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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세아4:1-6: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25. 01:26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4:1-6: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선지자의 민족을 향한 사랑과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저의 민족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종교에 민족과 나라의 구별이 없지만 목사에게는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제가 우리나라를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뭐냐면 우리가 빨리, 더 늦기 전에 빨리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약간의 모순점이 보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처럼 이 나라 모든 이들이 여호와의 택한 백성이었던 적은 없다는 겁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이전에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전에 그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있지도 않았는데 뭘 돌아갑니까? 그러니 돌아갈 곳도 없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도가 최대로 많았던 때에도 그 숫자는 겨우 1200만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말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허풍을 좀 섞어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지금은 인구센서스에 나옵니다. 자기 입으로 내가 기독교도라고 주장한 자들이 약 750만정도? 10년전에는 860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원래 인구 센서스는 모든이들이 참여하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도 저희 집에 조사하러오거나 전화라도 온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와 제 식구들이 과연 인구센서스에 기독교로 잡혀 있을까요?

 

크게 보아 하나님을 믿는 이에는 신교도뿐만 아니라 구교도도 있습니다. 약 560만?  그래도 이 나라 그러니까 한국전체가 아니라 남한만 쳐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채 1/3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호와하나님에게로 돌아가자는 말은 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말은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각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우리의 안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주셔서 생령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종교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심,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부인하더라도 오히려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있습니다. 이건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양심이란게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제가 뭐라고 반박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의 깊은 곳에 분명히 양심은 있습니다.

 

정말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양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있지요. “니는 양심도 없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양심은 누가 만들었지요? 태어날 때부터 있었을까요? 자라면서 저절로 생긴 걸까요? 아니면 의도적인 학습을 통해 생긴 걸까요?

 

소고기도 먹고 돼지 고기도 먹고 닭고기도 먹고 우리는 잘 먹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고기는 안먹지요? 식인종에게 사람들은 엄청나게 엄격하게 반응합니다. 우리말로 질색을 합니다. 사람도 짐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그건 그렇게 질색하지요?
아주 작은 좋은 일이라도 하고 나면 왜 그렇게 마음이 따뜻해 지지요? 어려운 이를 보면 왜 마음이 짠하지요? 감동의 눈물은 어디서 만들어 집니까?

 

이 모든 것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양심도 넣어 주셨고 신에게 의지하려는 종교심도 넣어주셨고 선악의 개념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부인해도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래서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사실 본문에 나와 있는 회개운동은 여호와께 징벌을 받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회개운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빨리, 여호와로부터 징벌을 받기 전에 회개함으로 아예 징벌을 받지 않는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이 내리기 전에 미리 여호와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가 멸망하고 고통받을 것은 너무나 뻔합니다. 그래서 그는 민족앞에 외친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호세아의 회개촉구에도 당연하게 백성들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백성들사이에 죄악과 그로인한 쾌락은 너무나 깊숙이 자리 잡았으므로 다시금 딱딱한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교의 우상이 주는 쾌락은 너무나 확고히 자리 잡아서 마치 마약쟁이들이 인이 박혔다고 하듯이 우상숭배에 인이 박힌 상태입니다. 그 음행과 그것이 주는 쾌락은 도저히 끊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런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 합리적으로 용인되는 상태니까 더 없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지금 호세아는 그런 사람에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하게도 백성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위정자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백성도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가 이렇게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후세대에 경고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회개의 촉구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너희들도 알아라. 이스라엘이 징벌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먼저 촉구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후세들은 호세아서를 읽고 이스라엘이 비참하게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의 회개촉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 회개촉구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이방에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그렇다면 그 이후에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본문의 ‘오라’는 원문상으로는 ‘오라’가 아니라 ‘가라’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걸어가라. 어디에서 걸어갑니까? 죄악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오라 죄악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여호와하나님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어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는 우리를 찢으셨다고 해서 과거형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찢는 시기는 오랜 이후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미지난 과거처럼 너무나 확실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눈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선상에서서 나라와 민족을 보면 너무나 명확한 것을 영안이 어두운 이들은 애써 그걸 부정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이전투구를 일삼다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뿔뿔이 찢어져 이리저리로 포로로 잡혀가고 일부는 남고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역시 뿔뿔이 찢어져 이리저리로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게 하셨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그에게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낫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상하게 하셨은즉 하나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신 것을 누가 다시 치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손에서 누가 우리를 건질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절대로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이 말은 좀 이상하지요? 그러나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이 구절은 두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우선 표면상으로 이틀 후... 셋째 날...이란 것은 조속한 시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우리를 찢으시고 고통을 주셨지만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조속한 시일내에 우리를 다시금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은 히브리어의 언어습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두세사람이라면 다섯을 말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두셋이란 말은 또 달리 숫자나 양이 별로 많지 않다는 뜻을 나타내기위해 쓰이기도 합니다. 서너가지라고 하면 아주 많다는 뜻이 됩니다. 서너가지를 합치면 7이라는 완전수가 되므로 아주 많다는 뜻이고 두셋을 합치면 다섯이라서 몇 개 아닌 것 별로 많지 않은 수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면적으로는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의미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론적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에서 예언했다는 말입니다. 뭡니까?

 

예수께서 금요일날 잡혀서 돌아가시고 주일,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상으론 이틀이고 날짜 상으로는 사흘째에 ‘일으키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좀 억지 같습니까? 그렇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구약 속에 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구절에는 기독론적 해석까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 것이랍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난 우리도 하나님의 길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죄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다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우리도 영원히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너무나 사랑스러운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원문상으로는 해석이 약간 달라집니다. 사실 ‘여호와를 힘써 알자’라는 말은 호세아서의 전체 주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문상으로 이 말이 “우리가 알자 여호와를 알기 위해 좇아가자”라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우리말로 ‘힘써’로 번역된 단어는 사실 누군가의 뒤를 좇아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여호와를 알고 그의 말씀을 따라 힘써 하나님의 발자취를 좇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발자취를 좇기를 싫어합니다. 어쩌면 신경도 쓰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뒤를 좇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한 회개도 아니고 하나님의 앞에 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도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우리 기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대로 하나님앞에 있지 않는 신자가 아무리 많아도 전혀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창원에서 큰 교회의 목사가 사고를 친 소식을 접했습니다. 기가 찬 일입니다. 왜 그런 사람이 큰 교회의 목사를 하고 있는지 참으로 원망스럽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언론에 그의 죄가 폭로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신자입네 목사입네 해봐야 전혀 하나님의 영광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기독교의 문제는 신자들 중에서 성도가 아닌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목사들도 참 성도가 아닌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지요. 개신교도가 거의 없는 독일에서는 십일조세를 안낸다고 문제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헌금액수가 줄어서 문제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교회요 성도라고 이름하는게 문제지 쭉정이 신자들이 줄어드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헌금액이 줄어드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쟎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그러면 나머지를 더하실 것이라고, 그리고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겠다고 그러면 되었지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돈을 마구 쌓아놓지 못해서 문제입니까? 대리석에 붉은 카펫을 깐 예배당을 짓지 못해서 문제란 말입니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지 못한 것이 문제지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함을 걱정해야지 다른 것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똑똑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걱정이 많습니다. 그것도 해야될 걱정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걱정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라고 하지요? 여기서 ‘알다’란 말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피상적으로 겉으로 대상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알다란 말은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상대방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한글 성경을 백회독을 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성경을 번역하는 분이 잘못 해석 한게 많기 때문에 그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원문의 뜻을 참고해야 합니다. 이번에 성경을 개정하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오역이나 의미불명의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는 것이지요. 억지로 성경을 혼자서 풀려고 하다가 미혹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호세아가 여호와를 알자고 표현한 것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하고 한번 같이 살아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는 그런 뜻입니다. 전인격적으로 안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더라 이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해 보니까 그가 나에게 응답하시고 그가 이렇게 나를 인도하시고 하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호세아의 여호와를 알자란 말은 배타적으로 여호와를 알자는 말입니다. 이 신도 한번 섬겨보고 저 신도 한번 섬겨보고 점도 한번 쳐보고 굿도 한번 해보고 불공도 한번 드려보고 이래저래 해본 중에서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는게 제일 낫더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품안에만 있는 그런 것을 ‘알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내가 배타적으로 연합하는 것을 ‘하나님을 알다’라고 표현합니다.

 

당연하게 우리는 성경 원문의 뜻처럼 힘써 하나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야 합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자세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너무 호화스럽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게 아닙니다. 청빈을 두려워하는 이는 목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일용할 양식은 주시니까 너무 돈돈 거리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며 그렇게 나아가십시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발자취를 무시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가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지만 내가 실천하는 것하고 내가 아는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성도로서 남에게 관대하고 온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불칼이라는 말을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뭐 회개까지는 그렇고 자기를 한번 돌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악에 대해서 불칼이 아니라 일체의 남의 행동에 대해서 불칼같으면 그건 정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자꾸 뒤끝이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곤란합니다.

 

우리의 성격에 고무를 한번 덧대어서 남과 충돌해도 남이, 그리고 내가 충격을 덜 받도록 흠집은 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3절에 이어서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원문상으로는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처럼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어둔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의 나타나심도 그렇게 확살하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나타나시면 주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며 수고했다고 안아 주실 것이고 위로하시고 그의 품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해가 뜨면 어둠이 물러가고 추위도 물러가고 만물이 밝고 따뜻해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께서 오시게 되면 이 세상의 어둠이 물러가고 이 세상이 한결 따뜻해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의 나라가 서면 이 세상이 한결 따뜻해 지고 이 세상의 억울함과 어둠이 물러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주의 나라의 모형인 교회가 서면 인근 주민들이 고통을 겪게 되면 안됩니다.

 

특히 주차문제는 심각합니다. 교회주차장에 차를 댈 곳이 없다고 골목길과 한길 가에 주차하는데 너무 많이 주차를 해서 주민들의 차가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야,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하고 감탄하겠습니까 아니면 욕을 하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주일날 아침에 강남의 큰 교회 앞을 차로 지나가는데 교회에 차량 관리하는 분들이 지나가는 차를 모두 세우고 자기 교회 교인차를 지나가게 하는데 계속해서 지나가는 겁니다. 한 오분 정도? 교통신호도 무시하고 수신호로. 길복판에서 차를 막아서 있으니까....모든 차들이 일제히 서있으니까 빵빵거리고 욕을 하고 난립니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겁니다. 교회 목사인 제가 황당해할 정도면 믿지 않는 이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답을 압니다. 그러니 괜히 하나님의 이름을 욕먹이지 말고 여기에 대한 대책을 빨리 세우기를 바랍니다. 다수의 힘으로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반드시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 교회는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법을 무시해서 또 한번 언론에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최소한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맙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할 때는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기 때문입니다. 이건 사실 나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컫게 되는 것으로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입니다. 조심 또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해가 나오면 어둠이 물러가고 만물이 빛나게 되는 것처럼 빛의 아들인 우리 교회가 세상에 서면 세상이 우리로 말미암아 좀 더 따뜻해 지고 좀 더 밝아지고 좀 더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원래 이 말의 뜻도 앞문장과 비슷합니다. 어둠이 가면 새벽이 오듯이 여호와의 나타나심이 확실하다는 뜻인 앞문장과 같이 비가 반드시 오듯이 늦은비가 반듯이 오듯이 주께서 오시리라는 뜻이기는 한데 저는 요즘 이 구절을 보면 그런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일기예보가 워낙 엉터리라서 ‘에이 비가 설마 오겠냐’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도저히 그렇게 해석을 못하겠습니다. 비가 오는 것이 확실하듯이 주께서 확실히 오신다 이렇 게가 아니라 바짝 마른 대지에 비가 오면 만물이 소생하고 온 백성이 기뻐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만물을 살리고 세상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원래 우기와 건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처럼 일년에 고루 고루 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우기가 정해져 있어서 사람들은 우기만 기다립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그때가 되면 해갈되니까, 게다가 이스라엘에는 이른비와 늦은비라는 두 번의 우기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늦은비가 오는 계절도 정해져 있습니다. 만일 이 두 번의 비가 오지 않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뭄이 들고 그리고는 백성들이 아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때 이스라엘에 3년반의 가뭄이 왔다는걸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비가 오는 것은 새벽이 오는 것처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경험상 그때에 항상 비가 오더라 이렇게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비가 오는데 올해는 이상하네’ 라고 할만큼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장마철은 요사이 확실히 비가 오는 계절이 아닙니다. 마른장마라고 해서 구름도 끼고 습하기는 하지만 비가 오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오히려 태풍이 불면 비가 많이 오지만 태풍이란 문자 그대로 바람이기 때문에 진로가 확실히 정해진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비가 오는 걸로 여호와의 임재의 확실성을 예언한다는 말에는 선뜻 동의가 안됩니다만 비는 만물을 소생시키며 촉촉하게 적시는 은혜를 가진 것은 확실합니다.

 

본문의 ‘비’는 폭우처럼 많은 양의 비를 의미하고 ‘늦은비’는 봄비처럼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정도의 비를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임재는 그렇게 세상을 풍족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우리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인 교회도 세상을 이렇게 풍성하고 촉촉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장 12절에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어때요? 나무 막대기가 무얼 안다고 물어본단 말입니까? 또 막대기가 입이 있어서 백성들에게 고하겠나요? 그렇지 않고 백성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 이 막대기는 아세라를 말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세라의 형상을 나무 기둥에 새기고 세워두었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음란한 영에 미혹되어서 그렇게 했답니다. 음란이라고 해서 육체적인 음란만을 말한다기 보다는 영적인 음란 즉 우상숭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은 아세라 신전에 있는 여자 신관 그러니까 신정 창기들과 성관계도 했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겠지요. 바알 신전에서는 반대로 했겠지요?  그래서 음란이 우상숭배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걸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구절이 여기 있습니다.
4장 13절에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들이 좋음이라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산당을 지어놓고 여기서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이교의 제사는 의식도중에 신관 또는 신녀들과 성관계를 맺고 또는 음란한 춤을 추고 사람의 음욕을 북돋우고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게다가 남녀신도들이 눈을 맞추는 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무 그늘이라는 말은 음지라는 말이고 약간은 어둡고 주변으로부터 가리워지는 그래서 그 그늘 속에서 대낮에도 음란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이방종교에서처럼 이상하고 망령된 일을 행함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면 안됩니다. 4장 5절에 “너는 낮에 넘어 지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넘어지리라” 보면 볼수록 호세아는 굉장한 선지자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음란한 제의에 매우 열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시면 더 참담합니다.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음행을 저지르는 딸들과 며느리들을 벌하지 않는 이유는 남자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랍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은 술집에서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도 여자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반대의 경우도 많아 졌고 남녀가 다같이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여기에 관련된 범죄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범죄의 끝은 보통 살인입니다. 마치 지옥같습니다.

 

아세라는 다산의 신입니다. 그 다산의 신에게 가서 제사를 지내면서 다산 행위를 했기 때문에 이는 결국 남자들의 죄라는 겁니다. 왜냐? 남자들이 먼저 아세라신을 섬기는 이방종교를 도입한 죄가 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음행을 저질러도 결국 남자들의 죄가 더 크기 때문에 벌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거 콩가루 집안, 막장가족을 만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평소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도저히 보기 어렵습니다. 왜 이러셨을까요?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뿌리부터 진멸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천지에 우상이고 온 천지에 음행이니까 이것들은 꼴도 보기 싫어서 어느 정도 벌을 주고 회개시켜서 바로 잡아서 사람 만들어서 살려 두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진멸해 버려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그래서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이러면 머지않아 큰일이 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시게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5장10절에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남 유다의 지도자들은 백성의 땅을 빼앗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계표를 옮겨서 합법적으로 땅을 빼앗습니다. 백성들은 얼마나 억울해 할까요?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니 백성도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망해라 망해라’ 하고 저주를 퍼부으니 나라가 안 망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4장6절을 보고서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내 백성이 자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 말을 보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지금 우리나가 애를 안 낳기로 세계에서 일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저런 징벌은 차치하고라도 생물학적으로 멸족으로 가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멸족이 되기 훨씬 전에 나라가 없어질 겁니다. 지킬 사람이 없어서 두 눈 뻔히 뜨고 나라를 빼앗길 겁니다. 우리의 이웃 중에 남의 것을 빼앗기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나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휘둘러 지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겠습니까? 일단 도끼가 휘둘러 지면 , 나무가 잘라지면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은 나중에 우리가 징벌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그래서 회개하면 회복은 시키실 수도 있겠지만 징벌을 당하기 전에 미리 회개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호세아가, 백성을 사랑하는 호세아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그렇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눈으로 보면 백성의 멸절이 눈에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니까 이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어려서 세상을 모를 때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이렇게 예수를 잘믿고 이렇게 착한 민족에게 너무 가혹한 시련을 많이 주시는구나! 순수함을 사랑해서 백의를 즐겨 입고 남에게 수많이 침략을 받아도 단 한번도 침략은 하지 않은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정말 너무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정말 이해가 안된다’

 

그런데 자라면서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고는 낯이 뜨거워서 도저히 그런 생각은 못하겠습디다. 각종 범죄율 일위에 무고에 툭하면 소송을 남발하고 거짓을 말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무조건 이기고 돈을 사랑함이 유별나서 남을 죽이면서까지 이를 취하려고 하고 무정하고 간사하고 음란한 족속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 무섭구나!’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용케 아직까지 멸망하지 않았구나! 참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이들이 교회에 다니는데 교인들이 별로 없는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살고 좋은 조건인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아니 정말 분하게도 일본의 범죄 통계를 보면 우리의 1/10도 안된답니다. 비록 속마음(혼네)을 숨기고 뒷담화도 하지만 그렇게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소송보다 도의를 앞세우고 와, 제가 할말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암발병률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비해서 월등히 높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일위 몇 개부분에서 이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이 특별히 암에 취약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서 그럴까요?
그럴리가요, 우리나라에서 암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삶의 태도와 환경에 문제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죽어라고 공부해야하고 죽어라고 일해야 하는 (강요된)생활 태도, 죽어라고 일하면 죽습니다. 살기위해서 일을 하는 것인데 일 때문에 죽는다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에서 장시간의 노동뿐만 아니라 귄위주의, 서열문화로 인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피가 마릅니다. 그러다가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환경을 볼까요? 발암물질이 들어있는 세멘트로 집을 짓고 발암물질이 들어있는 공기를 마시며 발암물질이 들어있는 물을 마시고 발암물질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고 사는데 암이 안걸린다면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암에 얼마나 걸리기 쉬울까요? 늙어서 죽는 분들의 사망원인 일위가 암입니다.

 

그런데 이 암의 원인이 되는 ‘암에 친화적인 환경’을 만든건 우리들, 우리 인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예배당이나 공공건물을 세멘트로 많이 짓습니다. 페인트로 칠하지 않아서 멀리서 보면 마치 돌멩이로 지은 집 같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그게 돌이 아니라 세멘트라서 정말 깜짝 놀랍니다. 트랜스포머1탄에 보면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는 옆으로 멋진 예배당이 보입니다. 제가 유학했던 파사데나에 있는 교회당인데 저희 학교 바로 옆에 있습니다. 고딕양식인데 세멘트입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세멘트에 발암물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세멘트를 만들 때 산업폐기물, 쓰레기, 폐타이어같은 것을 섞게 되었답니다. 처음 이걸 제안한 사람이 공무원이라는데 이 사람은 아마 처리할 수 없는 산업폐기물을 세멘트만들 때 집어 넣으면 돈도 절약하고 환경도 살리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세멘트는 발암물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후쿠시마에서 원전이 터진 후에 방사능폐기물을 우리나라 업자들이 3800억을 받고 처리해준다고 우리나라에 가져왔답니다. 이걸 허가해준 정부는 도대체 우리국민들을 다 암환자를 만들어서 죽일려고 그랬는지...그리고 그 쓰레기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땅에 묻었는지 아니면 역시 세멘트 만드는데 집어 넣었는지, 그래서 그 당시에 지은 아파트는 특히 더 위험할 것 같습니다. 대기니 물이니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남의 건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돈만 생각하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경을 만든건 우리들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니까 우리나라 사람하고 일본인들에 대한 현지인의 평가가 극과 극입니다. 분명히 제가 일본인들의 가혹한 짐승같은 행적을 기록한 국사를 배웠는데 저들은 그래도 우리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았던 모양입니다. 믿는다는 우리들의 행위가 믿지 않는 저들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눈에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외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정말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이대로 있으면 멸망이 어둠이 지나고 새벽이 옴같이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이미 내려치기위해 들렸고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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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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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목사님의 호세아 설교네요. 최근에 영화 밀정을 보면서 일본 사람 정말 나쁘고, 극악무도 하고, 잔인하고, 못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는 일본적인 것들을 아예 멀리해야 겠다며, (애니메이션, 게임 등) 일본하위문화에 친숙한 편인 저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웃음) 그런데 일본의 범죄율이 더 낮다니요...

 

제가 놀랐던 것이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대지진) 이후, 동경이라는 대도시의 전력소비량을 낮추면서, 근검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일본의 분위기와 태도를 기억합니다. 우리나라의 금모으기 운동과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전 국민의 마음을 모은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일들일 테지요.

 

오늘날 한국은 서로가 너무 편가르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길게 봐서 다함께 지혜를 모아 한국을 잘 살게 할 수 있어야 좋을텐데 말이지요. 우리끼리 싸우고만 있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다른 나라들은 지혜롭게 위기를 극복해 나갈 때, 홀로 부패와 함께 몰락해 간다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세대에 태어나서, 몰락을 선명히 목격하는 구나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불과 100년전 망국의 교훈을 벌써 망각하고, 편안하게 이윤만 탐욕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힘을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