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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갈라디아서5:25-6: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2. 9. 03:29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갈라디아서5:25-6:2)

 

요즘 우리나라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의 원인이 대통령 한사람에게만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촛불 민심은 대통령으로 대변되어서 나타나는 거지만 실제로는 우리사회에 이제까지 쌓여왔던 구조적 모순들이 드디어 터져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보면 우리나라도 그 사이에 몇 번인가의 혁명이 있기는 했습니다. 멀리는 4.19혁명에서 가까이는 10월 민주항쟁까지 있기는 했는데 이러한 혁명들은 모두 미완의 혁명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이제 분출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통령 한사람만 바꾸면 사회가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각계각층에 쌓인 적폐들을 해소할 후속 조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정치는 삼륜데 사람들은 일류라는 말을 했는데 이건 우리가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삼류 정치꾼들을 뽑은 사람들 역시 삼류입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 국민과 동떨어진 저질 정치꾼들이 갑자기 뜬금없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 국민들이 그 정도니까 그 정도의 정치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릇 인간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자기들끼리만 존재하고 운영되는 사회는 당초 의도했든 안했든 심각한 모순과 실수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사회는 항상 하나님의 감시와 감독 하에 있어야 하고 이것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와 기독교인, 즉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이 사회의 밝은 등불이 되어서 어둠을 몰아내고 소금이 되어서 썩음을 방지하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그 말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우리 역시 한명의 생활인에 불과하고 그래서 결국은 그 거대한 파도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해야 떠내려가지 않고 그나마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총체적인 난국이 오게 된 것입니다. 권력에 맞서서 억울하고 힘없는 이를 보호하고 진리를 가지고 부정과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한게 아니라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권세와 부에 타협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목소리는 사회에 대해 아무런 반향도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교회만이 성령받은 표시라고 믿고 대형교회의 목사가 하는 소리는 뭐든지 다 맞고 뭔가 심오하고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는 안목의 정욕에 빠진 것입니다. 사탄이 준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람 자체를 보지 못하고 항상 그 사람의 외형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배경을 봅니다. 그렇게 되면 정작 중요한 사람은 사라지고 외형주의 물질주의만 남는 것입니다. 세상이 구조적 모순에 허덕이고 교회는 부패해서 그런 모순에 대해 비판하고 개혁할 힘을 잃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렇게나 어렵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자체를 보는 것을 넘어서 그 안에 있는 영을 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장애인이나 추하고 못생긴 사람에 대해서도 전혀 편견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부와 가난에 대해서도 어떤 편견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든 분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외형적인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숨을 이어가기위해 필요한 물질을 목숨자체보다 귀중히 여기실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영이라고 하시고 우리의 눈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사람을 볼 때 영적인 것들을 먼저 보게 되지 육의 모습에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은, 육을 가진 사람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영적인 상태의 하나님을 볼 수도 없지만 보게 되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육을 벗고 영의 상태가 되면 영이신 하나님을 보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경성하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점차 점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육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매주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더라도 영안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 먼저 육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 육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연상 작용을 하게 만들고 추하고 더러운 탐욕이 우리를 휘두르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좀 심하게 말해 볼까요? 육체의 소욕에 져서 간통을 저지르는 자가 동성애 반대를 말한다면 이게 먹히겠습니까?
황금탑을 쌓고 있는 자가 청빈과 사랑을 말한다면 이게 사람들의 공감을 얻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는 불법을 저지르면서 진리와 정의를 말한다면 사람들이 이해하겠습니까? 당연히 전혀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목사가, 성도가 세상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기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한점 부끄럼이 없어야 합니다. 결과만을 보는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기 보다 그 동기까지 보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역사적인 순간을 맞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민중이 주인된 시간은 사실 별로 없었습니다. 대개의 기간 동안 우리는 민중이 아니라 민초였습니다. 바람이 불면 먼저 눕고 미쳐 바람이 사라지기 전에 일어서는 민초, 좋게 말하면 처세에 능한 자고 나쁘게 말하면 시류에 영합하는 눈치 쟁이, 하루 양식 때문에 염려하고 권력에 두근두근거리는 우리는 말 그대로 서민이고 민초입니다. 이게 우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우리들이 너무 웃기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한 가정의 가장이요 부모님의 착한 자식이요 사랑하는 배우자의 남편이요 아내이며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모기 때문에 혼자서 세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산화한다는 그런 일은 존재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로 웃기게도 나라는 망해도 사람들의 삶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일하고 그걸로 돈을 받아서 먹고 살고 이건 참 변하지 않는 옛날부터의 패턴입니다. 집에 엄청난 돈을 쌓아 놓지 않은 다음에는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 조차도 세상법칙의 지배를 받고 세상에서 불리워져서 구별되었다고 하는 교회조차도 세상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경은 우리가 그러한 생활인으로서의 일상적인 삶을 탈피할 그래서 세상에 아부하고 세상법칙에 지배받고 사는 삶을 벗어날 수 있는 한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16절부터 나와 있는 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그 뒷부분을 살펴볼 것이기에 이 부분을 생략합니다. 16절부터는 제가 한번 설교를 했습니다.

 

1.만일 우리가
여기서 ‘만일’ 이란 말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기 때문에’라고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야 하고 성령의 발자취를 따라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살아야하는데 그게 다른 말로 성령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모범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면 만사에 있어 가장 효율적이며 형통한 길로 가게 될 것임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뭐가 성령의 인도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앞에 16절부터 보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어떤 삶인가에 대해서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가 완전하게 지키기는 어려운 것들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살아야 되고 또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허영이나 교만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런 것들을 구해서 서로 경쟁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서로 예수를 잘 믿기는 경쟁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쟁이 혹여나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 이상하지만 “니는 하루 몇시간 기도하노?” “나는 한시간”
“그래 나는 하루에 두시간 기도하는데” 그러면 질문 받은 사람이 속으로 ‘두고보자, 나는 앞으로 하루 세시간 기도할꺼다’ 이렇게 하면 이게 좋은 현상입니까? 삶은 언제 살고 남은 언제 도우고 일은 언제 하지요?
그리고 그런식으로 경쟁하는게 진정한 기도일 수가 있을까요? 그래도 기도만 많이 하면 된다고요?

 

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기도도 중요하지만 우리 성도는 삶이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의 삶이 겸비하고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가면서 살게 되면 그게 저절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종일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만 한다면 그건 성도가 아니라 기도가 아니라 무당에게 잡귀들에게 복을 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이 다르다구요? 예, 대상은 다르지만 그 하는 행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그의 명령을 따를 뿐. 조금 더 나가면 그에게 호소하거나 그의 자비를 간구할 뿐입니다.

 

만일 어떤 이가 잘 믿는다고 생각되면 ‘아 , 저 사람은 참 신앙이 좋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야지 자기와 비교하고 은근히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인정하도록 신경을 쓰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앞에 말씀드린바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잘 믿는  행위가 되어야지 육체로, 겉으로 나타난 행위로는 경쟁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들 앞에서 하루에 네시간 다섯시간 기도한다고 제단 앞에 엎드려 있어서 참 신앙이 좋다는 평판을 얻을 수는 있지만 우리 하나님의 눈으로 그게 제대로 된 기도인지 단순히 남에게 신앙 좋은 이로 보여지기 위한 외식적인 행동인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행위에 있어서 그냥 하나님이 판단하시도록 두고 우리는 서로 덕을 권하고 칭찬하고 서로 기뻐하면 됩니다. 네가 잘믿니 내가 잘믿니 하는 경쟁은 정말이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네가 받은 은사와 내가 받은 은사가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사용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공동체지 서로 경쟁하고 남을 짓밟고 지배하는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 속에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겸비함과 교회에 대한 섬김의 자세가 없다면 그건 다 사람들에게 보여서 헛된 영광을 차지하려는 쇼에 불과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한 때 목사들 사이에서 국가조찬기도회에 초대받는 것을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초대만 받아서는 안되고 여기에 순서까지 맡기를 바라고 이 순서가 기도인지 설교인지 축도인지에 따라 서로 누가 더 존중받는지를 비교하려는 영적인 시샘도 엄청났습니다. 게다가 누가 대통령과 더 가까이 앉는가를 가지고도 경쟁을 했습니다.

 

그 대통령이 실제로 독재자이거나 부정한 권력자일지라도 그러한 것에 대한 비판이나 쓴소리는 없이 서로 아부하고 그래서 권력자의 총애를 받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앞에서 올바로 서는 것 보다 더 큰 영광으로 아는 이들이 있었는데 시대가 바뀌고도 이런 사람들은 전혀 회개하지 않고 새로운 권력의 줄을 찾아 또 경쟁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의 명예욕은 정말 끝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대형교회 목사들이거나 기독교단체의 무슨 무슨 감투를 쓴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다른 묵묵히 초야에서 복음사역에 전력하는 목사들이 도매금으로 욕을 먹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들 초야의 목사들은 언론에 그들의 선행이 노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들 중에서도 저보다 훨씬 더 잘 섬기는 이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솔직히 지극히 근시안적이라서 언론에서 떠드는 것만 알지 그 너머를 보지는 못하거든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그들에게 보답해 주실 것을 제가 믿습니다.

 

자,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이것 때문에 형제를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권세에 대한 투기는 실체가 명확하지만 명예에 대한 투기는 실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더 집요하고 더 끈질기게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그 교회는 성령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분냄과 수군수군함과 파당이 일어나고 더 이상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로서의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게되고 결국 세상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없어서 무당에게 호통을 듣는 목사라면 그건 교회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것입니다.

 

2.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6잘은 5장에서 말했던 원칙들을 실제로 교회에서 어떻게 적용할가에 대해서 기술한 글입니다. 여기에서는 1절에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경상도에서 가장 큰 죄가 뭔지 혹시 아십니까? 살인? 강간? 간통? 사기? 도둑질? 부정부패? 여러분 놀라실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저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바로 ‘들킨죄’입니다. 저도 경상도지만 이런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는데 경상도 포항 출신의 어떤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는 ‘야, 정말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의 경상도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어때요? 그럴듯합니까? 어떤 죄를 저질러도 되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들키면 그래서 체면이 손상되면 그게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이고 그는 매장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그래요, 들킨죄를 저지르면 그런 자를 바로 잡으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서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범죄’는 형법적인 처벌을 받을 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윤리적인 죄를 말합니다. 여기 ‘범죄’의 원뜻은 ‘발을 헛디딤’입니다. 도덕적인 허물정도로 봐도 좋습니다. 성경원문에서 살펴보면 성령의 인도에서 벗어난 삶을 말하는 겁니다. 성경은 성도가 성령의 인도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범죄라고 하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허물이요 과실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밝혀지면, 이걸 들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자를 바로잡고.

 

그런데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게 단순히 ‘들킨죄’이기도 하지만 보다 원문을 자세히 분석하면 그냥 범죄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죄의 기습을 받아 죄의 유혹에 빠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죄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 상태, 본인도 모르게 죄에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바로 잡으라는 말입니다.

 

결코 일부러, 치밀하게 고의적으로 계획적으로 범죄한 이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죄에 빠진 형제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런 형제를 발견하게 되면 그렇지 않은 교인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온유한 심령’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지와 무능력을 고백하고 겸손한 심령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범죄한 이에게는 정죄나 비판보다는 나도 하나님 앞에 그러한 죄에 빠질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형제를 바로 세우겠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권고하고 바로 잡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복시키라는 말입니다. 실족해서 잘못 가고 있는 형제를 무조건 징계하거나 비난만 하지 말고 사랑으로 바로잡아서 그 형제를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범죄한 자를 자신에 대비하여 보아서 스스로 근신하고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타산지석으로 삼아 나는 결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잘못한 자인데도 불구하고 정죄도 하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사랑으로 덮어 주고 ‘나도 저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거나 그리스도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계속해서 교회가 타락하고 정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때요? 그렇습니까?

일반적으로 한글 성경으로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의 범죄자는 흉악무도한 죄를 저지를 죄인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지 못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 디뎌서 실족한 자를 말합니다. 결코 개전의 정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아무런 잘못에 대한 벌도 주지 않고 그냥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용서한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하고 회개에는 죄값을 치르고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도 포함됩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도 용서받는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이때는 더 큰 공을 세워서 더 바르게 살아서 전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용서하고 어떤 죄도 용서하고 그리고 또 죄를 저지르고 또 용서하고 하는 그런 값싼 용서가 아닙니다. 일흔번씩 일흔번이라고 용서하려면 그의 통회 자복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죄값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 길에서 벗어나서 이전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건 제가 어디서 본 예화입니다. 미국초기에 어떤 마을에는 벌이 상당히 엄격했습니다. 전혀 용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육체적인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몸에 인두로 지지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벌이기는 하지만 육체형이기 보다는 명예형이라고 봐야 합니다. 가령 도둑질을 했다면 이마에 steal의 s를 지져서 새겨버립니다. 간통을 저지르면 adultry의 a자 인두로 지져버리는 겁니다. 주홍글씨에 보면 죄인에게 그 죄목을 새긴 옷을 입히는데 여기는 아예 이마에 인두로 지져버립니다. 정말 치욕적이고 무시무시합니다.

 

그런데 이 마을 총각 두명이 도둑질로 잡혀 왔습니다. 그래서 이마에 s자가 새겨진 인두를 지집니다. 영원히 ‘도둑’이라는 명찰을 달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두사람 중에 한 사람은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계속 살았는데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에서 마을의 일에 발벗고 나섰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며 새로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때 인두로 지졌던 모든 사람은 다 죽었고 이 사람도 늙어서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마을은 커져서 도시가 되었고 도시로 새롭게 들어온 사람은 이 노인을 보고 잡화점 주인에게 묻습니다. ‘저 노인의 이마에 새겨진 s는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글쎄 나도 모르지만 아마 성자saint가 아닐까요”라고 말했답니다.

요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용서란 처음에 그런 의미였습니다. 물론 전 이러한 처사에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한때 미국 동부에서는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3.너 자신을 살펴보아
여하튼 성경은 성령의 인도를 벗어난 허물이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권면하고 바로 잡으라고, 회복시키라고 하고 스스로에게는 그 형제의 허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바로 살 것을 명합니다.

 

제가 요즘 보면 우리나라에서 큰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면 즉 범죄자가 되지 않으면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죄를 저지르지 않고 그래서 감옥에 가지 않고 정직하게 살면 큰 부자가 되지 못합니다.

 

저처럼 마음이 작아서 죄라고 생각되면 가슴이 뛰는 그런 좀팽이들은 결코 큰 일을 못합니다. 그래서 큰 돈을 만질 수도 없고 큰 부자가 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들키면 한번 갔다 오지 뭐’ 하는 마음으로 대범하게 범죄하고 도덕적인 비난 정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코웃음치고 이래야 뭔일을 해도 할텐데....하하하, 웃깁니까?

 

우리는 이런 세상을 정상적이지 않은 비정상적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비정상이 판을 칩니다. 심지어 누구는 동성애자에게 아부하려고 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는데, 동성애를 나쁘다고 말하는게 죄라고 한다면 그런 권력을 하나님이 결코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게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저는 결코 순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든 야든 어느 누구에게서도 백프로 만족을 찾지 못합니다. 보수라는 이들은 수구를 보수라고 주장하고 이기를 보수라고 주장하며 진보라는 이들은 방종과 타락을 진보의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건전한 나라, 정상적인 나라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극단적으로 자극적으로 나가야만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끈다고 해서 결말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게 아니라 나를 걱정해야 하는 우리네 서민은 사실 나의 이익을 제한해서 나라를 걱정하고 유익을 끼칠려고 하는 일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무슨 예의염치를 차리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실족한 자들이 잘살고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 ‘나도 그래볼까’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죄가 드러나고 창피를 당하고 벌을 받고 하는 것을 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험을 받으면 너희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지를 수 있으므로 그러한 죄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고 기도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죄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지 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마음에 여지를 남겨서는 안됩니다. 성령으로 가득차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4.그리스도의 법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투기하고 경쟁하지 말고 뭐하라고 합니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이 말은 교회의 본질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여기서의 짐은 교인들을 유혹하고 염려에 빠뜨리는 시험거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짐을 혼자서 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시험에 빠지고 실족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해서 이 시험을 무사히 이겨내기를 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염려거리 시험거리를 혼자서 지고서 끙끙거리고 고민하지 말고 서로 그런 짐들을 내어놓고 기도하고 보완하고 사랑하고 협력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말이지요. 서로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 이게 바로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바람직한 ‘교회상’이라고 합시다. 서로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면 자연적으로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너무 부자도 없고 너무 가난한 자도 없고 그래서 서로 물고 뜯고 훔치고 빼앗고 하는 일이 없고 , 또한 억울한 자가 없고 형제를 서로 도우며 도덕적으로도 건전하고 살맛나는 세상,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러면서도 개개인의 꿈을 키워주는 그야 말로 꿈같은 그런 나라를 만들려면 지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그리스도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그 역사의 중심에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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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온화한 마음으로,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마냥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지칠 때도 있고, 짜증날 때도 있고,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도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런 위기의 순간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럴 때 일수록, 욱해서 함부로 행동하기 보다는, "아! 그래 내가 조금 더 양보하지!" 같은 따뜻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들로 인해 때때로 기독교인은 손해보고, 바보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런 착하고 바른 마음들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아 저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다 라고 평가받게 된다면,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우리가 어려운 순간일수록 힘들더라도 선한 선택,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힘껏 응원하고 싶습니다. / 2016. 12. 시북