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온유함으로 세상을 이긴다(창세기26:1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1. 4. 02:54

 

온유함으로 세상을 이긴다 (창세기26:12-)

 

온유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일이 가능할까요?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항상 평안과 기쁨 그리고 웃는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은 이익을 위해서 웃음 짓던 사람들도 자기의 만원 한장 이익을 위해서 안면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제가 너무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지 모르겠지만 생존이라는 현실 앞에서도 예의를 유지하고 배려심을 유지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벌떼처럼 달려 들어서 싸우려고 합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면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합니다. 뭐 그렇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웃음을 짓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

 

아무에게나 웃음 짓는 사람은 사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본심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사람이 항상 웃을 수만 있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화만 낼 수도 없습니다.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이고 이것도 못마땅하고 저것도 못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일마다 나가서 시시비를 가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싸움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무관심을 가장한 무표정입니다. 외국인들이 본 한국인은 모두 무표정이랍니다. 이게 심하면 마치 골이 나서 뚱한 표정처럼 보인답니다. 그래도 차라지 이게 낫습니다. 가식적인 것 보다는.

물론 그래도 웃은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하, 아니 도대체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자, 이런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백만원에 해당하는 손해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 위해 이만원 어치 과일을 사가지고 웃으면서 손해를 전가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래도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을까요? 일방적으로 이해를 강요하고 희생을 강요해도 웃을 수 있을까요?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까 당신이 이해하시오” 하면서 퇴직을 시키는데도 “그럴 수도 있지요, 회사가 어려우면 당연히 제가 그만둬야죠”라고 하면서 흔쾌히 웃으면서 그만두는 사람이 있을까요? “당신은 부양할 처자가 있으니까 그만두면 안되고 난 혼자사는 몸이니까 내가 그만두지” 하면서 웃으면서 희생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내 이익이 침해 받으면 결코 가만있지 않겠다. 어때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미국에 어떤 학자가 연구를 했습니다. 무슨 연구인고 하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수록, 사람들의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더 무례하다는 연구입니다.

 

그래서 대도시일수록 사람들이 더 각박하답니다. 그래서 인구가 많은 곳에서 사람들, 사이가 더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이에 비례해서 무례하답니다. 우리나라의 인구 밀도는 세계 3위입니다. 그래서 더 무례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연구가 필요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입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운 곳에 무슨 예의염치가 있겠습니까? 생존경쟁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가는 굶어 죽을 판인데 그렇지 않다면 사회의 루저가 될 판인데 남들은 옆사람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는데 혼자서 뒤쳐져서 고고하게 있으면 굶어 죽기 딱 알맞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고 먹을게 적으면 서로 싸우며 무례해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온유함으로 세상을 이긴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정말 희한한 이야기가 많지요? 그러나 이건 사실입니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온유함으로 그가 세상을 이겨내었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는지를 살펴봅시다.

 

이삭이 살때에 그 땅에 대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블레셋의 그랄로 이주를 했습니다. 75년전에 대 기근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도 이주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살면서 가뭄을 이겼기에 가뭄만 들면 그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라고 해서 드디어 이삭이 새롭게 이주한 그랄땅에서 농사를 시작합니다. 원래 히브리인들은 유목민입니다. 그래서 농사라고는 지어 보지 않았습니다. 농사는 원래 땅이 있어야 하고 그 땅에서 곡식이 자랄 때까지 정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풀을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유목민에게는 땅이니 농사니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땅은 여기서 블레셋의 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방의 땅이란 말이고 이삭이 그 땅에서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옛날에 텃세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26장 1절에서 이삭의 때에 다시 대기근이 닥친 사실이 나옵니다. 그래서 흉년이 되어서 이삭은 자기의 거처를 떠나 이웃 블레셋으로 이주합니다. 아브라함때에 닥쳤던 흉년같은 큰 흉년이 닥쳤기에 도저히 그 땅에서 견딜 수 없어서 보다 풍요롭고 물 사정이 나은 블레셋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지금 이삭은 이방의 땅에서 나그네로 있기에 매사에 텃세에 시달리고 원주민인 블레셋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입장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유목만 하다가 갑자기 농사를 짓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농사가 쉬워 보여도 유목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잘 되는게 말이 안됩니다.

 

이삭은 여기서 농사와 유목을 동시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삭이 그해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서 무려 백배의 소출을 거두었답니다. 백배나 거두었다니 좀 과장이 심한 것 같습니다. 무슨 농사에 백배가 있습니까? 그냥 두배 정도 많아야 세배?

 

그런데 여기서 백배란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오해할 수는 있습니다. 원래 한 알의 씨앗이 뿌려지면 이삭하나에 적어도 스물이나 스물다섯정도의 낱알이 달립니다. 그러니까 백배라고 하면 평년 수확의 네배 정도를 말합니다. 대풍이기는 하지만 어이가 없거나 터무니 없는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문학적인 표현으로 백배는 최고 최대의 수익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꼭 숫자상의 백배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대풍을 거두는 것은 농사짓는 이들의 꿈이랄 수 있습니다. 흉년을 맞이하여 블레셋에 온 이방인들이 자기들보다 더 농사를 잘 짓자 셈이 납니다. 이건 마치 우리네의 부를 빼앗긴 듯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텃세가 시작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이 본토인들보다 잘살면 질투가 나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비옥한 땅이라고 해도 중동전역이 기근을 당했는데 이삭만 대풍이니 더 화가 나는 겁니다. 더구나 상대는 농사에는 초보입니다. 베테랑인 자기들도 못 이룬 일들을 쉽게 해내는 히브리인들을 보고 본토민들이 화가 난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다곤신을 섬기는 자기들보다 잘되기에 블레셋 거민들이 여호와를 섬기자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민족 정체성의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한술 더 뜹니다. 마침내 이삭이 하나님의 복으로 거부가 되었답니다. 이삭은 거부인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삭뿐만 아니라 아들이 여럿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첫 아들인 이스마엘도 있고 후처인 그두라의 후손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두라의 후손은 적어도 아들만 여섯입니다. 딸은 제하고. 딸들도 재산상속을 받지 않았지만 시집갈 때 지참금은 많이 챙겨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때의 그 부를 이삭이 단독으로 상속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형제들에게도 재산이 많이 나누어 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재산이 많이 줄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삭은 대기근을 맞이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답니다. 남들은 살기 어려워지는데 오히려 이삭은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거부가 되었답니다.

 

14절에 보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단순히 농사만 잘된게 아닙니다. 유목도 잘되고 종도 많아 졌답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이 볼 때 이삭의 세력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만큼 커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네에게 흡수되지 않고 자기네를 위협하는 거대 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농사면 농사 목축이면 목축 그리고 사람까지 점점 강성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삭이 거부가 된 비결중 하나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래요 하나님이 해 주셔야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수 있습니다. 아니 자기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허락하셔야만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답니다. 여기 창대와 왕성을 합치면 부유한 상태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매해마다 하는 일마다 소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가축의 수도 늘어나고 함께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삭이 부유해 진다는 게 말이 안됩니다. 그는 살기가 어려워서 흉년을 피해서 그랄로 이주한 이주민입니다. 그런데 처음 손댄 농사에서도 그들의 주업인 목축에서도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농사나 목축에는 물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물이 없는 기근의 상태입니다. 비록 블레셋이 비옥한 지역, 물이 비교적 풍부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계속해서 부유해 졌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종이 많아 진 것은 그 부를 지킬 병사도 많아 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당시의 종은 단순한 종이 아니라 사병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집에서 기르는 사병들이 있었고 이들을 데리고 전쟁에 참여했는데 이제 이삭에게도 그런 병사들이 많아 진 겁니다.

 

이렇게 되자 원주민들이 시기해서 이삭을 훼방을 놓습니다. 뭐냐면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파 놓은 우물들을 다 메워 버렸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 사촌은 이웃사촌입니다. 이삭이 거부가 되기 전에는 블레셋의 왕이 이삭을 보호하라는 명령까지 내립니다. 아마 포섭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11절에 보면 블레셋의 그랄 지역 왕이 이삭을 가리켜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그랬는데 이삭이 거부가 되자 원주민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해서 실력 행사에 들어간 겁니다. 아무리 이삭의 종이 많다고 해도 블레셋 사람들보다 많지 못합니다. 그래서 강제로 아브라함이 판 우물들을 메워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우물은 우리가 말하는 우물하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우물, 물이 땅에서 펑펑 솟아나는 그런 우물이 아니라 지하에 판 물구덩이를 말하는 겁니다. 요셉을 우물에 던졌다는 말도 바로 이 물구덩이에 가두었다는 말입니다. 물 저장창고.

 

왜냐면 그 동네에서 물을 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우물이라고 해도 건기에는 말라 버립니다. 하천도 건기에는 말라버리고 우기에만 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물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으면 증발해 버립니다. 그래서 지하 물구덩이를 만들어서 물을 저장해 두어야 비가 오지 않을 때에도 물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물구덩이가 있는 그 땅을 아브라함이 구입했기 때문에 이삭의 소유가 당연합니다.

 

그랬으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없애버리려고 우물을 메워버린 겁니다. 지금 블레셋인들이 이삭의 우물을 메워버린 것은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물이 없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짐승들에게 마시게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 땅에서 떠나라는 말입니다.

 

과거 75년 전에 아브라함 역시 그랄에서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물을 많이 팠고 그 우물의 값을 아브라함이 지불했기 때문에  우물을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이 소유할 수 있는데도 블레셋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우물들을 다 메워버렸습니다. 이건 솔직히 다수의 횡포지요. 몇 개는 남겨두고 메운게 아니라 빠짐없이 우물을 메워버렸기 때문에 이삭으로서는 정말 곤란했을 겁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그 땅에서 떠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물이 없으면 뻔히 죽은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이삭과 한판 하자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판은 전쟁을 말합니다. 소수의 이삭 부족이 다수의 원주민들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아비멜렉, 블레셋의 왕을 ‘아비멜렉’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임금님이란 말과 같습니다. 이 블레셋의 왕이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이 왕의 말은 좀 과장이 섞인 겁니다.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데 어떻게 시비를 겁니까? 그렇지는 않고 이제 블레셋사람들의 눈에도 이삭 부족이 강해졌다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아비멜렉이 이삭의 그랄 거주를 도와 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때는 이삭이 비교적 약했기 때문에 이삭 부족을 받아 들여서 왕의 세력을 넓히는 개념으로 생각했지만 이제 이삭부족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에 잘못하면 블레셋의 그랄 지역을 이삭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일이 많았답니다. 유목부족을 자기 나라에 정착시켜서 자기 세력으로 삼는 일이 많았고 이삭도 그런 부족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자기 땅에 정착하도록 도운 겁니다. 자기나라 백성을 삼으려고.

 

그러나 이삭이 너무 거부가 되고 세력이 커지고 계속해서 양과 소가 늘어나고 잘못하면 왕자리를 빼앗기고 이삭이 그랄의 왕이 되고 자기네들은 종이 되거나 아니면 쫓겨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태도를 바꾼 겁니다.

 

사실상 세상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력이 약할 때는 우리를 이용하려 하지만 ,왜냐면 어차피 놔둬도 고분고분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성도들의 세력이 커지면 세상은 혹시라도 세상의 법칙이 바뀌고 성도들이 권세를 잡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살 때 정말 책잡히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므로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혹시라도 자기들의 죄악된 태도가, 어둠의 습속이 빛으로 바뀔 수 밖에 없을까봐 두려워 하는 겁니다. 죄가 밝음에 드러나니까 그게 두려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죄를 짓고 어둠의 습속에 젖어 든다면 세상은 우리를 두려워하거나 배척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지경에 이르면 그건 성도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요즘 목사나 신자들의 범죄사실이 계속해서 신문언론에 오르내립니다.

 

같은 목사로서 정말 부끄럽고 그런 사람을 목사로 모시는 교회 때문에 화가 납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에 대해 완벽한 도덕적 우위를 항상 주장할 수 있도록 근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하나님의 복주심이 훼방을 받지 않을 겁니다.

 

일단 아비멜렉이 ‘너희가 크게 강성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보면 충분히 그랄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기회에 한번 전쟁을 해서 우물이 누구의 것인지 자웅을 겨룰 만도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삭은 전쟁을 택하기보다 그랄 땅에서 철수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세상에 주인 없는 땅이 있을까요? 그래서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옮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골짜기는 비가 오면 하천바닥이 되는 곳을 말합니다. 와디, 건천. 우기에는 비가 흐르는 하천이 되고 건기에는 도로로 이용되는 곳입니다. 굳이 골짜기라고 표현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물이 흐르면서 아무래도 지형이 아래로 들어가니까.

 

이삭이 그랄 골짜기로 철수했는데 이는 사실 그랄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랄 골짜기. 게다가 농사 짓는 사람들은 여기에 살 수가 없습니다. 우기에는 농작물이 물에 떠내려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부족은 유목을 주로 하니까 비가내리는 우기에는 옮기면 되니까 여기에 터를 잡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농사는 어떻게 할 겁니까? 결국 이 이주는 이삭에게 큰 손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전쟁보다는 이주를 택했습니다.

 

예전에 아브라함도 여기에서 산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여기에 옛날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이삭이 도로 팠습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도로 메워버렸는데 이제 이삭이 그걸 도로 판 겁니다. 사실 물만 생각하면 하천부지에 장막을 치고 우거한 건 아주 현명한 선택입니다.

 

와디의 밑인 땅밑에 물이 고여 있을 확률이 높고 아무래도 물이 여기가 가장 늦게 마르기 때문입니다. 물이 흐르면서 땅속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에 파면 물도 나올 수 있고. 단지 농사는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우기에 농작물이 물에 떠내려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없이 비어 있는 거고 그래서 이삭이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삭의 양보로 시련이 끝난게 아닙니다. 19절에 보면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서 새로운 우물을 파서 샘 근원을 얻었답니다. 이게 바로 우리식의 우물입니다. 물이 펑펑 쏟아지는 우물을 새로 얻은 겁니다. 아마 하천바닥이니까 물이 지하에 고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수맥이 발견된 거지요. 이게 문제가 됩니다. 아시다시피 물구덩이하고 우물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물은 엄청나게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게되자 그랄의 목자들이 이게 탐이나서 뺏들려고 또 시비를 겁니다.

 

원문에는 그랄 목자들과 다툼이 있었다는데 이 ‘다툼’이란 말은 단순한 시비가 아니라 폭력을 동반한 무력투쟁을 말합니다. 그랄 목자란 말은 그랄 주민을 말하기 보다는 아비멜렉의 종들, 부하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이삭이 판 우물을 자기들 것이라고 폭력으로 빼앗아 갔습니다. 이삭은 이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 하고는 양보한 것 같습니다. 뺏겼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에섹’의 이름 뜻은 다툼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이 단어 에섹에는 ‘억압받고 무례하게 취급당하고 끝내는 강탈당했음’이란 뜻이 있습니다.

 

자기네 땅에서 떠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골짜기 하천바닥까지 따라와서 시비를 거는 겁니다. 이삭의 인내를 시험하는 거지요. 이삭은 제가 봐도 참 호구입니다. 무골호인이랄 수도 있습니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충분히 그랄 사람과도 한번 자웅을 겨룰 만도 한데 이삭은 이번에도 양보를 합니다.

 

두 번째 우물을 팠는데 또 자기네 것이라고 뺏들려고 덤빕니다. 그래서 주어 버렸습니다. 뺏긴 거지요. 그리고 이삭은 이 우물의 이름을 ‘싯나’라고 지었습니다. 싯나는 사탄과 어근이 같습니다. 에섹보다 더 강조된 뜻입니다. 마치 악마처럼 적의를 가지고 자기들 것을 빼앗았다는 말입니다. 이삭은 이번에도 양보하고 인내합니다. 왕호구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 이삭은 자존심도 없는지.

 

이삭은 거기서 옮겨서 또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멀어서 그랄 목자들이 따라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비가 없이 마침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이 우물을 ‘르호봇’이라 했답니다. 르호봇은 ‘여유있는 지역’ ‘넉넉한 공간’이란 뜻입니다. 이 우물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답니다, 아마 이전보다 더 수량이 풍부한 우물이었던 모양입니다.

 

계속해서 이삭은 고백합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지경을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라” 농사짓던 그랄 땅에서 쫓겨나서 농부들이 살기 어려운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복구했는데 이것도 뺏기고 거기서 옮겨서 에섹과 싯나라는 우물, 물구덩이가 아니라 정말 우물도 팠는데 뺏기고

 

마침내 세 번째로 우물을 파서 여기에 장막을 치고 이삭은 이제 여호와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바란 겁니다. 여기에서 인구가 급격하게 늘고 먹을 것도 풍족해 지고 그래서 세력이 더 커지기를 바란 겁니다. ‘번성’이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복주심을 감사한 것입니다.

이삭은 끝끝내 싸우지 않고 인내하고 양보함으로 평화를 지켰고 마침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제대로 된 우물을 발견하고 여기에 터를 잡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삭의 행동을 요즘에 우리가 따라하면 밥 굶어 죽기 딱 좋습니다. 척박한 땅으로 쫓겨났으면 그곳에서 뭔가 느낀게 있어야 될 터인데 이 사람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평화의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호구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바보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그 사람의 인물 됨됨이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고는 그냥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믿음의 족장이라고 생각하고 멋진 모습의 당당한 족장을 연상하고 넘어 갑니다. 그러나 이삭은 기록에 의하면 체격이 약간 왜소하다고 합니다. 아내 리브가는 엄청난 글래머(?)입니다. 그러니까 엄청 뚱뚱하고 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네는 뚱뚱할수록 미인이었답니다. 힘도 장삽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의 아내는 모두 세명입니다. 자기의 아버지.
야곱의 아내는 네명입니다. 자기 아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부다처제가 일상화된 옛날 그것도 한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 아내가 한명밖에 없다는게 이상하지 않나요?
아버지와 아들이 다 여러명의 아내가 있는데 자기만 혼자입니다. 이 사람이 일부일처제 신봉자라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아마 이삭이 공처가이고 리브가에게 꽉잡혀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자다운 아들 에서를 더 좋아했다는 겁니다. 나는 저러지 못했기에 아들이라도 좀 기 펴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야곱은 자기를 닮아서 너무 얌전하고 여성스러워서 싫어한 거지요.

 

게다가 이 사람은 체력도 약해서 말년에는 눈이 실명해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아내가 감히 남편이자 족장인 이삭을 속이려고 마음먹은 것 자체가 리브가가 보기에 남편이 우습게 보여서 그런 겁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로 봐서 이런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이삭의 부족에서는 버젓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저런걸 보면 이 사람은 천성적으로 얌전하고 싸움보다 평화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휘하에 수많은 병사들이 있는데 웬만하면 우물을 계속해서 뺏기면 참지 못하고 전쟁에 들어갔을 터인데도 이 사람은 끝까지 우물을 양보하고 점점 멀리 점점 척박한 땅으로 물러 갑니다. 그렇게 우습게 보이니까 아비멜렉의 종들이 점점 더 무례하게 구는 겁니다.

 

참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마 리브가의 성질상 한번 하자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참았더니 결국 이삭은 큰 인명피해 없이 아름다운 우물을 소유하고 더 부자가 되고 세력이 커집니다. 사실 잘 참은 겁니다. 비록 그랄 사람들이 볼 때는 이삭이 위협적이라고 해도 전체 블레셋 사람들이 떼로 모아 덤벼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나중에 아들 야곱이 세겜을 쳤다가 사람들의 공분을 사서 원주민들이 모여서 쳐들어 올까봐서 벧엘로 도망간 사건도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법이란게 없습니다. 그냥 죽고 뺏고 하는게 일상입니다. 이때 세력이 약한 이방 부족이 원주민들과 싸워서 이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잘 참은 겁니다.

우리가 세상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득세한 곳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이때 우리가 저들과 세상의 법으로 시시비비를 가린다면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먼저 하나님께 호소하고 두 번째로 법에 호소합니다. 그런데 법은 세상의 편입니다. 저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성도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세상, 공의가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전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전파가 결국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만 참석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성도로 세우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공의로 다스려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전도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냥 우리도 화를 내고 대적하고 싸울 수 있습니다. 당장은 속이 편하고 후련해 질 수 있어도 후환이 무궁무진합니다. 싸우는 것이 당장은 속 시원해도 미래가 어둡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인내하고 참고 양보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겁니다.

 

‘인내하고 양보했으면 되었지 사랑까지 나는 절대 못한다’ 예, 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기를 죽이기까지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자기의 사랑을 본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을 용서해도 죄를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정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아무 벌도 받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죄를 저지를 터인데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그냥 눈물 한번 쏟고 ‘잘못했습니다’ 한번 고백하면 되는 그런 값싼 용서가 아닙니다. 그런 말로만의 회개가 아닙니다. 주님은 죄와 벌에 대해서 상당히 엄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본능상 죄를 도말하고 싶어서 돌진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버지 앞에 서지 못하는 겁니다.

 

이삭이 체질상 얌전하고 왜소하며 소극적인 사람이어서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성격인데도 하나님의 법을 따라 양보하고 물러서서 평화를 유지했는지는 솔직히 우리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참았습니다. 도저히 인내할 수 없음에도 인내했고 호구소리 들을 정도로 양보하고 물러서서 결국은 평화를 지켜내었고 번영도 이룩했습니다. 온유함으로 세상을 이긴 겁니다.

 

나중에 보면 아비멜렉이 오히려 군대장관하고 같이 이삭을 찾아 와서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들이 그렇게나 못되게 굴었기 때문에 이삭이 강성한 세력으로 자기나라에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해서 미리 조약을 맺자고 찾아 온 겁니다. 한 국가와 조약을 맺을 정도로 이삭의 세력이 커진 겁니다. 이만하면 이긴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법을 의지하고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의 성도를 결코 무시하거나 잊어 버리지 않고 결국은 승리하게 하십니다. 지는 것 같은데 결국은 이기게 하십니다. 물러서고 양보하고 뺏기고 그래도 참고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놀라운 복으로 인근이 두려워 떨 정도의 큰 세력이 된 것입니다. 한 집안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한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 처럼 아부하고 뇌물을 주고 뭔가 뒷 공작을 꾸미고 음모를 획책하고 하는데 익숙지 못합니다. 당장 사업할 때 여자들이 시중을 드는 룸살롬에서 뭔가 접대를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합니다. 그들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이차도 가고 삼차도 가도 불법도 저질러야 하는데 그게 안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법으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법은 저들편입니다. 저들에게 아부하고 엎드려야 하는데 그게 안됩니다.

 

주일날 교회 가는 대신에 산으로 들로 저들과 어울려야 하는데 그게 안됩니다. 적당히 속이고 적당히 얼렁뚱땅 넘어가고 뒤통수도 때리고 해야 하는데 그게 안됩니다. 우리는 너무 정직합니다. 약아빠져야 할 때 약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세상은 호구라 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이 대신 다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배경이 없고 인맥도 없고 돈도 없어서 눈물 납니까? 더 큰 힘이 되시는 아버지를 의지하십시오. 성도에게 가장 큰 특혜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 특권을 사용하십시오.

 

우리 아버지께서 결코 모른다 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의 법칙대로 온갖 모략에 음모를 꾸미고 한다고 해서 결코 끝도 좋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나오는 온갖 비리들 추문들이 그렇게 생긴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추문이나 비리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손을 떠난 하나님의 역사기 때문에 그걸 단죄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공무원 시험강의하시는 분인데 그 학생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하느냐? 실력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빽이 좋은 사람이 더 출세한다. 그런데 그 사람을 앞서는게 있는데 그게 바로 운 좋은 사람이랍니다.

 

아무리 배경이 좋고 실력이 좋아도 운좋은 사람한테는 안된답니다. 그가 말하는 운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 역사하심입니다. 그러니까 결코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 붙잡고 나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는 장면을 똑똑히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은 속이 쓰립니다. 호구같습니다. 사람들은 바보니 뭐니 하면서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그의 방식대로 이 세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최후의 궁극적인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조급해 하거나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정하신, 성도가 승리하는 때가 머지않아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양보함으로 참음으로 인내함으로 지는 것을 오히려 이기고 승리하고 거부가 되고 거대한 나라가 되고 영화로운 성도가 됩니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런 멋진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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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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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이 설교가 너무 마음에 쏘옥 듭니다. 예전에 저는 일하던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를 친구보고 대신 하라며 비워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까지 바보처럼 인생을 살면 안 된다고 경고등을 켰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친구는, 일을 하면서 급히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기에, 그런 뻔한 사정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제 그 친구는 더 좋게 직업을 다시 가졌고, 생활비를 걱정하는 단계에서 약간은 벗어나게 되었네요. 안심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기는 빈 시간 동안에,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즐겁게 살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적은 돈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법을 배운 것만 같아서 의미도 있고 좋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곧 결혼하는 친구 녀석 한 명이 와서, 있다가 결혼 하고 철물점 차리면 같이 일이나 해볼래 라고 권유 합니다. 일당을 넉넉히 15만원씩 쳐준다고 합니다. 웬걸!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런 것을 볼 때면, 정말 세상은 운 좋은 사람이 막강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이런 일은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말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더 이상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그것보다는 사람 사이의 인연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돈과는 상관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꿈꿨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더 많이에 집중할 때, 저는 더 행복해 지는 비법을 알고 싶어했지요. 그 중에 하나가 시간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들을 계속해서 소중하게 사용하면서, 좋은 경험들을 많이 이루어 가고 싶습니다. 책도 꾸준히 많이 읽어보면서 괜한 돈 욕심 내기 보다는, 오늘이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 될 수 있기를!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