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벧엘로 올라가자(개정판,창세기35:1-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1. 4. 02:22

 

벧엘로 올라가자(개정판) (창세기35:1-7)

 

사람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편한가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맹세를 마구 합니다. 그런데 그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실 아주 세밀하신 분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자기의 성도들이 자기와 같이 공의롭기를 원하십니다. 거짓말이나 하고 사기나 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어서 맹세하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왜냐면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가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그 맹세를 제대로 이행하나 하지 않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도 무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 십여년 만에 처음 맹세할 때 부터는 삼십여년 만에 비로소 등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킨 겁니다.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 생애 최초로 하나님을 만난 신비의 공간이고 절망 가운데 희망을 맛본 공간입니다. 형의 낯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할 때,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것을 빼앗고 돌아올 기약 없이 외갓집을 향해 도망갈 때 아무런 희망이 없이 광야길을 갈 때 그 절망의 순간에 나타나셔서 그에게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받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이제껏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었던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과연 그 벧엘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가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재산과 처자가 많아 지고 세력이 커졌지만 그는 생활 속에서 그 벧엘의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수십년동안 그는 하나님과 벧엘을 잊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외갓집에서 약 20년 정도를 보냈고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십여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려 30여년만에 벧엘로 약속을 이행하러 가는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는 그동안 그 수십년의 기간동안 벧엘의 돌기둥을 취해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제단을 삼아 하나님에게 제사했던 그 맹세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지만 야곱의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그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가 어려움을 겪고 주위에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지자, 의지할 것이 없어지자 그는 비로소 그 옛날 벧엘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 그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몸은 이 세상과 함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세상사람들과 더불어 거래하고 교류하며 세상의 법과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세상의 풍습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도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완벽하게 성스러운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거룩해 가는 중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성화되지는 못했습니다. 잘생각해 보시면 하나님은 야곱을 이미 십여년 전에 얍복강가에서 이스라엘이라고 고쳐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놓고 오늘 성경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고 여전히 야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볼 때 야곱은 아직까지 이스라엘이지 야곱이 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 도중에 더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세상에서 저지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에서 위로받고 새로운 힘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하나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참으로 필요하지요.

 

적당히 세상에 한발 하나님께 한발 걸치고 그렇게 사는 것에서 나아가 하나님께 한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 아등바등하느라 그런 하나님과 만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을 동안 주위와 격리하고 하나님에게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듭니다.

 

집에 황금을 쌓아 놓지 않은 다음에야 생활인으로서 맡은 책임이 있습니다. 뿐입니까?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고 주부는 살림을 해야 하며 이런저런 맡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격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시간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결단하려고 할 때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야곱이 그렇게나 두려워하며 걱정하던 에서와의 문제가 잘 풀리고 무사히 가나안에 정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의 무리들은 이제 세겜 성의 앞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는 비교적 초목이 많고 물이 풍부해서 유목민들에게는 상당히 좋은 지역이었고 그 세겜 사람들은 야곱에게 친절했습니다. 모든 문제가 잘 풀려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감이 풀려버렸을까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내의 여자들을 구경하러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세겜성의 추장에게 납치를 당해서 그만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야곱은 자기 부족이 세겜의 문화에 동화될까봐서 성내로 들어가지 않고 성밖의 들판에 장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만 디나가 성내로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유목민들에게 성은 항상 동경의 대상입니다. 가나안의 선진 문물을 디나의 눈을 황홀하게 합니다.

 

하란도 발달한 곳이지만 아마 디나의 입장에서는 이제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뜬 시기이기 때문에 매일 보던 양과 가축들에 장막집만 보다가 거대한 성에 아름답게 장식한 건물들 세련된 여인들을 보고 멋진 남자들을 보고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깊이 깊이 성내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과 쾌락을 줄만한 것들이 보암직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안에 살면서도 세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한 자들을 교회라고 하듯이 우리가 세상속에서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세겜성을 다스리는 족장 세겜은 자기 부족민의 딸은 묻지 않고 취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독재자입니다. ‘이 성내의 여자는 모두 내꺼’ 하는 아주 황당한 인물입니다.

 

아무개의 딸이겠거니 하고 그냥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취했는데 알고 보니 이 여자가 야곱의 딸입니다. 야곱은 족장일 뿐만 아니라 인근에 살고 있는 이삭과 에서라고 하는 대족장의 아들이요 동생입니다. 야곱의 딸을 손에 넣으면 야곱의 세력을 손에 넣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세겜은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곱의 딸과 결혼하려고 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많았답니다.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들을 정착시켜서 자기네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기위해 혼인으로 동맹을 맺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의 청혼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자기의 누이가 세겜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결코 기쁘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겜에게는 이미 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청혼은 폭행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청혼이 결코 야곱의 아들들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추장인 세겜을 죽일 뿐만 아니라 세겜성의 모든 것을 진멸하고 처자를 노예로 삼고 가축과 곡식과 재물을 약탈할 악랄한 계획을 세우고 거짓으로 ‘너희가 할례를 받으면 우리가 너희가 함께 하겠다’고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겁니다.

 

야곱의 집안은 원래 그런 집안입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은 형 에서에 비해 여러 가지가 모자라는 위인입니다. 약하면서도 악하고 야비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를 즐겨합니다. 위급하면 매달려서 온갖 좋은 소리는 다하지만 위급한 상황이 지나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드냐는 듯이 시침을 떼고 자기의 일에 매달립니다.

 

그래서 야곱을 보면 화가 납니다. 인성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런데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런데 야곱을 욕할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야곱이 오늘날의 우리입니다. 내얘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허탈합니다. 야곱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마 비슷할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성경의 기본 원리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설마 여러분에게 그런 정도를 요구하겠습니까? 만일 오늘날같이 악한 세상에서 그런 원리를 실천하려 했다가는 신자들은 하루도 안돼서 만신창이가 되고 말겁니다.

 

그러나 보복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상대적으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겜이 잘못했는데 그 주민들이 무슨 죄입니까? 디나뿐만 아니라 야곱의 아들들 역시 세겜의 문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런 계획을 세운 겁니다. ‘저 탐스런 것들을 다 뺏들어야 겠다’ 명분도 생겼겠다 그들이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한사람의 죄로 성내의 모든 이들이 죽고 노예가 된다면 너무 끔찍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목민들에게 이런 식의 보복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하게 양이나 치고 있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약탈하고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특별히 악해서라기보다는 당시의 풍습에 젖어 있어서 이러한 악행이 전혀 과하게 여겨지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법의 구속을 받고 비교적 양심적으로 행동하려 하지만 틈만 나면 내속에 욕망들이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탐욕에 굴복하여 욕심을 냅니다. 그것이 어리석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죄를 짓기도 하고 죄를 지을 기회가 없어서 미수에 그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세상의 습관으로는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절대로 경계하고 억눌러야 할 죄성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너희와 우리가 서로 혼인하고 인척이 되고 서로 통교하고 함께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당시의 근동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하고는 상관없이 할례를 받는 풍속이 제법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세겜의 입장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시가 아니라 그냥 뭔가 동족이 된다는 입장으로 받아 들였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을 포기하고 다른 신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결정입니다. 아마 그런 의미였다면 세겜이나 세겜의 주민들은 야곱의 아들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할례가 뭔지는 아시겠고 마취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생살을 찢는 그 고통은 어마어마합니다. 이게 신체의 다른 부위하고 달라서 쉽게 아물 수가 없습니다. 계속 사용해야 하므로 그래서 붕대로 감아서 치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여하튼 이 할례를 받게 되면 엄청나게 아프고 거동이 불편해 집니다. 보통은 삼일째에 그 고통이 가장 심해진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거짓말에 속은 세겜과 그 주민들이 할례를 받고 한참 고통스러워 앓고 있을 때 디나와 같은 엄마를 둔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서 세겜성을 기습하고 약탈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벌하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모세의 십계명이 나오기 전이기는 하지만 이런 원칙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서 상대방을 속이는데 이 할례를 이용합니다.

물론 할례의 의미가 당시에 꼭 히브리인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이미 할례가 어느 정도는 중동 지역에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겜 사람들은 ‘까짓거 한번 해주지 뭐’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세겜 사람들이 전부 할례를 받으면서 까지 야곱의 일족과 함께하려고 했느냐면 야곱의 재력을 노리고 한 것입니다. 세겜성은 가나안에서 비교적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부유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세겜성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겜 사람들은 야곱의 일파가 완전히 자기의 부족민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할례 한번 받고 재산과 사람을 취한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야곱의 일족이 자기 부족이 된다면 자기네 세력이 더 커지니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겜은 자기 개인적인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또 자기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주민들을 회유하려 했고 주민들은 야곱의 사람이나 재물이 탐나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야곱이나 세겜이나 세겜의 주민들이 모두 악당입니다. 서로 인간적인 이해관계와 정욕대로 행동합니다. 할례를 이런 더러운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저들을 진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의도로 사용하기 위해 할례를 받은 이들은 모두 죽었고 처자와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할례를 하면 동족이 되겠다고 속인 자들은 멸족의 위기 앞에서 거주지를 떠나 벧엘로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됩니다.

야곱은 이때까지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요. 이 사람의 삶은 실로 위기의 연속인데도 자그마한 평화가 오면 어김없이 하나님을 잊고 세상과 짝하다가 위기를 당하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딱 현대인의 전형입니다.

 

위기가 닥쳐오면 정신없이 하나님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번 한번만 살려 주시면 제가 어떻게 하고 뭘 드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하고........하면서 뉘우치며 새사람이 되는 듯 하지만 그 위기가 지나가고 나면 또 마찬가집니다. 그러면서 가는게 인생인가 봅니다. 야곱의 일생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집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야곱이 그 옛날 형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야곱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약속을 이행하셨지만 야곱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지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야곱은 그 일을 잊고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그게 언제적 얘긴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라고 그 당시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온갖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가고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싹 바뀝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그 약속을 지키라고 촉구하십니다.

 

야곱은 다시금 위기의 순간을 맞고서야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할 마음이 생긴 겁니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지 무려 십 몇 년 만에 위기를 당하고서야 비로소 야곱은 자기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약속한 이후로 무려 삼십여년이 흘렀습니다. 너무 늦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십여년 전에 얍복강가에서 야곱에게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너를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에서 그는 야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전히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곱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남을 속이는 사기꾼이고 마침내 하나님까지 속이는 사기꾼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서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전에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야곱입니다.

 

그는 실로 이스라엘로 불릴 만큼 신앙으로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과 더불어 피곤한 싸움을 세상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 합니다. 그의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더 이상은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야곱은 적당히 세상 속에서 살기를 원했지만 여건이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와 그 집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비로소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 속에 있는 이교적 요소를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드라빔부터 여러 가지 점치는 도구들을 장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부족민들은 가나안의 이교적 풍습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한 저들이 벧엘로 올라가봐야 헛수고입니다. 그래서 야곱과 그 일족은 이교의 모든 풍습과 물품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파묻어 버립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사실 이걸 파괴하고 녹인게 아니라 파묻었다는게 찝찝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야곱은 이게 어디에 있는지 알테니까 언젠가 육신이 편안해지면 다시 와서 몰래 파내서 이교의 풍속을 좇을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겁니다. 그러면 꼭 사단이 납니다.

 

야곱은 이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 야곱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자기 할아버지의 하나님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불렀지 결코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하면서 그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하나님이 과연 내 가족의 하나님, 내 부모의 하나님, 내 할아버지 할머니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나의 일생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위기의 순간만 모면하려고 임시방편으로 하나님을 찾지 말고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그런 이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벧엘에서 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나의 하나님, 그 옛날 내가 고독하고 의지할이 없어 어려울 때 나와 함께 하신 내 일생의 보호와 인도가 되신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위기의 순간에 함께하시며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하나님과 한편인 믿음의 용사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이런 벧엘이 하나쯤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평소에는 몰라도 위기의 순간에 의지할 벧엘이 있다는 것을 엄청난 축복입니다. 내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내 하나님에게 아뢸 수 있는 그리고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바로 그런 벧엘 같은 곳을 가진 우리는 사실 행복한 자들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 벧엘은 커녕 아무런 의지할 곳이 없어 자살하는 이가 하루에 몇 명입니까?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보다 우리나라에서 자살해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이들에게 벧엘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이들에게 우리 함께 벧엘로 올라가자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이들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을 너도 만날 수 있다고 권유해 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 불쌍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주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에 치이고 세사에 찢어진 마음이 위로받는 그 벧엘에 그들과 함께 가고 싶지 않습니까? 설마 나 혼자만의 벧엘로 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아무도 갈 수 없어’라고 생각지는 않으시겠지요?

 

벧엘을 소유한 우리는 행복한 이들입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각자의 벧엘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벧엘이란 게 돈도 되고 빽도 되고 배경도 되고 권력도 되고 이러면 그건 벧엘이 아니라 허망한 집착입니다. 그건 우리네 삶에 궁극적으로 해결책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기위해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아뢰십시다. 평소에는 까맣게 잊고 있지만 언제나 우리 마음의 고향이며 내가 하나님을 만난 그 벧엘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벧엘로 올라갑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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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벧엘이 있는 삶, 피난처 되시는 주님에 대해서 조용히 묵상해 봅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이 아끼시는 (?) 원고인지라, 라디오 방송설교에서 원고 분량이 늘어난 버전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불리지 않는 것을 보면, 참 사람의 마음은 끈질기기도 하고, 하나님의 바람대로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삶을 깨끗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기란, 사실은 그렇게나 힘들고 눈부신 일입니다. 말은 참 쉬운데...

 

늘 욕심이 앞서나가지요. 내 이기심은 남들 모르게 합리화 해버리기 간단하고, 또한 손해보는 것은 참 싫고, 그러다보니 자꾸 내 것, 내 것만 생각나는 겁니다. 저도 착한 사람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내 것 내 것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마다 다짐합니다. 나의 소유 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보자, 사람들과의 행복한 경험을 추구하며 살아가자. 대우 받는 것 좀 그만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더 큰 사람이 되어보자. 이것도 말 뿐이지만, 이렇게라도 다짐해 놓아야, 조금씩 제 정신이 드는 것 같습니다.

 

벧엘을 기억할 수 있기를.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늘 불필요한 것들을 버릴 줄 아는 담대함이 있기를. 그런 멋진 성도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