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빼앗긴 언약궤(사무엘상 5: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14. 04:57

 

빼앗긴 언약궤 (사무엘상 5:1-)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전장터에 나갑니다. 그들은 전쟁의 승기를 잡기위해서 여호와께서 전장터에 임하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지고 간 겁니다. 여호와를 강제로 전장에 임하시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한게 법궤를 가지고 가는 겁니다. 이전에도 법궤가 전장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진군할 때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에 여호와의 법궤를 제사장에게 들려서 군대와 함께 행진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대승이었습니다.
그때의 그 일을 성경에서 배운 이들은 이제 또 다시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서 법궤를 가져다가 전쟁로 가지고 옵니다.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렸답니다. 이제 백성들은 전쟁에 승리할 걸로 여겼습니다. 아니 이미 승리한 걸로 여겼습니다. 여전히 백성들은 그 옛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고 이제 이번 전쟁은 다 이긴 걸로 여겼기 때문에 기쁨의 소리를 질렀고 이 소리가 너무 커서 땅이 울렸답니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법궤가 여전히 권위있고 능력있는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직접 임하신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 그리고 모세가 만든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에 조각목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게 아카시아나무입니다. 나무에다 금을 부어 두껍게 도금을 했고 천사들이 날개로 법궤를 덮고 있는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멋있고 신비해 보입니다.

 

번쩍이는 황금궤의 양쪽으로 두 개의 긴 막대가 달려서 전후좌우에 각각 한명씩의 제사장들이 이 법궤를 매고 앞뒤로 양각나팔을 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정말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이 아니라 그 궤짝안에 정말 하나님이 들어 계실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법궤를 환영하는 소리는 당연히 블레셋 진영도 들었고 그들은 겁을 먹습니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이적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자꾸 신들이라고 하지요? ‘신들’이란 말은 ‘엘로힘’이고 그건 곧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신들이란 말은 원문으로 ‘하엘로힘’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그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이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셈어로 엘로힘은 장엄복수로 ‘신들’이란 뜻이지만 ‘하나님’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블레셋사람들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애굽을 치시고 백성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서 가나안을 식읍으로 준 그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신이 전쟁터에 직접 나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오히려 일사각오의 자세로 결사적으로 싸우게 된 것입니다.

 

막상 싸워보니 이스라엘이 졌습니다. 블레셋이 이겼습니다. 이스라엘은 패해서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갔고 여호와의 궤는 전장에 남았습니다. 이 궤를 블레셋인들이 수습해서 자기들의 신인 다곤 신당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사실은 법궤에 하나님이 계신게 아니기 때문에 신이 직접 전쟁터에 나온게 아닙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의 신관으로 볼 때 법궤가 왔다는 것은 곧 신이 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 법궤가 전쟁터에 나가서 패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걸 이스라엘도 믿고 있고 블레셋인들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여호와의 궤는 실로에 있는 장막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법궤를 가지고 나와서 전장에 나가자 적아를 물론하고 모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궤가 친히 전쟁터에 갔는데 왜 법궤는 능력을 나타내지 않았을까요?

 

오늘 우리가 가장 유의해야 할 대목이 바로 여깁니다.
법궤가 갔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법궤는 기념물이지 그 자체로 하나님은 아닙니다. 물론 법궤를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기위해 법궤를 들여다보거나 함부로 만진 자들을 치시기도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기념물이지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여기있다 저기 있다고 못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그 작은 궤짝으로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만들지도 새기지도 못하게 하셨기에 법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새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착각합니다. 뭔가 눈에 보이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거룩한 성령이 임하신다고 착각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착각이 바로 강대상입니다. 그리고 강대상의 뒤편이 마치 아주 신성한 것처럼 검붉은 빌로드천으로 덮어 두고 마치 그것이 성소와 지성소를 막았던 성전의 휘장인양 생각합니다. 더 일반적으로는 예배당을 교회로 생각하고 예배당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당과 교회가 동일시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믿는 이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고 예배당은 당연히 예배드리는곳을 말하는 겁니다.

 

예배당은 없어도 되지만 믿는 신자가 없다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당연하게 하나님은 어디서나 계실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예배당이라고 해서 안계실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에만 계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배당에 더 많이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어떤 일정한 장소로 가두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센 분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의 품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구보다 우주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이 거대한 땅덩이도 그분의 발등상되기에 부족한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화시켜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서서 예배당의 거룩함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누구의 도움이나 보호가 필요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법궤에 계시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배당이나 어떤 장소에 구속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법궤가 하나님을 이스라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전장에서 그 능력을 자랑했던 하나님의 법궤는 이번에는 어떤 능력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자, 우리가 다시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법궤가 중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중합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고 또 하나님이 임재의 상징으로 삼으셨기에 중한 것이지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법궤는 역사 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판과 항아리와 지팡이가 어떤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능력과 의미를 부여하신 하나님이 중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좋습니다. 그러면 법궤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법궤의 요정도 아닌데 그 법궤 때문에 전쟁을 승리로 이끄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은 정말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법궤를 가진 이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법궤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교회당이란게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산위나 들판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였고 노숙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전혀 여기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자기들의 회당이 없음으로 주님에게 불평하거나 자기들이 돈을 모아서 회당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회당 즉 건물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로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서의 능력을 발하지 못하듯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법궤도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 것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블레셋 사람들이나 눈에 보이는 법궤를 가지고 전쟁의 승패를 점치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한갓 인간의 눈에 보이는 법궤로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죄와 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하면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깨끗해 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우리가 법궤를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책 자체는 어떠한 능력도 힘도 없습니다. 단지 성경을 우리가 지킬 때에만이 성경이 역사하는 힘이 되는 것이지 성경책 자체는 전혀 어떠한 신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그리고 베껴 쓰도 아무런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베껴 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지키려고 다짐하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와 사랑에 감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성경말씀 자체가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지 성경책이 살아서 역사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예배당이 귀한 것이지 그 자체 건물이 거룩해 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당 안에 사람들이 아무리 오래 거할지라도 그가 영이신 하나님과 교감하고 교류하지 않는다면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는다면 결코 거룩한 사람 성도가 될 수 없음과 마찬가지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러서 그곳에 있는 다곤신당에 법궤를 두었습니다. 아스돗에는 블레셋의 주신이 다곤의 신당중에서 가장 큰 신전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법궤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블레셋인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다곤 신당 안에 두었는데 이것은 다곤 신에게 여호와의 신이 굴복했고 법궤가 공물로 바쳐졌다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의 신이 패전한 국가의 신보다 강하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으므로 그들의 사고범위안에서는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곤이란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어원을 추적해서 여러 가지 주장을 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물고기의 신이다, 두 번째는 곡식의 신이다, 세 번째는 바알의 아버지다. 이렇게 말합니다. 뭐 어느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다곤신앙이 가나안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여하튼 블레셋인들은 당시의 관례대로 법궤를 다곤 신당에 두었는데 그런데 다음날 가보니까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 엎드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상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보세요, 사람의 손으로 넘어진 신상을 세우기전에는 다곤신상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형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에 망정이지 만일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면 다곤의 신상같은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겁니다. 전능한 신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겨우 일어선다면 얼마나 치욕적입니까?

 

그러나 다음날 사람들이 다곤 신당에 가보자 더 놀랍게도 다곤 신상이 다시 엎드려져 있는데 이번에는 그냥 엎드려있는 것에서 나아가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뚱이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블레셋 사람들이 상상하던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블레셋의 다곤신은 결코 여호와를 이기지 못하는데 명확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곤 신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신이 아닙니다. 조각품일 따름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지 신이 어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지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궤와 다곤 신상이 대결하는 듯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실제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인간들은 육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 아둔함과 고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신령하게 여기는 상징을 이용해서 시청각교육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상에도 신령이 깃든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다곤신이 알아서 법궤에 머리를 조아렸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들에게 보여주려고 주께서 하신 것이지 다곤이란 신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가 절을 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각적으로 다곤의 미약함을 보여주려고 그런 광경을 만든겁니다. 실제를 떠나서 인간은 보는 것만을 믿고, 믿고 싶은대로만 생각하므로 인간들의 눈에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상을 흙으로 만든 것은 천하고 금으로 만든 것은 신령하고 하는 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자기만족일 따름입니다. 신당을 대리석으로 만들고 백향목으로 덧대면 귀하고 흙으로 만들어 종이를 바르면 천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대하고 화려한 예배당이 소박한 개인집의 방보다 더 거룩한 일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네가 그렇게 자위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관념이고 눈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돌아서면 이러한 사실을 잊어 버리고 기왕이면 근사한 예배당에 하나님이 더 신령한 듯이 행동합니다.

 

예전에 어떤 청년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부산의 한 작은 교회에서 몇 명의 찬양팀원들이 서울의 워십으로 유명한 교회에서 개최하는 워십 강연회에 갔답니다. 그런데  찬양팀 리더가 팀원들을 불러놓고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너희들이 들어가면 엄청나게 비싼 음향장비 때문에 혹시라도  여기서 하는 노래가 더 좋게 들리고 저들의 율동이 더 멋있게 보일 수 있어서 감동을 받을 수 있는데 그걸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착각하지마라”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습니다. 주님도 우리의 눈을 조심하라고 하셨지만 평범한 인생인 우리가 그 말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무시하고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처럼 하나님은 다곤 신상을 부수어 엎어지게 만든 퍼포먼스를 보여주신 겁니다.

 

이 본문을 잘 보시면 여전히 하나님은 자기의 법궤를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사용하시고 그걸 통해서 뭔가 귀한 교훈을 내려주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를 빼앗기고는 이제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고 두려워했지만 애초에 하나님은 법궤 속에 계신게 아니라 자기의 말을 지키고 순종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계신 것입니다.

 

다곤 신당의 규모는 어마어마합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에 아직 돌로된 성전이 세워지기 전이므로 실로에 있는 성막과 비교하면 그 규모나 장엄함 그리고 그것이 주는 극적효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아무리 금실 은실로 수를 놓았다 하더라도 수백년이난 된 텐트가 화려해 봐야 석조건물과는 상대가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곤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굉장한 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목석철의 우상은 인간의 상상력이 가미된 조각품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 조각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보다 다곤의 권능이 더 굉장하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더 거대하고 장엄한 건물과 전쟁에서의 승리가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실제로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신상이 법궤앞에 엎드려져 있고 신상이 부서진 것을 보고서도 다곤 숭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여호와의 위대함과 권능에 대해서 경의를 표했지만 자기네의 신도 그 못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지키셨습니다. 그는 다곤 신당에 바쳐진 공물이 아니라 다곤 우상을 심판하고 이방 블레셋에 하나님의 참 신되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죽은 우상을 섬기는 무리들에 비해 기독교도의 우월성을 드러내려면 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장엄한 교회당이나 설비를 장착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멋진 삶으로 해야 합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세상과 돈으로 경쟁하려는 사람들, 세상과 권력으로 경쟁하려는 이들은 생각을 잘못하는 겁니다. 우리의 단점으로 상대의 장점을 상대하면 백전백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장점은 돈과 권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금은동석철목의 우상을 만들 필요도 없고 그가 거할 처소를 만들 필요도 없고 그가 사용할 금대접 은대접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구약시대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준비하면서 금과 귀한 돌과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했지만 이것은 국가적인 사업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건물을 짓는답시고 국가예산을 배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성전과 교회당을 비교해서 더 화려하게 더 장엄하게 지으려고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더 크고 더 장엄한 예배당을 짓는다면 어쩌면 우리 주님은 그 예배당에 임하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혹여라도 그 건축헌금 중에 억울한 이들의 눈물과 가난한 이들의 피가 배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물질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의 이름을 걸고 생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이 칭찬할만큼 잘 살면 됩니다. 부자로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행실을 바로하고 도덕적으로 칭송받을 만큼 반듯하게 살자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보여 주면 됩니다. 정직하고 공의로우며 사랑이 넘치는 자들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더 더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따지고보면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귀중한 것이 많습니다. 행복이니 사랑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의 가치는 물질로 따질 수가 없는 것 들입니다.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과 공기가 둘 다 중요하지만 공기의 가치는 물보다 훨씬 더 합니다.

 

숨을 일분만 참아도 죽을 것 같습니다. 물은 훨씬 오랫동안 안마셔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성을 키우는 일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초월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두게 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미혹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좋아질 것입니다.
이걸 우리는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이 창조되어질 때 우리가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다만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에 훨씬 더 집착하게 됨으로써 우리가 가진 영성은 점점 퇴화되고 동물적인 감각이 더 우리를 지배하게 된 것 뿐입니다.

 

생령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 안목의 정욕 때문에 육신이 된 것이지요.

제가 오디오기계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이 오디오가 가격에 따라 음질에 차이가 난다고 많은 이들이 말하는데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답니다. 앰프가 사실은 왜곡율의 차이는 있어도 일정한도를 넘어가면 똑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케이블에 따라 소리가 변한다는 말을 어떤 이는 신봉하며 또 어떤이는 미신으로 치부합니다.

 

소리가 앰프나 선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게 블라인드테스터입니다. 일단 기계를 보고 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소리가 다른 것처럼 들리지만 눈을 가리고 소리를 들려주면 어느 기계에서 어는 선에서 나는 소리인지 절대로 분간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디오를 감성적인 기계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럽의 독일계회사에서 나온 수천만원짜리 앰프가 있었는데 이 앰프로 소리를 들으면 소리결이 곱고, 웅장할 때 웅장하고 섬세할 때 섬세하고 뭣이 어떻고 저떻고 찬사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앰프를 열어봤답니다.

 

뚜껑을 열고 내부를 살펴보니 세상에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팔리는 몇십만원짜리하고 똑같더라는 거지요. 알고보니 그 독일계회사는 앰프를 만들 재주가 없는 회사이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일본제 보급형을 사와서 껍데기만 바꾼겁니다.

 

적당히 두꺼운 알루미늄으로 금판까지 붙여서 수십배의 폭리를 취한 겁니다. 이 부끄러운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 회사가 한 말이 뭐 앰프는 내부기계가 같아도 껍데기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진다나 여하튼 그 앰프는 아직도 일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앰프로 불리며 팔리고 있습니다. 아마 예전만은 못할 겁니다.

 

아주 비싼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소리를 들으면 소리가 좋게 들린다는 플라시보효과!
그와 비슷하게 이게 병에 아주 잘 듣는 약이라고 말하고 가짜 약을 줬는데도 탁월한 치료효과를 보이는 이 위약효과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를 잘 말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를 보이지 않으시고 자기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금지하신 것이지요. 다곤 신당에서의 이 일을 보고 블레셋 사람들은 틀림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법궤를 금 독종 다섯까지 보태서 암소가끄는 수레에 태워 정중하게 돌려보냈지요.

 

여기 본문의 독종은 쥐형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때 아스돗에 퍼진 병이 선페스트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궤를 이용해서 승리를 꿈꾸었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아스돗을 심판함으로 자기의 위대성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물과 설비로 하나님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꾸밀필요가 없습니다.

 

블레셋인들은 이후로 다곤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을까요? 천만에요. 이들은 이후로도 여전히 다곤을 섬겼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인정을 했겠지만 다곤 역시 살아있는 신으로 여긴겁니다. 그러니까 우상의 무익함을 본 것이 아니라 다곤신과 여호와의 신들간의 전투에서 여호와의 승리,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낸 겁니다.

 

우리의 논점을 추석으로 한번 돌려볼까요?
왜 하나님은 그렇게나 우리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싫어할까요? 왜 그렇게나 사탄은 우리의 경배를 받고 싶어 할까요?
왜 왜 왜 그렇지요?

 

그것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아이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이콘인 우리가 사탄에게 절하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굴복한 듯이 보이기에 그렇게나 우리들의 숭배를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보면 전혀 그런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안이 뜨여진다면 우리의 몸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속에 넣어둔 여호와의 생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주에 한반도는 영적인 전쟁터가 될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잔뜩 기대하시는 하나님에게 우상 앞에 맥없이 고꾸라지는 맥없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가족끼리 형제끼리 서로 화합하며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덕분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입으로 시인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무쪼록 기쁘고 즐거운 명절을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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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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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꿈을 꾸었습니다. 신천지라는 미로에 갇혀 있는 절친한 친구를 만나는 매우 기이하고 특이한 꿈이었습니다. 아마 미로 영화 메이즈 러너 같은 것을 본 탓이겠지요. 어쨌든, 저는 신천지에 있는 그 친구를 극적으로 구해내는데 성공했고, 자동차를 타고 미로를 빠져나왔습니다. 이 자동차는 이웃 아저씨의 택시였는데, 그 빠져나오는 길이 너무 좁다보니까, 빠져나오면서 차를 살짝씩 긁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뿔싸! 이거 수리비 많이 나오겠는데, 그래도 친구를 구해내서 다행이다! 그러는 순간에 잠을 깨고 말았습니다. 절친한 친구가 나오다보니,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더욱 더 놀랍고 기묘한 것은,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는 순간, 이웃 아저씨의 택시 역시 출근 차 길을 나서는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물론, 매우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 있습니다만, 그 택시가 어디 긁힌데 없나를 살펴보고선 피식 웃어 넘겼습니다. 실은 저는 운전하는 법도 모르거든요. 제 친구는 운전의 달인이고요. 어쩌면 신천지를 빠져나올 때 운전했던 것은 제가 아니라, 친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비록 꿈에서지만!) 친구가 신천지의 미로를 빠져나왔다는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적어도 차 수리비 만큼 정도는 계속해서 잘 챙겨줘야 겠다는 다짐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손 내미는 것이 얼마나 파괴력이 큰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여 주변에 힘든 사람이 있다면,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가갈 작은 용기를 내볼 수 있기를,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넉넉한 품이 우리에게 포근히 자라나기를, 그런 따뜻한 사람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