서 1/4을 군사라고 보면 삼천명이지요. 그렇다면 적어도 만명 정도를 보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적과 대등한 삼천명만을 보냈다면 이건 기본이 안된 겁니다.

 

더구나 성을 지키는 입장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성을 지키는데 달려들 겁니다.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기위해 돌멩이라도 던질 겁니다. 그렇다면 사만명의 군대가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겨우 삼천명만 보냈으니 지는게 당연합니다. 여호와의 진노를 떠나서 처음부터 지게 되어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단, 하나님이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주셨을 수는 있습니다. 이천명이나 삼천명만 올려보내면 된다고 할 때 아니다 우리가 다 같이 올라가야 된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리고의 승리가 너무나 극적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심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들뜬 분위기속에서 범죄가 싹트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훈을 내립니다. 그런데 전혀 얼토당토않게 뜬금없이 교훈을 내리는 것은 자제하는 분입니다. 자기가 세운 자연의 법칙을 지키려고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총사령관으로서 이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집니다. 결코 다른 사람에게 패전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이성으로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그는 총사령관입니다. 백성의 최고 지도자로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그에게 있습니다.

 

남에게 죄를 전가하고 자기는 비난에서 빠질려고 하면 그는 최고 지도자가 아닙니다. 부문지도자, 부서장이지 최고지도자가 아닙니다. 최고지도자는 최종적인 책임을 자기가 집니다. 그래서 그가 제일먼저 죄인된 심정으로 티끌을 무릎쓰고 꿇어 앉은 것입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물론 백성들 중에서는 최고의 직위에 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평을 합니다. 마치 아이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듯이 하는 겁니다. 그래요 지도자는 사람에게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하소연하거나 어리광을 부릴 수 없습니다. 지도자기 때문에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이며 미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이야기할 때 무슨 논리적이고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이야기할 필요가 뭐있습니까? 부모와 자식간에 진실된 모습으로 민낯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언약을 기억하소서
가나안땅을 주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은 과연 지금도 유효합니까?
그리고 이 약속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당신의 이름이 욕을 입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을 신들간의 투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시는 신이 강하면 그 전쟁에서 이기고 신이 약하면 전쟁에서 지는 걸로 여겼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앞에 마음이 녹은 이유는 그 신, 여호와 하나님이 가나안의 모든 신보다 애굽의 모든 신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물처럼 녹았답니다. 아이의 신, 그 산골짝에 있는 그 신의 힘이 여호와의 힘보다 더 세다가 여긴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 욕이 될 겁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여기 잘 보세요.

 

‘바쳐야 될 물건을 취하고’ 라고 하시지 않고 ‘바친 물건을 취하고’ 아간이 볼 때 이 물건은 아직 여호와의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으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게 지금 비록 아간의 손에 있을지라도 이미 나에게 바친 내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것을 도적질 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바친 물건’이 바로 헤렘입니다.

 

헤렘은 우리말 성경에는 ‘바친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12절에 보면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는 말이 있지요? 헤렘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지거나 완전히 파멸되어야 하는 대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헤렘에는 끔찍한 원칙이 존재하는데 헤렘에 해당되는 것을 파멸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자기 개인이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헤렘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지거나 완전히 진멸되어야 합니다.

 

아간이 헤렘(바친 것)을 가졌으므로 아간 자신이 헤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친 것을 너희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시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을 거랍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보다 더 큰 근본적인 어려움이 닥쳐 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범죄의 원인, 헤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헤렘과 함께한 자들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헤렘이 되는 겁니다. 지고 지고 죽고 죽고.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 범죄의 원인을 제거하기로 합니다.

 

여호수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때까지 여호수아는 자기의 백성들 가운데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깬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헤렘으로 선포된 여리고에서 헤렘 언약을 깬 사람이 있다니! 이건 절대로 깨져서는 안되는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려고 얼마나 수고했습니까?

 

여호수아 자신이 노구를 이끌고 노심초사하며 준비한 것을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걸 백성들도 다 압니다. 그리고 여리고를 기적적으로 점령하고 얼마나 행복해 했습니까? 드디어 가나안에 본격적인 땅을 가지기 시작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니었나요?

 

그랬는데 그 역사적인 순간에 범죄한 이가 나왔다는게 놀랍고도 허탈합니다. 헤렘의 약속은 절대로 깨서는 안되는 겁니다. 인간사이의약속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약속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시에는 즉각적으로 벌을 주시는 무시무시한 분과의 약속인데 이 사람들이 벌써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죄를 저지릅니다. 오죽했으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이 성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은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잃을 것이라고 까지 저주를 했겠습니까?

 

즉시로 누가 범죄했는지 제비를 뽑기 시작합니다.
이 제비라는게 정말 신기합니다. 뭔가 별다른게 있는 것이 아님에도 틀림없이 그 사람을 찾아 갑니다. 天網恢恢(천망회회) 疎而不漏(소이불루)
하늘의 그물은 비록 성긴 것 같아도 죄인을 놓침이 없다고 오십만의 사람 중에서 아간이 제비 뽑혔습니다.

 

아간이 사실은 헤렘입니다. 자기가 헤렘인 하나님의 금과 은을 훔쳤으므로 바로 그 자신이 헤렘이 된 것입니다.
13절에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희 대적을 당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바친 물건은 헤렘이고 그 헤렘이 바로 아간입니다.

 

오십세겔 무게의 금과 은 이백세겔과 아름다운 시날 산 외투한벌을 훔치고 대신에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는다니 너무 어리석습니다. 시날은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모든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만든 아주 아름다운 외투는 최고의 명품입니다. 안목의 정욕 때문에 자기도 자기 집안도 이스라엘 공동체도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아간은 이 물건들을 자기장막 한가운데 땅밑에 감추었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서 아간의 장막에서 그 물건들을 꺼내서 여호와의 앞에 가져다 둡니다. 그리고 아간과 그 집안 식구들과 가축들까지 아골골짝으로 데려가서 돌려 쳐 죽입니다. 너무 너무 잔인합니다. 하나님의 징벌도 잔인하고 무섭습니다. 일말의 용서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렇게 잔인한 형벌을 내릴거면서 왜 아간을 일러 ‘내 아들아’라고 불렀나요? 그를 기망하여 죄를 자백하게 하려고 불렀을까요?

 

그리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자신의 극렬한 분노를 멈추었다고 합니다. 우리 조금 쉽게 한번 볼까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는 자기의 것을 빼앗겼을 때 분노하십니다.

 

자기의 언약이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받았을 때 분노하십니다. 우리가 요즘은 좀 잊고 있는데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을 너무 오랫동안 들어와서 오해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본질은 이렇게 엄격하고 무서운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늘을 두려워한 겁니다. “니는 천벌이 두렵지도 않나?” “너는 천벌이 두렵지도 않아?”이렇게 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분노를 그치시자 비로소 이스라엘 군대는 다시 아이성에 쳐들어가서 승리하게 됩니다
물론 그냥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적을 유인하고 복병을 가지고 적의 근거지인 성을 불태우고 다시 당황한 적들을 섬멸한다는 정말이지 그럴듯한 전술을 짭니다. 게다가 삼만의 군대가 올라갑니다. 정말 일만이천명의 성을 점령하기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대로 하니까 바로 승리합니다.

 

그런데 승리하고 난 다음 이스라엘의 행위는 정말 잔인합니다. 남녀노소 만이천명의 포로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가축과 재물을 다 탈취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것으로 되었습니다. 왜냐면 18절에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나님은 여리고를 헤렘으로 선포한 것과는 달리 이 성읍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넘겨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빼앗을 모든 성읍은 이와 같을 것입니다. 여리고는 첫 성이기 때문에 헤렘이 된 것이고 나머지는 백성들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하신 것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오늘은 그 이유를 이야기할 시간은 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민주사회가 가지는 인권의식과 당시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태를 오늘의 관념으로 비판하기가 어렵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한번 다시 재구성해봅시다
아이성에 패한 근본원인은 무엇입니까?
적을 너무 경시한 것입니까?
아니면 아간의 범죄때문입니까?
그도 아니면 전술이 신통치 않아서 입니까?

 

하나님의 대답으로 보아서는 아간의 범죄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면 아간 한사람이 범죄했는데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하는 일을 겪게 하십니까?
그것은 아간의 범죄가 아간 개인의 범죄라기보다 아간이 속한 공동체의 범죄로 하나님이 보셨기때문입니다.
한사람 때문에 공동체가 피해를 본다

 

얼핏보면 불합리한 것 같아도 이것은 정말 합리적인 일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한사람 한사람이 공동운명으로 묶여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러한 모임을 공동체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공동체라고 표현하지만 생략된 약어로 하지 않고 정식 명칭을 모두 부른다면 운명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운명을 함께 하는 공동체 이것을 우리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서 너와 내가 있고 우리와 너희가 있다면 그건 공동체가 아닙니다.

 

저 사람과 내가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만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웃고 떠드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그건 전혀 공동체가 아닙니다. 같은 설교를 듣고도 다르게 반응할 수가 있습니다만 이럴때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형제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했다 합시다.

 

교회가 하나되고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설교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집사는 이집사를 바라보고 ‘그래 우리 목사님 정말 예리하네 너 그따위로 살면 피눈물 난데이’ 이집사도 김집사를 떠올리며 ‘이 설교는 김집사가 들어야 되는데, 목사님 말씀이 딱 김집사를 두고 한 설교네’이렇게 반응하는 집단은 절대로 공동체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일 아간의 범죄만 없었다면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이성을 쉽게 공략할 수 있었을 까요?
글쎄요
우리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볼 수는 있습니다.

 

무언고 하니
여호수아가 여리고라는 강력한 거성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 앞에 요단강을 건널때 그는 뭐했습니까?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딘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성 전투에서 그는 여호와의 뜻을 묻지도 않았고 그의 도움도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적정을 살피기위해 정탐꾼만을 보냈을 뿐입니다.
그럼 왜 여호와의 뜻을 묻고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까요?

 

1.그건 그들이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이성의 인구는 총12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1/4이 군대로 동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3000명
이정도가 장정이 됩니다.
예수님이 사람 수를 계수하실 때 주로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그러면 제가 지난주에 무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손자의 병법에 적어도 적군의 세배가 되지 않으면 성을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일만정도의 군사는 가져야 적병을 공격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정탐꾼은 도데체 뭘 보고 와서 그렇게 큰 소리를 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성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성은 해발 800m의 험준한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리고가 해발이 -230m이기 때문에 여리고로 부터는 무려 1Km를 올라간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등산할 때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해발 1000정도의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힘이 듭니다. 더구나 전쟁을 하려는 병사들은 갑옷과 투구, 무거운 무기, 게다가 공격용 장비들을 들고 올라가야 합니다.

 

뿐입니까?
이들을 재울 천막, 식량, 횃불 재료, 기타 잡다한 것 까지 합치면 엄청난 짐들을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게다가 언제 적병이 쳐내려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산위를 경계하며 오른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산을 다 올라가서 다시 성벽을 타야 된다면 이것은 엄청난 일이 됩니다. 더구나 가나안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선진국민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철기시대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문명도 발달되었고 이미 국가단위의 싸움을 여러번 겪어본 나라들입니다. 그런데도 전문군사도 아니고 겨우 백성중에 무기를 잡을 수 있는자, 즉 청장년의 일반 백성, 양치기 또는 농부 들이 청동기가 섞인 막대기와 물매를 들고 겨우 3000명으로 ‘이까짓거 정도야’ 하며 올라간다면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할 것입니다.

 

2.감사를 몰랐기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적을 경시하게 되었을까요?
바로 여리고성의 정복이 너무 쉬웠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의 도하가 너무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도 쉽게만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여리고도 그 정도였으니까 아이성이야 새발의 피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너무 쉽게 해 주셨기 때문에 이들은 그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위해 엄청난 일을 하셨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성의 점령이란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우 삼천명만을 파견하고 태평치고 있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법의 준수가 얼마나 어렵고 엄격한 것인지에 대한 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너무나 많은 보호와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없이 살아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당연한 권리로 알고 그 호의가 중단되면 마치 당연한 권리를 억울하게 뺏긴것처럼 분노하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3.죄성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동체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아무런 근심도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잘 따르고 하나님의 역사는 어렵다는 일들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잘될 때 사실은 그 안에 이미 범죄가 싹이 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죄성은 이제 경우 한사람에게 발아한 정도지만 그대로 방치할 시에는 죄악이 장성하여 오히려 주인노릇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아니 죄악의 속성상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될 때 스스로를 돌아보아 근신해야 합니다. 혹 우리가운데 죄성이 자라나지 않는지 살펴야 하고 혹 내가 교만하여 스스로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았는지 스스로 낮추어야 하고 내가 혹여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덜하지 않는지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성은 앞서의 상황에서 급속도로 자랍니다.

 

하나님에 감사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고 이 모든 일을 내가 잘나서 이루었다고 하는 교만, 당신이 우리의 지도자로 너무 우리를 잘 이끌어 주셔서 이런 좋은 결과가 있었습니다라고 하는 인간적인 아부에 우쭐해 질 때 죄성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중히 여길 때 죄성이 들어 옵니다. 아름다운 외투와 금과 은의 광채를 보고 하나님이 설마 아실까 생각하고 장막밑에 감추었지만 결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골골짝에 쌓인 돌무더기는 두고 두고 백성들에게 아간의 범죄에 대해서 알려 줍니다. 그리고 한사람의 범죄가 공동체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교만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는 일들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더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 사회를 한번 보세요. 겨우 한사람의 범죄로 이스라엘 공동체 이백만이 홍역을 치렀는데 우리 사회에는 미안하지만 어마무지하게 많은 수~많은 아간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각각은 아간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범죄를 저지른이가 아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을정도로 지위가 높습니다. 돈이 많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흔드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위기가 아닐까요?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이런 상태라는 겁니다. 그 아간이 세상이 아니라 교회안에 있다는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것인 헤렘이 하나님의 곳간에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라고 했지요? 아간이 세상이아니라 교인인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죄인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연히 우리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 곳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새롭게 되지 않고 옛사람의 구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공동체를 잘 보세요. 모든 이스라엘 공동체가 돌을 들어 아간을 칩니다. 아간의 가족과 그에 속한 가축들을 칩니다. 이건 하나님의 명령이 아직 위력을 가진다는 말이기도 하고 아직 아간같은 죄인들이 별로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공동체의 다수가 아간같은 죄를 저질렀다면 그들은 결코 돌을 들어 아간을 치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하면 이게 선례가 돼서 자기들도 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아예 죄가 아닌걸로 만들려고 모의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위선의 가면을 쓰다가 마지막에는 다수의 힘으로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그런 일들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간통죄가 폐지되었지요
동성애가 공공연하게 세상에 나왔지요. 이게 심하게는 소수자 차별 금지법이란 이름으로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벌주는 법을 만들려고 하는 상태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이용해서 치부해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각종 편법으로 군대를 면제받아도 무죄를 선고받고 이게 제대로 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나요? 부정부패 방지법 뇌물제공방지법이 시행되면 경제가 불황이 된다는 이 황당무계한 말들이 진리인양 공공연하게 주장되어지는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어찌해야 합니까?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외치는 이들의 억울한 외침을 하나님이 과연 듣지 아니하실까요? 나랏돈은 눈먼돈이라고 몇사람이 사익을 취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악한 패거리들이 끼리끼리 끌어주고 땡겨주어도 됩니까?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졌습니다. 민족이 멸족의 위기에 빠진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몽고백년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삼국시대 말에 이천만이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우 백오십만으로 줄었답니다. 물론 당시의 행정력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었을 확률이 높지만 숫자가 엄청나게 줄어든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점점 늘어나서 지금은 거의 팔천만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를 낳지 않아서 민족이 멸절될 위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주일날 모여서 예배하고 찬송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배와 찬송을 즐겨하지 않으시고 ‘이런 민족, 이런 극악무도한 민족은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이러한 걱정이 저의 쓸데없는 기우이기를 바랍니다.

 

공동체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처럼 남을 죽이지도 않았고 남의 정조를 빼앗지도 않았고 남의 재산을 사기쳐서 빼앗지도 않았고 무기비리를 저질러 국방을 어렵게 만들지도 않았고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해서 치부하지도 않았고 겨우 조그마한 금덩어리 한 개와 이백세겔의 은하고 옷한벌 때문에 일가족이 돌에 맞아 죽은 아간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른 이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시급합니다. 죄성의 특질상 더 이상 늦어지면 죄가 주인이 되어 진리를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진실을 가리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며 불법이 정의를 구축하기 때문입니다. 더 늦기 전에 공동체의 정의를 회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민족의 순결과 정의를 위해서 모두 힘써 기도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도록 노력합시다. 제발 역사인식없이 ‘나만 살고 죽지뭐’ ‘나만 잘되면 되지 이 사회나 민족이나 나라가 나에게 뭐가 중요하냐’고 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공동체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사마리아법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아 집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착한 일을 꼭 법으로 강제하기 전에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먼저 그 일들을 시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요, 힘든건 제가 잘 압니다. 혼자서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도 어려운데 남까지 신경쓰고 공동체까지 생각하라고 하기에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나라 사신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합니다. 이 세상을 마귀의 간악한 궤계에서 구해야할 의무를 가집니다. 그래요, 우리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며 힘써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위에 임하기를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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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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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두려움이 느껴지는 설교 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절대로 함부로 손대지 말아야 함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것만 그럴까요. 우리는 남의 것에도 함부로 손대지 말아야 함은 당연하겠지요.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지켜보고 계신다는 게 중요합니다. 타인을 배려하며,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게 좋겠지요.

 

저는 어디선가 보았던 이 문구를 참 좋아합니다. 배려, 그리고 도전. 세상을 향해서 도전적으로 살아가는 태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맞이하면서 살아가는 태도가 참 좋습니다. 열린 마음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네요. 하나님의 흔적을 몸에 새기고 살아가고, 그런 멋진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것, 얼마나 멋진 기독교인일까 상상해 봅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다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