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일곱딸이 있었더니(출애굽기2:1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2. 9. 02:13

 

일곱딸이 있었더니 (출애굽기2:16-)

 

오늘 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 모세의 일대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모세의 일대기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 직전의 시기입니다.

 

본국에서의 혁명 시도가 실패하고 미디안 광야로 피신와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시절을 그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그것보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에게 찾아 오시게 된 것일까요? 아무도 찾지 않는 모세를 더구나 말까지 더듬고 애굽의 국사범으로 수배중인 사람을 왜 하나님은 그 오랜 후에 찾아 오신 것일까요?
애굽의 왕자의 신분에 있을 때, 어머니 하셉수트의 권력의 그늘아래 있을 그때 훨씬 쉽게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이룰 수 있을 때는 잠잠하시다가 모든게 끝난시점에 왜 찾아 오셨지요?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 분이니까 그렇다 합시다. 그런데 여기 보면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어 결혼을 시켰답니다. 도대체 모세의 장인은 모세의 어디를 보고 그에게 딸을 주었을까요?

 

그를 성경은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이교의 제사장이란 말입니다.
한편 모세는 아무런 재산도 명성도 없고 대화 자체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말을 더듬는 모세와 대화를 한다는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고대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매우 키가 크고 어머니 하셉수트를 따라 이디오피아 원정에도 참가한 유능한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아마 생긴 것도 그럴듯하게 생겼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하셉수트가 그를 나일에서 건졌을 때 그를 버리지 못하고 아들로 삼아 키웠겠지요. 물론 나일에서 건진 아이는 신의 선물이라는 속설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아이가 못생겼다면 아마 하셉수트가 모세를 양자로 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권력을 후궁의 아들에게 빼앗긴 하셉수트에게 모세는 다시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꿈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학문에 능했고 강했으며 매력적인 사내였습니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하고 미디안 광야로 피신한 이후 그는 아무런 재산도 없고 직업도 없으며 기술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요즘 말로 백수였습니다. 그는 평생 양을 쳐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요즘말로 하면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재주 없는 신참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가 애굽에서 미디안으로 도망갈 때 나이가 40이었지요. 그렇다면 백수에다 노총각인 셈입니다. 무일푼의 노총각 백수가 미디안 제사장의 눈에 들어 그 딸과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요즘 같으면 이런 사람은 결혼도 못합니다. 무일푼의 노총각 백수에게 누가 딸을 주겠습니까?

 

요즘 우리나라에서 아마 딸이 좋아라 해서 결혼상대로 이런 총각을 데리고 오면 부모가 결사반대를 할 겁니다. 잘 쓰는 말이 있쟎아요. “내눈에 뭐가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하는 말. 그 정도로 모세는 요즘 선 시장에선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 물질위주 조건위주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모세가 장가를 갈 수 있어던 데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1.양떼에게 물먹이는 것을 도우다
르우엘에게 일곱딸이 있었는데 아마 르우엘에게는 아들이 없었던지 이 딸들이 양을 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딸들은 매우 열심히 일합니다. 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우물로 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양떼에게 먹이려 했답니다. 그런데 본문은 어떤 식으로 기술하고 있느냐면  “그리고 그녀들은 왔다. 그리고 그녀들은 물을 길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채웠다” 이렇게 그리고를 사용해서 문장을 연결하는 것은 이들이 매우 급하게 그리고 쉼없이 일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참,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어쩌고 저쩌고가 여기에는 없습니다. 남자들만큼 열심히 일합니다.

 

자, 구유에 물을 채우고 막 자기네 양떼에 물을 먹이려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그냥 쫓았다는 게 아니라 무지막지하게 거칠게 쫓아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막의 목자들의 횡포를 나타내는 겁니다.

 

사실 사막에서 물이 귀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 우물은 사실은 물구덩이고 이 물구덩이 안에 물을 채워놓습니다. 퍼도 퍼도 물이 새롭게 솟아나는 그런 우리나라의 우물이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물을 퍼쓰게 되면 물의 양이 줄어 듭니다. 그런데 이 물구덩이는 거대한 돌로 입구를 막아 놓습니다. 그래서 여러명이 힘을 합쳐야 비로소 돌을 치우고 물을 퍼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물근처에는 많은 목자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에 왈패같은 자들이 르우엘의 딸들을 보고 여자만 있기에 만만하게 여겨서 이들을 몰아 내고 자기네들이 물을 마시려고 합니다. 딸들만을 쫓아 내려고 한게 아니라 양떼까지 거칠게 내몹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모세가 일어나 그 왈패들을 두들겨 쫓아내고 르우엘의 딸들을 도와 양떼에게 물을 먹이게 한 겁니다.

 

우리는 지금 단순하게 ‘두들겨 쫓아내고’처럼 정제된 언어 비교적 순화된 용어를 사용하지만 아마 야만의 시대에 사막에서 가축에게 물을 먹이려는 목자들은 거의 준 강도들일 수 있습니다. 유목민 자체가 평소에는 유목을 하다가 틈틈이 강도짓을 해서 먹고 사는 일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거칠고 험악한 상황에서 르우엘의 딸들을 구출한 것일 겁니다.

 

모세가 비록 애굽에서 쫓겨나 사막으로 와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의 의협심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고 약한 자들을위해 발벗고 나서는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큰 인생의 실패를 맛보기는 했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은 변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게 그에게 미디안의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한 겁니다. 가난한 노총각 백수가 의협심 때문에 점수를 한점 땄습니다.

 

2.르우엘이 모세를 데리고 오게 하다
모세의 도움으로 불량배를 물리치고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일찍 집으로 돌아온 딸들에게 르우엘이 묻습니다.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 르우엘은 ‘전능자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엘 신의 친구’라는 뜻이지요. ‘엘로힘’할 때의 그 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일러 엘 솻다이, 엘 엘룐처럼 엘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지역에서 엘 이란 신은 모든 신들중의 최고신으로 여겨졌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알의 아버지로 여겨졌답니다. 그러니까 그 엘을 섬긴 제사장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만 보면 하나님의 친구가 나타나서 모세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애굽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에서, 사막에서 그는 위로를 얻게될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한 안식을 얻게 될 모양입니다.

 

르우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드로’와 동일인물입니다. 고대 중동에서 두 개 이상의 이름을 가지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호밥이라고 모세의 처남이 있답니다. 딸들이 양을 쳤지만 아들도 어딘가에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딸들은 양을 치는데 아들을 중히 여겨서 일도 안하고 금이야 옥이야 했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딸들이 양을 칠 때에 아들은 뭐했는지는 알 필요가 없어서 안 적었을 뿐이지 전혀 남녀차별이나 남존여비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물음에 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미디안에서 이드로의 딸들을 만난 것은 애굽에서 도주해와서 초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드로의 딸들이 봤을 때 모세는 셈족들처럼 머리를 기르지도 않고 짧게 깎았을 뿐만 아니라 애굽어를 사용하고 왕자의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애굽사람으로 오인한 것입니다.

 

딸들이 말하는 모세의 고마운 점은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불량배들의 손에서 딸들을 구해준겁니다. 두 번째는 거기에다 우물에서 물까지 길어서 양떼를 먹인겁니다. 원문의 표현으로는 이드로의 딸들은 특별히 모세가 자기들의 양떼를 위하여 물을 길어서 마시게 한 것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사는 것을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십니다. 모세는 지금 자신이 도망자의 신세로 애굽에서 왕자의 자리에서 졸지에 국사범으로 내어 쫓겼고 지금은 비록 도망자의 신제지만 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일에 결코 거리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처지에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 오지랖이 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간 겁니다.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 드넓은 사막을 건너서 미디안광야까지 왔을 때는 정말 크나큰 고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미디안광야까지 걸어서 40일이 걸린답니다. 모세는 지금 자기의 자긍심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평소의 습관대로 의기를 가지고 세상의 불의한 일에 간섭하고 판결하고 실력으로 약자들을 도운 겁니다.

 

이드로는 말합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이드로는 딸들에게 왜 그 사람을 초대하지 않고 혼자서 왔느냐고 혼을 냅니다. 아마 그 딸들은 자기들이 여자인관계로 낯선 남정네는 자기들마음대로 집으로 불러 들이는 것을 꺼린듯하지만 이들의 말투 속에는 모세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이 넘치게 흐로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딸들은 기꺼이 모세를 집으로 초대해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음식을 대접한 겁니다. 중동지역의 유목민들은 매우 순박한 듯이 보이지만 때로는 매우 배타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일단 음식을 함께하게 되면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한 식탁에서 식사했기 때문에 친구로 여깁니다. 그래서 아무리 배타적인 부족이라고 함께 식사를 했다면 자연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친구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르우엘은 모세를 초대해서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모세의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고자 한 것입니다.

 

3.모세가 함께하는 것을 기뻐하다
그래서 모세는 이드로의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고 잘 대접받았으며 아마 이 자리에서 모세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모세는 미디안의 이드로집안과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런 식사 초대는 우리식의 간단한 식사가 아닙니다. 나름대로 만찬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손대접한 것들을 보면 대강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전혀 은혜를 입지 않는 순수한 손님일뿐인데도 그렇게 잘 대접했는데 은혜를 입은 은인에게 하는 대접은 얼마나 성대했겠습니까? 여하튼 이드로는 성대하게 손님을 대접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애굽에서 도주하여 집도 없고 친구도 없는 모세의 입장에서 이드로와 그 딸들의 제안은 매우 고마운 것입니다. 바로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모세는 애굽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막건너 시내산부근에서 모세를 위하여 새로운 가족과 안식처와 직장을 마련해 놓고 계셨습니다.

 

모세는 힘껏 평소하던대로 약자를 도우고 약자를 괴롭히는 불량배를 혼내주고 딱한 자에게 친절을 베풀었는데 애굽에서는 살인자가 되어 쫓기게 되었고 이 미디안에서는 그는 누군가의 은인이 되어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행동이나 품성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애굽에서는 아주 질이 낮은 사람을 만났고 미디안에서는 현명하고 사려깊은 이를 만난 차이입니다.

 

모세도 이드로의 제안을 좋아했고 그래서 르우엘의 딸들 중에서 결국 십보라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십보라는 작은새라는 뜻을 가진 여인입니다. 아마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잘하고 모세에게 큰 위안을 주는 그런 여인이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이 십보라는 매우 현명하고 남편의 사역에 헌신적인 여인이었습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잃고 사막을 건넜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뜻하지 않게 위로와 안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잘생겼다? 글쎄요, 안봐서 무효입니다. 모세가 똑똑하다? 글쎄 그게 사막의 유목민에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모르겠습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이가 아닐진대 아무래도 일솜씨가 좋은게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모세는 정작 말도 더듬고 나이도 많고 가난한 백수 노총각일 따름인데 하나님은 그의 의롭고 선한 품성을 제대로 갚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어떤 일을 이루려 노력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노력이 헛되이 바라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좌절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올바르고 그 수단이 올바르다면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를 그냥 좌절과 실패의 상태로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모세에게는 그 바라던 일, 히브리동족의 해방이라는 그 거대한 일을 이룰 때가 아직 덜 된 것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때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무려 40년간을 준비하고 난 연후에에 하나님은 원래 모세가 하고자 하던 일을 하게 하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 사이에 모세가 뭘했을까요? 장인의 양을 치면서 한편으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길을 파악하고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어디에 물이 있는지 어디에 쉴 수 있는 장소가 있는지 어디에 맹수와 독충이 많은지 이방부족들의 출몰지역은 어디인지 적의 취약점은 어디인지를 파악하게 된 것입니다.

 

잠깐 여기서 모세의 일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세는 무려 40년간을 미디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렸습니다. 물론 그는 그 사이에 본연의 직업에 충실했습니다. 목자, 그것도 남의 양을 치는 삯꾼 목자, 삯꾼이라고 하니 어감이 이상합니다. 그냥 월급쟁이 목자라고 합시다. 그거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결국 하나님이 일하고 있는 모세를 부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꿈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다면 결코 그 꿈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더 최상의 상태에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이 완전히 무르익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4.아들을 낳아 게르솜이라 하다
모세는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했습니다. 게르솜은 성경에 나와 있는대로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결혼하고 정착하여 아들까지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미디안사람이 아니라 히브리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정체성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애굽의 왕자로 있으면서도 동족을 생각한 모세는 이제 미디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히브리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안심하고 히브리민족의 탈출이라는 거대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오랜 투쟁과 방황으로 실의에 빠져 모든 꿈을 접고 평범한 미디안의 목자로 살아가기를 했다면 아마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 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열악한 여건하에서도 안락한 삶속에서도 처음 먹었던 마음을 잊지 않고 초심을 유지했기에 마침내 40년이 지나서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출세하지 못했다고 안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룬것도 없이 세월만 지난 것 같지요? 그래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결코 중단하지 않고 꿈을 꾸고 나아갈 수만 있다면 내 하나님은 결코 나를 외면치 않으실 것입니다.

 

참고로 결혼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까요? 가진게 없어서 학벌이 짧아서 직장이 시원챦아서 몸에 장애가 있어서 현재 신분이 불안정해서 기타 등등 참으로 많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사랑이란건 한번 해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즉시 곧바로 들어 주시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들어 주시지 않고 더 인내하고 기다리게 하실지라도 우리가 기다릴 수 있도록 충분한 여건을 허락하십니다. 너무 힘들어서 좌절해서 아예 일어 나지 못할 정도로 만들거나 아예 마음을 접고 딴길로 가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예정속에 들어왔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없을 리가 없습니다.

 

모세는 십보라와 결혼하고 미디안의 제사장을 장인으로 모시고 장인의 양을 치면서 무려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물론 애굽에서 미디안으로 오자마자 결혼을 했는지 한 몇 년 정도 지나서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모세를 잊어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그에게 안식과 위로를 주셨고 그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도록 여건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세에게 주어진 것은 모세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 히브리족의 해방자와 같은 멋진 타이틀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미디안 광야의 월급쟁이 목자, 삯꾼 목자로서의 삶을 허락하신겁니다. 너무 별롭니까?

 

그러나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서 사막에서 목이 말라 배가 고파 굶주려 죽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강도를 만나서 객사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는 그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서 미디안족의 보호를 받으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정하신때인 40년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 오셔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너무 마음이 섭섭하고 답답합니까? 나이가 벌써 30을 넘어 40을 바라봅니까? 아니 이미 40도 넘었습니까? 그럼에도 뚜렷하게 내세울게 없이 세월만 지난 것 같습니까?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섭리를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이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믿고 또 그의 섭리를 믿는다면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과함께 미래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결코 그는 나를 섭섭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나를 향하신 긍휼과 섭리를 믿습니다. 모두 그 섭리와 사랑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즐겁고 기쁘게 생활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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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번 설교는 평소와 다르게 마무리 부분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메일 전송 상에 문제가 잠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이해를 하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메일 내용을 그대로 옮겨 싣습니다. 저는 이 설교가 참 마음에 쏙 듭니다. 사람은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또한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종종 사람의 계획대로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인도, 주님의 은혜, 주님의 돌보심을 기도하고, 요청하며, 한편으로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꿈을 가진 채 말이에요. 근래에 저는 1만 시간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열독하고 있는데,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 운 좋게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 신화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그동안의 수 많은 연습이 누적되어 있었고, 힘들더라도 안주하지 않는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최정상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커다란 자극제가 되어줍니다. 이쯤 왔다고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더 분발해야 하는구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평소 성격이 느린 것을 좋아하는 터라, 매주 설교를 금요일이나 되어서야 올릴 때 많은데, 좀 빠릿빠릿 하게 움직이도록 생각을 고쳐먹고, 마음씨를 분발하게 만들려고 노력 중입니다. 더욱 일상을 열심히 노력하는 인생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 더 멋진 내일을 만듭시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꿈들을 응원합니다. 할 수 있는데까지는 꼭 해보기, 가보기,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면서 삽시다! / 2016. 12. 시북.

 

추신 - 설교 뒷부분 내용을 이제 정상적으로 추가하였습니다. 2016-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