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마태복음25:31-4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0. 11. 01:39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마태복음25:31-46)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너무 오랫동안 그대로 아무 의심없이 믿어 왔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칼빈의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틀리지 않은게 칼빈이 자기 마음대로 만든 교리가 아니라 성경에 다 내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까지 이 교리를 그대로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믿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구절들이 또한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믿는 걸로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믿는다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하고 다르다는 구절이 보입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주일날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믿는 것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거지요.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말하면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가 믿는 다는 것의 가장 기본적이요 최소한의 행위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와서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비로소 우리가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명령은 따르지 않고 ‘그대로 될 리가 없어’하고 무시한다면 그건 믿는게 아니라 위선이요 가식입니다. 그냥 믿는 척 하는 겁니다.

 

어떤 장로님의 말처럼 이 좋은 시설에 이 좋은 말씀 듣고 그냥 올 수 없으니까 시설이용료? 강연료?를 내고 오는 겁니다. 헌금을 내는 걸 이분은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과거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남들과 교류하기 우해서 그냥 앉아 있어 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는 설교에 대해서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건성입니다.

 

성경은 교회당에서 목사님이 읽을 때 한번 보고 그게 끝입니다. 전혀 자기 영혼의 울림이 없습니다. 물론 그러다가 성령의 조명에 한번 쏘이면, 그분의 빛이 비취면 우리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런 교인들도 필요한 겁니다. 예비신자인 셈입니다.

 

우리가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다 우리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좀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비해 너무 과격하고 너무 엄격하며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원래는 이게 맞을 겁니다. 그 좋은 천국에 그렇게 쉽게 들어간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애써 이런 주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외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일종의 공짜심리가 발동해서 ‘어렵게 믿기 보다는 쉽게 믿자 그래도 똑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더 열심히 믿는 이를 우리는 어쩌면 질투와 귀찮음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광신도로 맹신으로 치부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광신도가 아님에도 나와 다르게 믿고 나보다 더 열심히 믿고 그래서 광신도로 몰아 부쳤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나의 신앙생활이 피곤해 질까봐서 아예 신앙생활을 간소화 시키고 쉽게 만들려고 한 인간들의 그릇된 바람이 여기에 투영된 건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잡하시기 전에 유독 천국에 관한 많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만큼 사랑하는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올 수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인자가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함같이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서 의인은 천국에 악인은 영벌에 처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양과 염소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믿기만 하고 아무런 실천이 없다면 그것으로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실천이 없다는 것은 곧 믿음이 없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할 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는 말씀도 당연히 맞는 말이지만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천국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 지상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이 천국이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이 자기의 공의로 다스리는 나라는 당연하게 천국, 하나님의 나라이고 뭐 우리식으로 지상천국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더 이상 초라하고 숨겨진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으로 또 모든 천사와 함께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부에서 예수니 하나님이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오셨지만 두 번째는 절대로 그렇게 은밀하게 오시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이 다 알도록 천군천사와 함께 영광중에 오시기 때문에 주의 강림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애써서 사람들에게 누가 재림 예수니 하나님이니 하고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상 천국을 만들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악인을 제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국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그의 말을 제대로 실천하며 따르는 자들이 될 것인데 만일 그 중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자기의 일을 더 사랑하고 이기적이며 또한 이웃을 지배하고 착취하고 속이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하게 천국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자들이 모여서 만드는게 바로 천국이라면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지 않고 악한 행동으로 주위사람을 전염시킬 자를 격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양과 염소를 나눈다고 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는 당시 팔레스틴에서 그대로 행해지는 관습을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즉 낮에는 양과 염소가 뒤섞여서 같이 풀을 뜯지만 밤이 되면 양은 양의 우리에 염소는 염소의 우리에 들어가고 이를 나누는 것은 목자입니다. 실제로 최후의 심판 때가 오기까지 신자와 불신자가 뒤섞여서 살지만 그때가 되면 우리 주님은 수많은 인류를 신자와 불신자로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오른편에 악인은 왼편에 서게 할 것입니다. 오른편은 문자 그대로 ‘옳은편’입니다. 왼편은 ‘옳은편이 아닌 곳’입니다. 사실 오른편은 명예롭거나 좋은 편, 그리고 명예와 은총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이 양을 오른편에 서게 하시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명예와 은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정말 주님은 오른편에 선 자들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권세도 주십니다. 단순한 보물이나 돈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지금 주님이 주시는 보상하고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여러분, 그 보상이 보통이 아닙니다.
무려 나라를 상속해 준답니다. 나라를 상속받는 다는 것은 곧 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최후의 심판 때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늘 임금님은 우리에게 지상에서 자기와 함께 나라를 다스릴 왕을 임명합니다. 그것도 자기의 오른편에 선 자 모두를 왕으로 임명합니다. 왕이 너무 많다면 그게 무슨 왕입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은 오른편에 설 자들이 별로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교인들이 대부분 오른편에 선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무슨 왕이 수억에 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버지의 기준에 맞아서 오른편에 서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받을 자들이여’라고 불렀지만 실제로 원문은 ‘복받은 자들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임금의 오른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부터 어느 시점부터 복을 받은 것입니까? 우리가 언제 복을 받았지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희생적인 사랑을 베푼 때부터 우리는 복을 받은 것이고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베풀기를 거절한 때부터 우리는 저주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리의 약한 형제를 보고 그에게 베풀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들 때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는 엄청난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오늘 이 땅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혹시라도 고될지라도 불평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게 되는 것 자체가 큰 은총이요 복이기 때문입니다. 왜냐 오른편에 섰다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받는 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지에 대해서 나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런데 이유를 보기 전에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원문에는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왜냐면’ 이란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겁니다. 왜냐면 ~했기 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뭐 별거 아닌 말 같은데 여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유 없이 보상을 주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뭘 했기 때문에 보상을 주신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정말 곤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었나요? 우리가 도저히 자격이 없는데 베푸셨기에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게 아니었나요? 나라를 상속한다는 말이 결국은 나라의 땅을 상속한다는 말이고 결국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닌가요? 지금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제까지 믿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된게 아닙니다. 원래 처음부터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사실에 눈감고 우리의 구원을 우리 스스로 아주 값싸고 쉽게 만들었던 것 뿐입니다.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자라면 그래서 진정으로 구주의 보혈로 내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이라면 앞서의 여섯가지 일을 하는게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단순한 교인이 아니라 신자라면 단순한 교인이 아니라 성도라면 주께서 열거하신 여섯가지를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한가지 약간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여기서 ‘영접하다’란 말은 우리식으로 ‘손님을 맞이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모아 들이다’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만 맞아 들인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 다니면서 나그네를 적극적으로 찾아서 모아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대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의인들은 길거리 특히 광장 인근을 다니면서 나그네를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와서 대접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건전한 여관이 없는 옛날 노숙은 할 수 없고 혹시라도 자기를 영접하는 자기 있을까 기대하며 마을의 출입광장에 서있는 나그네를 찾아서 데리고 집으로 간 겁니다. 대접하려고.

 

왜냐면 그게 복받는 길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 복덩어리가 복을 받을 수 있는 건수들이 자기가 찾으러 가지 않았음에도 집 앞을 지나니까 너무 감사해서 뛰어나가 영접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말씀드렸쟎습니까?

 

주님의 요구조건을 다 만족하는 일은 엄청 어렵다고. 그러므로 본문에 나와 있는 여섯가지의 일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우연히 소극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쁘게 그리고 열심히 하라는 말입니다.
“형제여 내가 보니까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은데 형제여 나와 함께 기도제목을 내어놓고 기도합시다” 그래야 진심이 실린다고 본 것입니다.

 

하하, 우리 주님은 우리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억지로라도 좋은 일 한번 하려는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평범한 우리로서는 정말이지 크게 용기를 억지로 내어서야 겨우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우리 주님은 억지로 하는건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그런 임금의 말씀이 있자 의인들은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하였나이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모자람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의인들이라고 칭해지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눈에 의롭게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의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적어도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조화를 이루어 결함이 없는 상태 즉 언약을 제대로 이행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언약의 내용이 뭡니까?

 

너희가 나를 섬기면 내가 너희의 안전을 보장한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내가 너희의 구원을 책임진다.
그렇지요. 그게 바로 언약내용입니다. 여기서 섬기고 믿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이 바로 주님을 대접하고 주님을 공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주님 저희들이 언제 주님을 대접했습니까? 우리는 그런 적이 없는데요.”

그래요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주님이 주리고 주님이 목마르고 주님이 나그네 되고 하는 일을 이들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은 자기에게 직접 하지 않고 여기 소자 중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나를 영접하고 공궤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나의 우편에 서서 나라를 상속하게 된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접하는 길은 이 땅에서 우리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당연히 우리도 역시 배려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민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소자는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무가치한 사람, 가장 가난하고 무능한 사람, 가장 허약하고 쓸모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남에게 대접받아도 갚을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위치에 설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준비된 사람만 쓰고 버리는 비정한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는 이에게 주님은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원래 감사를 모르는 그런 후안무치의 인물이 아니라 돈이 없고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대신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자에게 하는 선행이 곧 내 아버지에게 대접하고 섬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점점 우리나라 사람들의 구매력이 떨어 집니다. 그것은 곧 중산층이 사라진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에서는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것밖에 하지 않기에 문화니 학문 같은 것들에 신경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정신이니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가 어렵습니다.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월200미만이라는데 이것 가지고는 요즘 같은 세상에 정상적인 삶을 누리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문화 생활이니 가족들끼리의 외식이니 개인의 취미생활이니 삶의 질같은 것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하루 종일 맞벌이하고 그냥 정신없이 돌아가는 겁니다. 늙어서 직장에서 내몰릴 때까지.
그래서 애도 안낳고 결혼도 안하고 돈도 안쓰고 아니 없어서 못쓰고 그렇게 그렇게 나라가 쇠퇴해지고 공동체가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부익부 빈익빈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냥 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극심합니다. 이 조그마한 땅덩이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기가 찬 일들이 합법의 탈을 쓰고 버젓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 돈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후안무치함이 도를 넘어 섰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두면 공동체 자체가 와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장 평화적으로 보완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입니다.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대접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대접하라’ 이걸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겨라’고 해도 됩니다. 그래요, 우리가 서로 서로 섬기고 대접하고 나누고 보듬는다면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행하지도 않는 명목상의 교인을 만들어서 휘황찬란한 예배당에 앉혀 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록 소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 본문의 표현에 의하면 양떼들이 많아질 때 우리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할 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한국에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상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과 철학으로 그들이 지상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 성공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없이 우리의 힘만으로 지상 천국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본능적으로 악과 친하기 때문에 빛의 세상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우리가 하나님의 선성을 따르려고 한다면 우리 안에 성령의 조명이 비추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씨앗이 발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히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그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갈 리는 없으므로 이 말은 임금의 판결입니다. 판결이 일단 내려지면 천사들이 저들을 지옥 불에 집어 던질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영적인 힌트가 한가지 보입니다. 마귀라는 말은 성경에 ‘디아블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디아블로라는 뜻은 비방 혹은 중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참소자라고 고소자라고 합니다. 어디에 고소할까요? 하나님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범죄가 확실한 일에 우리를 무조건 두둔하기가 곤란해 집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만드신 그 공의의 법을 하나님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절대자의 말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나라의 법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하고 똑 같기 때문입니다. 통치의 영속성을 위해서도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 바로 말이 변하는 겁니다.

 

몸은 예배당에 있어 교인이라고 칭해지지만 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어려운 소자의 고통에 눈감고 그들이 힘들어할 때 외면하며 도움을 주지 않은 것 자체로도 그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어 왼편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우스개 소리로 개털모자, 부끄러운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여기 본문에 의하면 부끄러운 구원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가 소자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주님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하고 같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이들은 실제로는 우리 주님의 형제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형제도 됩니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중립이 아니라 악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질서입니다.

 

우리는 단지 외면하고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악한 일을 한 자와 같다고 보시고 악한이라고 부르시고 왼편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영벌에 들어가도록 판결하십니다. 그러니 믿기만 하면 천국간다고 태평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감당하지 않는 수많은 무늬만 교인들은 크게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44절에 보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주께서 주린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양하지 못했지 만일 보았다면 우리가 공양했을 것입니다” 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주께 공양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종교적인 의무나 구원받을 선행은 했다’는 반박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주리신 것을 내가 못 보았기 때문에 공양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린 것을 본다면 당연하게 주님을 공양할 겁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늘왕국에 계시므로 주님을 이 땅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내 주위에 있는 소자에게 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을 분명히 네가 보았고 그들의 굶주림과 목마름과 병듦과 옥에 갇힘을 보았는데 왜 그들을 외면했느냐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준엄한 책망입니다.

 

주님이 나드 향유 옥합을 바를 때 한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그래요, 그들이 이 땅에 있는 것은 곧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심과 같습니다. 주께서 안 계셔서 좋은 일을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는 것이 저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한 교회에서 교우들 사이에, 형제들 사이에 너무 큰 경제적인 격차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로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한쪽에서는 형제가 배를 곯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형제가 모피를 감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다면 어떻게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할 수 있겠나요.

 

자기네가 보고 있는 형제의 곤궁을 외면하고 밖으로 낯을 내기위해 선교를 한다고, 구제를 한다고, 기부를 한다고 하는 것은 다 위선이요 범죄입니다. 선교와 대외적인 구제와 기부는 당연히 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걸 하기 전에 자기 형제를 먼저 돌보아야 합니다. 형제의 배고픔과 곤궁을 외면하고 대외적으로 돈을 퍼붓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 것에는 큰 어떤 업적같은게 필요한게 아닙니다. 남이 감히 하지 못한 불세출의 위업을 달성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여기에 말씀하셨다시피 그냥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지만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마 오른편에 서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아서 왕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숫자가 매우 적으니까 그게 가능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참 성도가 적은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도 아주 적은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일이 되어서 형제를 만나면 웃으며 문안하기부터 시작해서 십일조의 1/3을 이용해서 형제를 돕는 일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믿음의 분량이 커지는 만큼 우리의 사랑도 자라면 됩니다. 이정도만 해도 우리 주님이 대견해 하실 겁니다. 사랑하라 했는데 증오를 품고 해악을 끼치려고 음모를 꾸미지는 않을테니까요.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기회가 사실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없어서 선행을 하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나에게 되갚아 줄 수 없는 가장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대접하고 공공을 위해서 봉사하고 남을 위해서 배려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머리 둘 곳도 없고 두벌 옷도 가지지 않고 청빈의 삶을 사셨던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천국에 갈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여기 본문에서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방법이 나왔습니다.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약한 자가, 억울해도 호소할 데 없는 자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거할 곳이 없고 옥에 갇히고 할 때 그를 위해 대접하고 공양하고 심지어 가장 적은 선행까지도 기억하셔서 나중에 양들과 염소를 가르는 그 중요한 심판 때 오른편에 서게 하신다는 겁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가른다고 하니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 불에 던져질 자가 거의반반정도? 아니라도 제법 많을 걸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설 자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왜냐면 주님의 기준을 만족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예수믿으면서 믿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역으로 우리에게 구원은 가장 값싼 보상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다 받는걸 보상으로 줍니까?’하고 불평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결코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지상 천국을 이루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이웃을 배려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헛된 욕심을 버리고 대의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로 이 나라를 움직인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우리나라를 지상천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욕심에 취해서 정욕에 취해서 이기적으로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정신없이 행동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눈에 마귀와 그 사자들의 발악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은 결국 이 땅에 지옥을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수도 있고 사탄과 그 졸개들의 나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면 세상엔 온통 악한일이 넘쳐 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의 도를 좇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설 것입니까?

 

지금 당장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을 산다면 조금은 이익으로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그래서 오른편이아니라 왼편에 서게 될 것이고 또 모든이들이 자기만을 위하는 나라에서는 결코 우리의 궁극적인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상천국이란 말도 있지만 인세의 지옥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서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천국은 그런 것입니다. 묵묵히 낮은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위치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그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이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그런 이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너무 부담스럽습니까? 그러면 조금 줄일까요? 적어도 나 때문에 이 땅이 인세의 지옥은 안되도록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별로 잘난것도 없고 사람들 앞에 뛰어나게 우뚝 서지도 못했지만 내가 품고 있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그렇게 그렇게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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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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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 그렇게 짧막하게 쓰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처럼 행동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누면서 살아가도록 노력해보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삶이 주님 오른편에 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매주, 매달 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을 노력해 보기를. 이웃을 직접적으로 도와보기를. 그러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아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 시북. 201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