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다(요한복음9: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1. 28. 04:32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다 (요한복음9:1-)

 

오늘은 우리 주님이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는 기사를 살펴봅니다. 사실상 우리 주님이 병자를 고친 많은 이적들이 있기에 이 기사가 별로 색 다를게 없습니다. 아, 또 한사람 병이 나았구나!
그걸로 끝입니까? 여기에 몇가지 약간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뭡니까?

 

날 때부터 맹인이되었다? 음, 보통은 그렇지 않나요?
진흙을 발랐다가 그걸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했다? 예, 그건 좀 특이합니다.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낫게 하실 수 있는데 왜 더럽게 진흙을 눈에 발랐다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지 그래요.

 

제자들이 누구 죄 때문인지 서로 토론했다? 예, 제자들도 보면 참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서러운데 누구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되었는지 그딴 소리나 하고. 그래요, 상당히 특이합니다.

 

이것 때문에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다?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공교롭게도 안식일에 많이 일어납니다. 한쪽 손 마른자의 손을 낫게 한 것도 그래서 문제가 되었지요. 그래서 별로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려니 하지요.
더 이상 없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맹인을 회유해서 예수 때문에 나은게 아니라고 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오늘 본문의 뒤편에 그런 시도가 있습니다. 그래요, 특이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항상 주님을 걸고 넘어지려고 각종 궤변을 늘어 놓은 이들이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합니까? 그래요, 좋습니다.

 

예, 이쯤하면 대강 다 살펴본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이게 가장 걸립니다. 뭐냐면 고쳐달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고쳐 주신 것이 걸립니다. 믿음은 간절히 바라는 것일진대 이 사람은 전혀 간절히 바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얼떨떨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자기를 보고는 예수와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 사람이 맹인이 되었느냐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눈을 고침 받았으니 그보다 더한 복은 없는 거지만 정말로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요한복음의 기사는 예수님이 신성을 가졌다는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7가지 표적중의 하나입니다. 왜냐면 이사야나 출애굽기 그리고 시편에 보면 메시야가 오셔서 하는 일의 대표적인게 앞을 보지 못하는 이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경을 낫게 한 것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는 능력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게 간절히 소원하지 않았음에도 병이 낫는 상황이 있음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지요?

 

내가 그렇게 기도해도 안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전혀 기도도 하지 않고 소원도 하지 않는 이에게 이런 큰 이적을 베푸시니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설교를 진행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모든 병이나 재앙이 죄 때문에 온다는 생각은 절대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난 역시 죄 때문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생각입니다. 더구나 가난뱅이라는 말은 절대로 맞지 않습니다. 부자와 가난뱅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부자와 빈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이렇게 불러야 됩니다.

 

먼저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아마 주님은 예루살렘성내의 어떤 길을 걷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맹인을 보았는데 ‘보신지라’는 말은 우연히 눈에 띄었다는 말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우연히 눈에 보인게 아니라 주가 적극적으로 자세히 그를 보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쉬임 없이, 길을 열심히 가다가도 도움이 필요한 이를 찾아서 사랑의 눈으로 보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나도 역시,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는 나도 역시 보시고 먼저 나의 고민과 염려를 해결해 주시려고 하실 것이니 기도하면서 기다립시다. 머지 않아서 우리의 고민과 염려가 해결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렇게 되어 지이다.

 

길가의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한 첫 번째 반응은 맹인으로 난 것이 ‘뉘 죄 때문입니까?’ 제자들 정말 참 엉뚱합니다. 아니 맹인이 된 것도 서러운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맹인이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다니!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적으로 그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벌로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죄가 있어서 아프고 죄가 있어서 가난하고 죄가 있어서 일이 안되고 주로 이런 식입니다.

 

바로 이어서 “자기 오니이까 그 부모 오니이까?”
맹인 아들을 낳은 것만 해도 서럽고 슬픈데 이제는 죄까지 뒤집어 쓸 판입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난리가 날겁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말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장애인의 부모들은 더 서럽지요.

여기서의 죄는 하나님의 법과 도덕적인 법을 어김으로 잘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꼭 법률을 위반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더 자세하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왜 이렇게 부모의 죄까지 들먹이게 되었느냐면 유대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태아가 되는 순간부터 악의 영향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된다는 학설을 주장했고 또 일반인들 역시 죄가,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상속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본인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가지고 다툰 겁니다.

 

욥기에서도 나오지만 절대로 병이나 장애가 또는 가난이나 실패가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지 그걸 가지고 함부로 우리가 죄를 지었을 걸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걸로 속단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여하튼 제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당시 유대인들이 하던 그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물어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이 이 병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제가 출세하지 못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런 이상한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은 “네가 출세하지 못한 것은 너의 죄도 너의 부모의 죄도 아니라 너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니라”

 

다 자기 탓이 아니라 부모탓을 하고 있지요? 빽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금수저가 아니라서 이렇게 부모 탓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며 지금 내가 할 수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루 하루 힘차게 살다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임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기가 좀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라고 잘못된 그 무리들은 지금 벌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크게 받겠지요. 그러므로 너무 하나님의 공의를 불신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그렇게 믿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일에 나는 최선을 다할 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결코 없을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이 사람의 눈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바꾸어 버립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에 대한 관심을 그만두게 만드신 것입니다. 과거 지향적이지요. 과거에 무슨일이 있었나?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의 관심을 그 사람의 존재목적이라는 것으로 옮겨버립니다.

 

이 사람은 과연 어떤 목적 때문에 소경이 된 것인가? 과연 그는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가? 미래 지향적이 된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이 맹인을 보면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느는게 있습니다. 껄껄......걸걸이라고 하지요. 후회.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그때 뭐뭐 했을걸. 이랬을 걸 저랬을 걸. 우리가 항상 하는 후회이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간 일을 곱씹으면 뭐합니까? 앞으로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잘하면 되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심력을 소모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데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물론 완전히 같은 상황이 다시 올지는 모르겠습니다. 항상 상황은 비슷하지만 똑 같지는 않지요?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점점 더 나아지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험에서 배우고 더 지혜로운 판단을 이후에 하면 됩니다.

 

자, 그럼 하나님은 과연 그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시기를 원한 것일까요?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계시를 그를 통하여 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성경에서 메시야가 오셨을 때의 표징이라고. 그래요,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함으로써 주님이 바로 메시야라는 것을 보이도록 이 사람의 장애를 이용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이란 말은 ‘고치는 것이 불가능한’ 이란 말과 통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의도하지 않게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선정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징표인 7대 기적’을 선정한데 들어간 겁니다. 온몸으로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나타내 보이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의 존재목적입니다. 좀 심하게 말해 볼까요? 그는 그 자리에서 그날 예수를 만나서 고침받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신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산증인이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 겁니다. 말도 안된다, 그가 너무 불쌍하다. 그의 인생은 누가 보상하냐?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의 부모가 생존해 있고 바리새인들이 부모에게 회유와 협박을 하는 것을 보면 눈뜬 그 사람의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이전까지의 삶이 구차했던 만큼 그의 이후의 삶은 더 극적으로 빛날 겁니다. 무려 기적의 산증인이니까 그만큼 주위에서 신기해 하고 인정도 받을 겁니다.

 

날 때부터 맹인되었다는 것은 정말 불쌍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통하여 고침을 받고 눈을 뜨게 되자 그는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온몸으로 증명한 기적의 중심인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산증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많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가 우리의 인생에 들어서시면 우리는 가장 극적인 반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믿고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루 하루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는 주께서 그 사랑의 주께서 내 앞을 지나다가 나를 보시고 나의 이 상황에 개입하시고 고쳐주시고 반전을 주실 겁니다. 그 이후의 영광은 이전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을만큼 굉장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지금 주님은 낮이기 때문에 일해야 된다고 하셨지만 더 중요한 말은 이어서 나옵니다.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일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 밤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실 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입장에선 놀 시간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지는 않지만 유한한 존재이므로 일할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기서 일이 꼭 돈을 버는 일만은 아닙니다. 너무 돈돈 거리면 인생이 비참해 집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를 넘어서면 주위도 한번 둘러보세요. 남도 한번 돌아보세요.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제가 요즘 보니까 큰 부자가 되면 감옥에 갈 확률이 엄청나게 올라갑디다. 그러므로 너무 큰 부자 말고 적당히 가족들이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가까운 사람이나 가족들을 도울 정도가 되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식주에 문화비도 조금, 여행도 외식도 조금씩 할 정도 되면 더 걱정할 게 없지 않을까요?

 

제가 너무 많이 바랍니까? 아니면 우리 성도들의 기대에 너무 미치지 못하는 복입니까? 그날 그날 내일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 주님의 뜻을 한번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행복이 너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맹인이 눈을 뜨면 광명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그 맹인에게는 예수가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자신을 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빛, 이건 지금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지금의 사람들은 영적인 맹인들입니다.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합니다. 보기는 봐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뭘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생각 없이 살고 말합니다. 되는대로. 그게 딱 지금의 상황과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한 개 한 개 작은 촛불들이 모여서 세상을 밝히는 거대하고 찬란한 빛이 되는 겁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광경은 솔직히 당혹스럽습니다. 평소에 말씀으로 치료하기를 즐겨하신 주님은 어째서인지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침에, 아말라제에 치료성분이 있나요? 아니면 진흙이 그래 좋다는데 이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데 즉효입니까? 황토의 정기가 눈에도 즉효입니까? 아니면 실로암의 물이 수질이 좋아서 안질 치료에 탁월합니까? 조선의 왕들은 안질을 치료하기위해 온천을 찾았다는데 혹시 실로암 못의 물이 온천일까요?

 

자, 이 부분에서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병 낫기를 위해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는 일이 있었답니다. 당시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흙을 바른 것을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겁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 실제로 남의 침으로 이갠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그걸 또 앞 못보는 사람에게 실로암 못까지 가서 씻게 한 것은 매우 큰 결단이자 난관입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낫기를 간절히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떨결에 눈이 치료되었다고. 바로 그겁니다. 이제 주님은 이 사람에게 진정으로 눈을 치료하고자하는 욕망이 있는지, 이것이 더러운 침과 진흙을 눈에 바르고 연못으로 씻으러 갈 정도로 간절한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요, 이렇게 본다면 주님은 간절히 간구하지 않는 이에게는 결코 기적을 베풀지 않습니다. 그냥 가다가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소위 말하는 횡재수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일은 항상 이유가 있습니다.

 

그 모든 더러움과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그는 기적을 맛볼 자경이 없는 것입니다. ‘고쳐 줄려면 주고 말라면 말아라, 그리고 제발 피곤하게 하지 말아라’ 이렇게 된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참고로 아말라제와 진흙에는 그리고 실로암 못의 물에는 눈을 뜨게 할 치료성분이 전혀 없습니다. 약알칼리성의 온천도 아니고 게르마늄 흙도 아닙니다.

 

그리고 씻으라는 말은 단 한번만 씻으라고 하신 겁니다. 일곱 번이나 열두번을 씻으라고 하신게 아니라 그냥 가서 씻으라는 겁니다. 눈을 뜨게 하는 것치고는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뭔가 좀 그럴듯해 보이고 시행하기가 어렵고 얻기가 어려운 물건이 필요하고 그랬다면 아마 사람들은 더 믿을겁니다. 그런데 사안이 어려운데 반해 처방이 너무 간단하면 오히려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안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신을 이겨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인 것이지요.

 

우리 생각에는 그럴듯한 의식과 고난의 여러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눈이 뜨여질 것 같은데 주님의 처방은 사실 너무 간단해서 그리고 너무 지저분해서 오히려 사기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령에 대한 순종 여부이지 그 의식의 장엄함과 복잡함이 아닙니다. 사람들이야 복잡하면 할수록 장엄하면 할수록 더 효험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식의 제사를 더 의지합니다.

 

오늘날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천주교의 미사가 개신교의 예배보다 훨씬 더 엄숙하고 거룩하게 보여서 뭔가 미사에만 참석해도 내가 정화받는 그리고 거룩해 지는 느낌을 받아서 천주교에 나간다고 했다는데 그 사람들의 생각이 전혀 틀린겁니다. 앉았다 일어섰다가 반복되고 외우고 소리내고 하는 것들 머리에 뒤집어 쓰고 하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그런 관념을 탈피시키기위해 주님은 낮은 곳에 임하셨고 검소한 옷차림에 간단한 의식으로 대부분의 경우에는 단순히 말씀으로 치료하신 것입니다.
번쩍이는 비단옷에 금 십자가를 걸고 금은으로 수를 놓은 띠를 띠고 금향로를 흔들며 연기를 내뿜어도 결국 그것이 사람의 눈을 현혹할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죄사함과 치병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하고는 더 더욱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순종하는가의 여부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뭔가 예수님의 이 처방에 특별한 의미가 있거나 효능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거 그대로 따라하게 되면 잘못해서 여러 사람 잡을 수 있습니다.

 

평생에 눈 한번 떠보지 못한 자가 이 간단한 처방으로 눈이 치유된다는 말에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는게 바로 이 맹인의 간절함에 대한 반증입니다. 그는 눈뜨는 것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비웃어도, 무시해도 될법한 이 우스꽝스럽고 더러운 그리고 곤란한 명령에 아무런 불평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한 것입니다.

 

‘이에 가서 씻고 왔더라’는 말은 예수님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가서 순종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답니다. 아마 이 사람이 그 진흙을 물에 씻어내는 순간 눈이 보여서 빛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자 순종하는 순간 바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즉시 일어납니다. 아무런 지체없이 순종하자 아무런 지체없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는 말이 괄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비록 괄호 안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적어 넣은게 아닙니다. 요한이 적었습니다. 요한은 예루살렘의 지리를 잘 모르는 이방인을 위해서 실로암에 대한 해설을 적어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이 해설이 의미심장합니다.

 

‘실로암’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지요? 주님 역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실로암에 가서 씻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자에게 가면 영의 눈을 뜨게 되고 광명을 되찾고 새로운 빛을 찾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실로암 못은 히스기야 때에 만든 수로, 기혼 샘으로부터 물을 끌어 오려는 수로의 물이 티로폰 계곡을 흘러 남쪽 끝에 와서 실로암까지 이르러 못이 되었답니다.

 

자, 눈을 뜬 맹인을 본 사람들은 갑론을박합니다. 아무래도 눈을 뜨니까 좀 달라 보일 법도 합니다. 8절에 보면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예수님으로 인해서 눈을 뜨게 된 이 사람은 오랫동안 앉아서 구걸을 했던 모양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장애인들은 주로 생계를 위해서 구걸을 했는데 아마 이 사람 역시 그랬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계를 위해서 아무것도 달리 하지 못하고 단지 앉아서 구걸만 하던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는 것도 포함합니다. 경제적인 안정 역시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재산도 없고 별다른 기술도 없고 심지어 힘쓰는 것마저 할 수 없었던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자리에 앉아서 남의 자비에 기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더라도 이 사람들에게는 사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전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도 못하는데요.

 

하루 빌어 하루먹는 죽지 못해 사는 이들에게 정의니 공의니 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들은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의 병을 고쳐주는 일을 중요하게 수행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두고 그 사람이 맞느니 아니니 하고 논란하는 와중에 그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그로라. 그런데 이 말은 원문으로 보면 정말 놀랄만한 말입니다. 이 말은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로라’는 말과 ‘나는 나다’는 말은 어감상 느낌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사실 이 말은 ‘에고 에이미’ 이 말은 우리 주님이 매우 즐겨 사용하시던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밝힐 때 사용하신 말이기도 합니다.

 

제일 먼저 시내산 떨기나무 불꽃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누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합니까? 스스로 있는 자가 보냈다고 해라” 이때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라는 말이 쓰였고 물론 구약시대니까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지요.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빠질 위기에 처했을 때 주여 뉘십니까라고 묻자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 이 말은  ‘모세에게 나타났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맹인이었던 자 역시 ‘에고 에이미’라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놀라운 충격에 전율하게 됩니다.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

 

우리 주님은 여기 한 소경의 눈을 고치시고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 메시야이며 또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자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함을 온몸으로 증거합니다.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음을 나타내는 산증인이 됩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에게는 이 불가능이 너무 많은 듯이 보이는 세상에서, 이 불확실성이 너무 많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가장 확실하며 세상을 확실하게 또한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삶을 바꾸고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며 새로운 삶을 약속하시는 분이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의 보아 주심을 바라고 그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그가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어서 속히 오셔서 나를 도우소서.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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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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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오늘은 소박한 광고로 교회 소식을 전합니다. 교회가 작게나마 건물을 임대하여 예배처소를 얻게 되었고, 교회명칭도 정관누리교회로 변경되었습니다. 의자가 지금 한 30개 정도 있는데, 언젠가 작은 교회가 가득하게 될 그 날을 꿈꾸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전도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교회 의미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그 꿈들이 이루어 지는 것을 바랍니다.

 

주님께서 맹인도 고칠 수 있는데, 오늘날 우리의 기도소리를 듣고, 한 사람을 더 보내주시고, 그들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또한 바랍니다. 지금은 작은 개척교회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해서 목소리를 전하며, 설교말씀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한 주, 한 주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