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돌라와 야일(사사기10: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29. 03:08

 

돌라와 야일 (사사기10:1-)

 

요즘 한국에 때아닌 계급논쟁이 벌어 집니다. 금수저와 흙수저론입니다. 당연히 은수저도 있고 철수저도 있고 나무 수저도 있겠지요. 그래서 이름도 거창하게 수저론이 되었습니다.

 

제가 자랄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가 새로운 신분제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재벌들은 일자리로 사람들을 조종합니다. 노동자들은 이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과 한달 벌어 한달 먹는 사람 일년벌어 일년 먹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노동자들 안에서도 나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준도 역시 돈입니다. 일당 노동자와 월급을 받은 사람, 연봉을 받는 사람, 정규직과 비 정규직, 화이트 칼라와 블루칼라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도 여러 계층이 있습니다.

 

자본가들에게도 계층이 있습니다. 재벌,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그리고 기타 자영업. 제가 경제전문가는 아니므로 이쯤 합시다.

 

1894년 이 땅에서는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사람들의 인습에서 신분제의 뿌리는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정들이 사회의 차별철폐를 촉구하기위해 ‘형평사’를 만들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6.25전쟁으로 인해서 이런 인습들이 상당히 뿌리 뽑혔고 새로운 세상이 오는가 했는데 천민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새로운 신분제가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원래 신분제가 폐지되는 것은 주로 전쟁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때도 양반들과 왕이 도망가는 바람에 가짜 양반들이 생겼고 6.25 전쟁으로 한번 전국이 격랑에 휩쓸렸기 때문에 이전의 인습을 고수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평등한 세상이 오는가 했습니다만 그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부작용이 생겨버렸습니다.

 

오로지 돈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하는 수저론이 생긴 겁니다. 외국에서는 계층을 나눌 때 돈만 아니라 학력과 문화수준, 그리고 그 사람의 신념과 행위에 따라 계층을 나눕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소개했기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만 오로지 돈에 의해서 모든 것을 나누는 나라는 전 세계에 몇나라 없습니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계급을 자본가와 무산계층으로 나누지만 이 안에서도 복잡하게 서로 얼키고 설킵니다. 요즘 북한에서는 백두혈통이란게 있지요. 아마 왕족쯤 되는 모양인데 그게 바로 계급아닙니까? 이렇게 만인평등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새로운 계급론이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재미로 퍼지다가 이젠 대세로 굳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수저론은 오로지 돈으로만 계급을 나누기에 사람들은 돈을 벌기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없다는게 더 큰 문제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고 ......... 참고로 저는 수저론도 계급제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건 개그맨들이 웃길려고 하는 헛소리지 결코 공식적으로 인정할만한 용어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돈은 신외지물입니다. 몸밖의 물건입니다.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지 결코 항구적이거나 고정된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삼대 부자가 없고 삼대 거지도 없다’는 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 인간 자체가 몸 밖의 물건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젊다는 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하게도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지고 흘러 갑니다. 지금 나이 많으신 분들에게도 젊었을 때가 있었고 지금 어린 친구들에게도 세월이 지나면 젊을 때가 옵니다.

 

그러나 젊음은 인생에 한번밖에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젊음이 그렇게 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젊음의 시기가 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젊음의 때에 반드시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치 없는 일에 자신을 맡김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나중에 후회만 남기는 일은 없도록 준비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주인공은 돌라와 야일입니다. 이 두사람은 이스라엘의 사사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럴만도 한게 이 사람에 관한 기록은 겨우 몇 줄이 전부입니다. 한 마디로 설교 분량이 안나옵니다. 그래서 그동안 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만 오늘 우리들은 이 두 사람을 한번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사사 돌라

 

먼저 ‘돌라’를 살펴 봅시다. 이 사람은 잇사갈 지파이며 ‘도도’의 손자이고 ‘부아’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이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기록해서 사람을 구별합니다. 1910년에 왜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새롭게 호적을 작성할 때 양반은 겨우 1.9%밖에 없었고 성이 없는 이도 절반에 가까웠답니다. 매우 충격적이지요? 뭐 뒷부분은 생략합시다. 그런거 괜히 시시콜콜 따져봐야 가슴만 아픕니다.

 

이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원문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아비멜렉의 후에....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원문은 전혀 다르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어의 순서가 다릅니다.

 

원문 성경에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은 “(그리고) 일어나서 아비멜렉의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돌라가”
원문은 ‘그리고 일어나서’가 한데 붙어서 사용됩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와야콤.
‘와우’가 ‘그리고’ ‘콤’이 ‘일어나다’ 합쳐서 와야콤.

 

일어난다는 말은 뭔가 새롭게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용기를 내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어떤 중대한 결심을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라의 전에 아비멜렉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기드온의 첩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사가 아니라 왕이 되었고 외가가 있는 세겜에서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이 사람은 왕이 되고나서 제일 먼저 형제 70명을 바위에서 죽였고 자기에게 반기를 드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다가 여인의 멧돌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돌라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비분을 느끼고 여호와의 공의로 새로운 통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출현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잇사갈 지파 출신인데 잇사갈이 아닌 에브라임산지인 사밀에 거하면서 23년을 다스렸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돌라와 아비멜렉의 이름을 알면 정말 달라 집니다. 아비멜렉의 이름 뜻은 ‘내 아비는 왕이다’ ‘아비’는 아비고 ‘멜렉’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첩의 자식으로 따로 살았던 아비멜렉은 이름만은 고귀합니다. 우리나라에 어떤 재벌의 첩은 자꾸 언론에서 세 번째 부인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부일처제 국가이므로 한명 이상의 부인을 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셋째부인입니까?

 

기드온을 우리는 믿음의 용사로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은 자식이 무려 70명입니다. 이건 뭐 말도 못할 지경입니다. 백성들이 왕자리를 바치려고 하자 왕자리는 거부하더니만 얼마나 돈과 권력을 자기에게 집중시켰는지 본처 소생이 70이고 또 첩의 자식들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게 나라를 좀먹고 서로 죽이고 죽는 분란을 만들었지요. 여기에 의분을 느낀 돌라가 하나님의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왜 고향 잇사갈이 아니라 에브라임의 사밀에서 다스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는 고향에 묻히는게 보통인데 이 사람은 죽을 때도 고향이 아니라 에브라임의 사밀에 묻혔습니다. 여기에 뭔가 깊은 곡절이 있겠지만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건 순전히 제 추정입니다. 그 이름으로 보아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거나 기업을 잇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새로우냐? 여러분, 돌라의 이름 뜻이 뭔지 아십니까?
‘돌라’의 뜻은 ‘벌레’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사람을 벌레에 비유하는 일이 많아서 골친데 이 사람은 이름이 아예 벌레입니다. 사람을 단순히 벌레라고 이름했다는 것은 이 사람의 출신이 고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로 치면 돌쇠정도 아니면 개똥이?

 

아비멜렉의 이름과는 너무나 다른 천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나라와 민족에게 이로운 사람이었나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돌라, 벌레입니다. 이 사람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공의가 서고 우상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공법으로 다스려지게 된 것입니다.

 

10:1에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는 뜻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말은 원어로는 ‘예수’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슈아, 여호수아, 호세아, 그리고 예수. 다 같은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나 구원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구원을 돌라가 했답니다.

 

그의 이름은 비록 벌레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야일에게는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자, 이 구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한번 살펴 봅시다. 구원이 의미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구원은 해방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민족의 지배에서 해방될 때 성경은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썼습니다. 또한 구원이라는 말에는 ‘어떤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다 보호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적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케 한다는 의미와 공동체를 적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돌라가 바로 이러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라가 어디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로 보아 그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했고 우상숭배를 막아서 이스라엘의 공의를 보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잇사갈과 에브라임 산지 사밀은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잇사갈은 북쪽에 있고 에브라임은 중앙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므낫세 지파가 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고향을 멀리 떠나 다른 지파의 땅에서 사사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어떤 기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밀을 사랑했고 죽어서도 사밀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사사들 중에서 자기 고향이 아니라 다른 곳에 묻힌 자는 이 돌라가 유일합니다.

 

사사는 종신 대통령과 재판장 그리고 군사령관과 선지자의 임무를 가지는 성속의 권리를 같이 가지는 막강한 자리입니다. 왕은 아니지만 종신직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 돌라는 에브라임 사밀에서 23년을 다스렸답니다. 왕이 아니라 종신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사사가 세습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의 사사직을 계승한 것도 모자라 더 권한을 집중시켜 왕이 되었습니다.

 

돌라에 대한 기록은 이 두절이 답니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일들은 그가 ‘일어나서’ ‘구원했다’는 두 단어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고 우쭐해 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아비멜렉과 돌라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의 배경이나 환경이 우리를 구속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자꾸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고 스스로 비하하고 있기 때문에 금수저들이 스스로 우쭐해하며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기에 우리가 지금 마치 계급제사회속에 사는 듯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자랄 때 사람들 사이에 재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지요. 몇 년에 한번씩 다시 뽑는. 물론 그때는 한사람의 독재체제였기는 합니다만 법정신은 그렇지 않지요. 저는 정말 순진했던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알아서 긴다고 사람들이 재벌, 재벌하면서 그들을 우리와는 전혀 별개의 사람들로 여깁니다. 이러한 인식이 새로운 계급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수저에 관한 이야기는 해서는 안됩니다.

 

재벌이 별겁니까? 정부에게 잘 보여서 권력자와의 줄로 은행에서 대출 엄청 받아서 기업하고 있는 자들이지. 솔직히 저에게 은행이 돈을 엄청 빌려 준다면 제가 재벌이 되는 거지요. 당연히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거대한 기업의 전부가 그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 겨우 2-3%정도만 가지고 있지요. 지주회사와 상호지급보증이라는 요상한 방법으로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호가호위, 남의 돈으로 떵떵거리는 거지요. 사기꾼? 재주꾼? 그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기는 거지요.

 

요즘은 한술 더 떠서 신문에 ‘집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양해야 합니다. 교회 집사 말고 과거에 집에 노비중에서 관리자를 일컫는 집사라는 말은 민주주의 시대에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자꾸 시대를 퇴행하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언론부터 먼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장난으로라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돌라, 벌레라는 그는 아비멜렉, 나의 아비는 왕이라고 하는 자보다 얼마나 나라와 민족에 유익된 일을 했습니까. 비록 첩의 자식이지만 왕자처럼 자란 아비멜렉은 사람을 괴롭히고 나라를 내분으로 몰아 넣었지만 돌라 벌레라는 이름을 가진 아마 별로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나라를 다시금 여호와의 공의가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고 보존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만 잘먹고 잘살려고 피의 잔치를 벌였던 아비멜렉같은 인물이 이 땅에 다시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의 체념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될대로 되라’고 하는 체념 그리고 ‘나만 잘살면 그게 정의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기심. 나라와 민족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은 우리 전체에 죄를 짓는 길입니다. 권세자에게 아부해서 한자리 차지하고 부자에게 아부해서 떡고물을 얻어 먹고 해봐야 뭐가 달라집니까?

 

앞으로 우리 무슨 수저라는 말은 쓰지 맙시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의 운명에 부당하게 개입하려고 하면 그건 우상입니다. 산 우상.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그건 사람들에게 조롱거리지 자랑이 아닙니다. 그 산 우상이 된다면 영광이 아니라 욕입니다.

 

나에게 산 우상을 두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에서 시작합니다.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분제를 폐지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려고 수많은 인류의 역사에 흘린 피를 살펴 보세요. 결코 우리의 우스개 소리로 그러한 대의를 후퇴시켜서는 곤란합니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안난다고요? 나면 어쩔 겁니까? 우리가 한번 도전해 봅시다. 쓸데없는 사람들의 편견을 한번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깨봅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한번 이루어 봅시다.

 

2.사사 야일

 

이렇게 두절로 돌라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3절부터 야일에 대한 언급을 시작합니다. 야일이란 말은 ‘계몽자’ 또는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야일은 길르앗 땅에서 사사가 되는데 길르앗은 요단의 동편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아무리 실펴보아도 길르앗 지파는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길르앗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부족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르앗 땅이라고 할 때는 꼭 지파나 부족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요단 동편에 땅을 얻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의 절반이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땅을 일러 길르앗이라고 불렀답니다.

 

지도에 보시면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동편의 지역으로 지금의, 크게는 골란고원의 바로 남쪽 바산평야 와 길르앗 산지를 통틀어 일컫고 작게는 얍복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산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길르앗 산지는 레바논과 갈멜에 이은 울창한 삼림이 있었고 부유함의 상징이었답니다. 그래서 아마 주석서에서 그런 언급을 한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는 요단강 동편지역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요르단의 영토입니다. 아마 당시에도 이방민족들이 많이 살았던 모양입니다. 이제까지 거의 대부분의 사사가 요단 서편 가나안 지역에서 사사가 되었던 것에 비해 이 야일은 요단 동편에서 사사가 되었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는 돌라와 달리 한절이 더 할당되었습니다. 돌라는 두절인데 야일에게는 세절입니다. 석절이라고 할까요? 왜 이러냐면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두었었는데 그 성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칭하더라”

 

이 말이 하나 더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들이 삼십이고 나귀를 탔고 성읍을 또 하나씩 소유했다면 재산과 권세가 어마어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사가 아니라 마치 왕같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사사의 자녀인 일반 백성이 아니라 왕자같습니다.

 

주석서에는 자꾸만 야일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표라고 하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돌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야일은 마치 자기가 왕같습니다. 사사라고해서 부유하란 법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월급도 기업주에 비하여 얼마 안됩니다. 하물며 일반 공무원의 월급은 더 적습니다. 목사와 마찬가지로 공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은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그런 뜻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런 돈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다면 그것도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 해도 삼십개의 성읍을 한 집안이 소유한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권력자의 무차별적인 토지 수탈과 겸병 때문에 이렇게 부유해 진 것 같습니다. 주인이 불명확한 땅도 내꺼, 남의 땅도 트집을 잡아서 내꺼 이런 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확실히 비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자, 그런데 반전이 일어 납니다. 이 사람의 조상 중에서도 야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나라도 요즘 조상땅 찾기 같은걸 하는데 이 사람의 조상 중에서 출애굽 시에 40년간의 광야 방황기를 끝내고 요단을 도하하던 시점에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바산 지방을 점령하여 ‘하봇야일’이라고 이름한 적이 있습니다.

 

‘하봇야일’이란 말은 야일의 고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단으로 고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에 의해서 야일 집안에 주어졌던 땅이었는데 그 땅을 차지하기위해 전쟁을 해서 선주민들을 내쫓고 그곳을 처음 하봇야일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봇야일을 만든 이후에 다시 이방민족에 그 땅을 빼앗겼다가 이번에 그가 사사로 있으면서 다시 그 땅의 이방민족을 쫓아내고 하봇야일을 차지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원래 조상이 제비뽑아 얻은 땅이지만 실제로 이방인들이 그대로 거주해서 쫓아 내지 못한 땅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땅 중에서 ‘하봇 야일’이란 고을이 생긴 것이고 여기에 성을 쌓아서 아들들에게 한 개씩 주었다는 말입니다.

 

원래 야일이란 성읍이 약 60개였답니다. 이중에서 절반을 그의 아들들에게 돌려 준 것입니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계속 이민족들이 거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야일 집안이 아닌 다른 집안에게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제비뽑아 할당해 준 땅은 집안이 존속하는 한 계속해서 전해지는 것이므로 나머지 절반을 이방인들에게서 수복하지 못했다고 보는게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야일은 이름이 계몽자,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이고 그 뜻에 맞게 이방의 땅을 다시 이스라엘의 땅으로 만들고 원래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되찾았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이방의 땅에 빛을 비춘 자가 된 겁니다.

 

원래 하봇야일의 성읍은 말이 성읍이지 마을보다는 조금 더 크고 일반적인 성읍보다는 좀 적은 그런 규모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성한개씩을 차지했다기 보다는 아들의 집안별로 땅을 나누어 준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돈도 많고 세력도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랬으니까 이방민족들과 싸워서 그들을 쫓아 낼 수 있었겠지요. 큰마을의 이장이 되었다는 것으로 받아 들여도 됩니다. 읍장이나 성주같은 그런 직위.
그가 죽어서 ‘가몬’에 장사되었답니다. 가몬은 고지라는 뜻입니다. 산지. 고지대.

 

성경에는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이 사람들은 둘이 합쳐서 무려 45년간을 다스렸습니다. 이 두사람의 시대에 이방민족의 침입이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들이 이스라엘을 잘 다스리고 잘 보호했기에 좋지 못한 일이 없어서 기록이 간단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야일 대에는 이방인들을 쫓아 내고 이스라엘의 강역을 확장하기까지 합니다.

 

성경에서 많은 지면이 할애되고 유명한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암적인 존재였습니다. 그 태생의 화려함과 특권은 그를 오히려 망쳤습니다. 형제간에 권력다툼이 벌어져서 70명의 형제를 죽였고 계속해서 그의 통치권을 확립하기위해 수많은 피를 흘리다가 결국은 한 여인의 맷돌에 맞아서 죽고 맙니다.

 

그러나 돌라는 벌레라는 다소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는 아비멜렉과는 다르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공의가운데 세웠고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야일에게서는 구원하였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크게 위급한 상황은 없었나 봅니다. 성경이 언급하지 않지만 돌라의 공은 매우 큽니다. 아비멜렉의 폭정과 내분으로 자칫 와해될 이스라엘 공동체가 돌라의 노력으로 다시 서게 된 것입니다.

 

권력자와의 끈과 부유한 재력이 우리가 살아나가는데 좋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이 좌절하고 분노합니다. 심지어 더 이상 노예를 생산하기 싫다고 결혼도 애도 낳지 않고 소극적인 저항을 하고 있음도 압니다. 그것도 분석이랍시고 신분상승으로 가는 사다리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신분상승이 뭡니까? 우리가 언제 천민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상승을 하게. 괜히 왕조시대의 고리타분한 용어로 사람 기죽이지 말고 다르게 표현하면 됩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제도적 기회가 없다. 꼭 자극적이지 않은 언어로도 얼마든지 우리네 생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비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비하가 심해봐야 세상에 대한 한탄이나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빠지지 뭐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안 만들어 준다고요? 사다리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므로 그는 나를 위하여 동아줄을 내려 주실 겁니다. 누구 누구의 라인이네 아니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라인입니다.

 

그가 내려 주시는 동아줄이 가장 질기고 굵고 안전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결코 변개치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용기백배해서 나갑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요한1서 5:4“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래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집안의 배경이 재물이 권력자와의 끈이 세상을 이기게 하지 못합니다. 집안의 신앙적 배경이 믿음의 양이 하나님과의 근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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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일까, 개명하는 사람도 많고 하지요. 그래서 돌라 이야기가 무척 신선하고 재밌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아마 돌라 가지고 설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저도 머리털 나고는 처음 듣는 본문이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이름 보다는 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쟤가 나를 뭘로 부르든지 나는 내가 맡은 바를 열심히 해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성경책에도 무려 아무 흠없이 이름이 남게 되었다니 참 멋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력, 권한이라는 것이 정말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한 10년 남짓 동호회를 이끌었던 적이 있었는데, 고백하자면 - 늘 장이 되고 싶어했으며, 어떤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무슨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하고, 마치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되돌아보면, 내 욕심 앞세워 사람들을 귀찮게 했던 것은 아니었나 지금은 그런 반성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동호회 사이즈가 다행히(?) 1/10 로 줄어들어서, 하하, 사람들과의 관계만 연결되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있지요.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으면 감사한 일이다 라는 생각.

 

영화 아메리칸 허슬에 보면 헌신적인 시장 한 명이 나오는데, 늘 공익을 우선시 하고, 일자리를 위하여!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정치를 20년씩이나 했는데, 그러다가 딱 한 번 주인공 사기꾼 일행에게 실수로 뇌물을 받아서 곤란해 지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돌라나 야일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잘 이끌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아 다시는 그러지 않는 것, 그렇게 정직하게 바르게 살아가는 행위가, 비록 세상이 볼 때는 처신이 어리석어 보여도, 옳은 걸음은 주님께서 인정하고 길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오늘도 힘내어 열심히 살아봅시다!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