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밀정 (The Age of Shadows, 2016) 리뷰

시북(허지수) 2016. 9. 13. 02:05

 

 영화 밀정을 보고 나니 한 가지 질문이 떠다니며 저를 괴롭혔습니다. 내가 불과 백여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그래서 온몸으로 일제강점기를 맞이했노라면, 나는 어떤 비겁한 선택을 했었을까... 영화에서는 데라우치 총독의 선언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잔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인은 이제 일본인에게 복종하든가, 죽든가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할 수 밖에 없어"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한다면, 일본에게 지금 저항하고 있는 의열단원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 정도는 이미 내놓으며, 필사의 각오로 일제에 저항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오늘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밀정은 그래서 참 고급스러운 영화였고, 시대를 건너뛰어서 울림을 전해주는 영화였습니다. 미래가 당장 눈에 잡힐듯이 보이지도 않지만, 그래서 독립 운동이라는 것이 내부에서 볼 때 조차 실패만 하는 것 같더라도,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아갈 때, 비로소 그 결실이 쾅하고 터질 수 있음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결코 쉽게 절망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친구와 저는 이정출과, 김우진, 그리고 연계순을 차례로 되짚어 보면서, 아 이런 (값진, 그리고 빛나는) 인생들도 있구나! 우리도 힘내서 살아야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얻습니다. 그래, 영화 보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이 리뷰는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가득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반드시 주의하세요!

 

 

 이정출은 처음에는 아주 현실주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묵직한 대사는 울림이 있습니다. 조선이 정말로 해방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차갑게 되묻습니다. 망한 조선은 이미 기울어진 배라는 것입니다. 이제 일제 강점기니까, 차라리 거기서 기회를 얻고, 가족과 함께 먹고 살아가게 되었음을, 그는 다만 일상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제국의 충실한 경찰이지요.

 

 김우진은 젊은 의열단의 리더로서 폭탄을 일본의 심장부에 터뜨릴 계획을 세웁니다. 비록 안타깝게도 의열단 정예 김장옥을 잃었지만, 정채산이라는 상해의 핵심 간부와도 인연이 닿아 있는 발이 매우 넓은 인물이기도 하지요. 행동은 조심스럽고, 판단은 민첩하고 빠릅니다. 계획이 흐트러 질 때면, 누구보다 빠르게 다음 계획을 만들어서 실천에 옮기지요. 이렇게 항상 플랜B로도 잽싸게 움직여 나가는 모습이 한편으로 참 존경스럽고, 감탄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이정출과 김우진은 술 한 잔 하면서 이제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됩니다. 게다가 김우진은 뇌물 항아리까지 잊지 않고 이정출에게 갖다줍니다. 두 사람이 친해졌다는 소문은, 사실 그 뒤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므로, 금방 퍼지게 됩니다. 일본의 히가시 경찰부장 같은 교활한 인물은, 이정출이 고급스러운 미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정출만 잘 이용한다면, 의열단원들과 리더,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거물 정채산까지도 몽땅 일망타진하고, 폭탄도 제거할 수 있음을 잘 압니다. 히가시는 사람을 장기말처럼 이용하고, 이정출을 계속해서 적진으로 일부러 보내려는 시꺼먼 속이 잘 보입니다.

 

 이 때, 정채산이 던지는 거대한 손길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겠지요. 나는 군인이라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직감적으로 판단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정출에게 이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함께 하자고, 우리를 도와달라고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안에 크게 마음이 요동치는 이정출, 술잔은 연거푸 기울어지고, 이정출은 독립군 거물 앞에서, 많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일제에 충성할 절호의 기회에 정채산을 잡아넣지 않았다는 것은 이정출의 사람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쁜 놈이 아니었던 겁니다.

 

 버젓이 일제 경찰로 친일을 하고 있는데, 나쁜 놈이 아닐 수 있다? 이 점이 영화가 주는 엄청난 아이러니이자, 유산일 것입니다. 그도 사실은 사람이고, 더 좋은 세상에서 태어났더라면, 따라서 만약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존경받는 경찰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이정출은 서서히 행동을 고쳐먹게 됩니다. 김우진의 명령 (아니, 부탁이라고 해야할지도?) 을 하나 둘 자기도 모르게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뭐, 그만큼 김우진이 가진 특별한 리더십이 돋보이기도 했네요.

 

 이제 영화의 가슴 아픈 후반부 - 폭탄을 일본의 심장부에 터트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물샐틈 없는 일제의 꼼꼼한 감시로 인해, 경성역에서 의열단원들이 체포되고, 그 이후로 끌려가서 고문당하는 장면들은 참 슬펐습니다. 김우진마저 최후에는 잡히게 되어서 벙어리 선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희망 하나. 이정출이 독립군으로 거듭나면서, 히가시의 연회장에 폭탄을 날리는 카타르시스! 희망 둘, 김장옥의 복수를 해내는 장면들이, 영화에서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영화는 이정출이 폭탄을 의열단원에게 다시 건네주면서 아름답게 막을 내립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 선조들의 삶이었습니다. 괴로워하고, 갈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론 어리석기도 했지만... 그렇게 나라 없는 신세가 얼마나 슬펐습니까. 그럼에도 현실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동지들이 있기에 세상은 달라질 가능성을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선조들이 있음을 참 감사합니다. 나는 참 볼품없이 사는구나를 크게 반성하면서, 조금 더, 아니 더욱 더 힘을 내야겠습니다. 김우진이 마침내 감옥에서도 웃음짓는 것을 그려볼 때, 내가 어엿한 한국 사람인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잘 그려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영화 밀정 이야기 였습니다. / 2016. 09. 13.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